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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례함과 비평성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26. 19:32

    어느 지방지에 월 1회 게재하고 있는 에세이. 이번 달은 이런 주제였다.

     

     

    마이니치 신문이 사설을 통해 모 정당의 소속 의원들과 관련해 잇따르는 구설수에 그들의 깊은 반성을 촉구하는 논설을 실었다. 언론이 일개 정당을 지명하여 좀 더 ‘상식적으로’ 행동할 것을 쓴소리하기에 이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외모지상주의적 발언이나 학력 위조 의혹 등, 해당 정당 의원 몇몇의 스캔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쓴소리가 받아들여져서 이후 이 정당의 소속 의원들이 ‘예의 바르게’ 처신하리라 생각하는 독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정당의 소속 의원들은 이 사회에서 ‘양식적’으로 간주되는 언행을 도발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여태까지 높은 지지도를 얻어냈으며, 선거에서 줄곧 이겨왔기 때문이다. ‘예의 없게 구는 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성공할 기회가 높다’는 사실을 성공 체험으로써 내면화한 사람들이 이제 와서 매너를 바꿀 이유는 없다.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경험칙은 이 정당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고, 지금 현재 일본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것으로 필자에게는 보인다. 현재 일본에서는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느 정도 날카로운 비평성의 표현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SNS에서 전혀 일면식 없는 인간에게 갑자기 ‘너’라고 시비를 걸며, 매도의 말을 퍼붓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일단 사람한테 호통을 치며 말을 시작한다. 아마 그들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행하고 있으리라 본다.

     

    ‘나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다. 보통 인간은 <상상도 못할 정도>가 아니고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건, 내 분노에는 충분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이하게 말하자면, ‘내가 화내는 이유는 내가 정당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필자가 대학에서 교무부장을 지내고 있던 때, 학생의 부모가 별안간 ‘사과하시오’ 라며 전화를 걸어왔던 적이 있었다. ‘무엇에 대해 사과하라는 겁니까?’ 하고 물었지만, 가르쳐 주지 않았다. ‘보호자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는 건, 대학 잘못이 있는 게 틀림 없으니까 그런 거다. 잔말 말고 사과하라. 우선 그게 순서다’라는 고집을 피웠다. 짜증이 나서 전화를 끊고 말았다.

     

    아마 이 남성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제까지 협상에서의 난항을 순조로이 헤쳐나갔던 성공 체험을 해왔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된다. 은행 창구에서도, 편의점 계산대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마주친다. ‘정당한 요구를 할 때, 인간에게는 무례한 방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에 분명히 일리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명제인 ‘무례한 방식을 취하는 인간은 정당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추론은 틀렸다.

     

    대부분의 경우, 과도한 무례를 범하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불평이 논리적으로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음을 사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례함’과 ‘비평성’을 혼동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필자 자신 젊었을 적에 이 두 개념을 혼동하였다. ‘촌철살인’이나 ‘쾌도난마’같은 일도양단적 평언(評言)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제멋대로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오래 살고 보니, 무례함의 강도와 언명(言明)의 진리성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알아줬음 하는 것은 ‘비평적이면서도 예의 바른 말하기 방식’이라는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문장을 찾아내어, 될 수 있으면 그러한 ‘말하기 방식’을 몸에 익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곤란한 사업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만한 야심적 목표를 자신에게 부과해도 좋지 않을까. 아직 자기 도야를 위해 쓸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으니까.

     

    비평적이면서도 예의 바른 문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다는 사람한테는 아나톨 프랑스가 지은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추천드리고 싶다. 내용 이해 이전의 차원에서, 그들의 호흡 긴 문체 그 자체를 음미해주기를 바란다. 복잡한 대상을 말할 때는 그만큼의 지적 폐활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알게 되어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두꺼운 책을 읽을 짬이 안 난다는 분에게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조형(造形)해 낸 명탐정 필립 말로의 유명한 대사를 소개드리고자 한다.

     

    ‘강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 바른 인간이 아니면 살 자격이 없다.’

     

    (If I wasn’t hard, I wouldn’t be alive.

    If I couldn’t ever be gentle, I wouldn’t deserve to be alive.)

     

    ‘예의 바르게 처신할 수 없다면,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매우 엄혹한 구절이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일본인이 진지하게 경청해야 마땅한 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22-06-15 17:1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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