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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7. 3. 19:03
주니치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시점[視座]’ 코너로 송고한 원고를 재수록.
참의원 선거가 가까워진 까닭에 주위가 들썩이고 있다. 후보자들 몇 명으로부터 ‘추천인’ 혹은 ‘응원’을 요청받는다. 필자는 그게 누구라도 ‘할게요’라고 답한다. 이 말을 듣고서 ‘절조가 없군’ 하며 눈썹을 찌푸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엄밀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당선되길 바란다. 설령 동일한 선거구에서 경합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필자는 아무 후보자에게도 필자의 정치적 의견과의 완전한 일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상당히 달라도 상관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줄지에 대한 여부’를 기준으로 필자는 선거에 임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권력자가 ‘우치다의 발언 기회를 철폐한다’ ‘출판금지한다’ ‘투옥시킨다’ 같은 명령을 내릴 때 온 몸을 다해 반대해 줄 사람이면 아무나 상관 없다.
애초에 필자는 어떤 정당의 정책이 ‘객관적으로 올바른’지를 알 수가 없다. 외교, 안보나 경제에 관해서 필자에게는 정책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없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마저 서로 의견이 분분한 논건을 두고서 초보인 필자가 판단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런 경우에는 ‘올바른 정책’을 선택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내 삶을 편리하게 해줄 정책’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모든 이에게 올바른 정책’이나 ‘과학적으로 타당한 정책’을 필자는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제 행위는 너무나 우발적 요소가 많기에, 세상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정책이 나라를 망하게 했는지는 대강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원래 모습 회복’을 지향한 정책이다. 우리나라가 ‘이 꼬라지’가 된 것은 외부에서 이물질이 혼입되어 사회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물질을 검출해내서 배제하면 사회는 ‘원초적 청정함과 활력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유형의 주장이다.
이런 유형의 망상을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가치 있던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하고 있는 짓도, 신장 위구르와 홍콩에서 중국이 하고 있는 짓도, 이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 환상에 구동된 바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는 결국 양국 모두의 ‘망국’을 초래할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현재로서는 중국과 러시아 양국 국민이 권력자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는 어때야 하는가?’ 보다도 ‘이게 정말로 내가 살기 편한 사회인 건가?’ 하고 자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하는 것처럼 하는 나라가 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나라 본연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가’를 논하지 않는다. 그런 걸 주구장창 논해 봤자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게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사회인가?’를 묻는다. 필자는 기본적 인권이 존중받고, 시민적 자유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살고싶다. 그 이상 바라지 않는다. 나라가 가난해도 좋고, 군사적 강대국이 아니어도 좋다.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며, 주변 국가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될지언정,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이외에 국민에게 살아갈 수단이 없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살기 편한 사회’를 만들어줄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지 필자는 응원한다.
(2022-06-19 13:0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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