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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화의 교육론> 관련 인터뷰 제 1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22. 23:53
— 근간 <복잡화의 교육론> 저술의 출발점이 되었던 강연 이래 1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교육계에 일어난 일들 중 주목할 만한 사안이 있으십니까?
심려가 된 여러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 교육의 위기가 걱정됩니다. 예를 들면 ‘대학 기금’ 제도입니다. 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대학은 연 3%의 교육사업 성장치를 정부에 약속해야만 한다는 방침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대학에 ‘이익 추구’를 요구하고, 그 성과에 따라 등급을 나누게 되면 교육과 연구의 지침이 단기적 이익창출의 방향으로 한정되기도 하거니와, 교원의 업무부담도 한층 늘어납니다. 연구교수에 더해 행정 등 교원의 노동강도가 과중되는 바람에, 교원 희망자 수가 줄어드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 공교육이 위기에 처한 것이 체감됩니다. 대안적인 선택을 하는 보호자도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공교육에 당대의 지배적인 정치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게 일본의 현실입니다. 지자체의 수장이 바뀌고 나서 지역 교육이 홀라당 뒤집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에 대비되어 사립학교에는 건학 정신이나 독특한 교풍이 있어서, 그것이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교육이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되는 일에 제약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보호자가 정치 과잉을 꺼려한 나머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제가 사립학교에 우려하고 있는 점은, 결국 동질성이 높은 학생들이 모여버린다는 것입니다. 학력이나 출신 계층 측면에서 동질성이 높은 급우들과 중고등학교 6년 내내, 혹은 초등학교 때부터 12년 동안 지내는 일은, 자녀의 성장에 있어서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성장기에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출신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와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 방면으로 가는 게 성숙해간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환경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사립에 보내기 위해서는 응분의 경제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개인으로서는 이 밖에도 여러 선택지가 있습니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검정고시를 치르는’ 경우도 있고, ‘방송 통신 학교 등 대안 학교에 가는’ 경우도 있으며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 앞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층위에서의 문제 해결에 불과해서, 결국 제도적인 문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진학과 관련해서 다양한 선택지를 누릴 수 있는 건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모가 경제력이 있는 경우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에게는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시 공교육 재건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 공교육의 위기에는 어떠한 요소가 크게 영향을 미쳤을까요? ‘자유 정치’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일본의 공교육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교육, 의료, 행정, 사법 등의 제도는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최우선시됩니다. 정치체제나 경제 시스템이 바뀐다 할지라도, 위에서 든 네 가지 제도는 그러한 사회적 변화와는 상관 없이 계속적으로 관리, 운영되어야만 합니다. 정권 교체라든가 주가 하락 등의 이유로 교육이나 의료 제도가 경솔하게 바뀌어서는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치와 자본은 그러한 안정적인 제도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을 용납치 않습니다. 그것이 정치와 자본의 본질적인 경향입니다. 특히 정치가에게는 교육계란 것이 본래 정치 과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갖고 기능하고 있는 제도라는 점에서 눈엣가시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가는 우선 행정, 의료, 교육 분야에 손을 댑니다. 그리고 사소한 사회적 변화를 핑계 삼아 ‘슬그머니 바뀌는’ 제도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다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하루아침에 이전 제도가 폐기되고 다시 갱신되는 일이란 의료, 교육, 행정 분야에서는, 사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한편, 자본이 의료나 교육에 함부로 간여하는 이유는, 현행 자본주의 체제가 한계에 다다른 나머지 이제는 더이상 이익 창출을 위한 ‘먹거리’를 찾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의료와 교육은 ‘없어지면 집단이 유지될 수 없는 제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제도를 이리저리 뜯어고치고, 기능 고장을 일으키며, 파괴시켜도, 최종적으로는 정부가 됐든 민간이 됐든 누군가가 돈을 갹출하여 그 제도를 유지시키고자 합니다. 비즈니스맨이 의료나 교육 분야에 지분대는 까닭은, 그것이 절대 안전한 ‘돈벌이’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이 정치와 연계성을 갖는 일을 막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래로 근대 학제가 출범하게 되는데, 이때 학교 교육은 ‘국가 수요 인재’를 육성한다는 국가 목적에 기반해 제도가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근대 국가의 출범, 유지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 그 경우에도 장기적인 시점에서 ‘어떻게 국력을 신장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다양한 인재를 꽃동산처럼 꽃피우게끔 하는 구조를 다지는 것이 장기적인 국력 향상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현장에 커다란 자유재량권을 부여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반권력, 반체제를 불사하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가 배출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통치 비용의 최소화를 우선시하는 정치가는 그러한 구조를 채용하지 않습니다.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당대의 권좌에 앉게 된 인간이, 정권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권의 안정화에 복무하는 ‘입 안의 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낼 것을 학교 교육 현장에 요구합니다. 상급자에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비판력이 없는 ‘예스맨’을 양산할 것을 학교에 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단기적으로는 통치 비용이 낮아지고 정권은 안정되지만, 국력은 서서히 스러져갑니다. 나라는 가난해지고,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줄어들며, 문화적 생산력도 쇠합니다. 그건 세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을 말할 때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란 누구를 말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되풀이하여야 마땅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때그때 정권에 앉은 정치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국민을 ‘국가 수요 인재’로 정의하는 짓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그것이 공교육에 있어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2차 대전 이전에는 ‘교육 칙어’에 입각해 국가가 공교육에 개입하여,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국민’을 제도적으로 양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수백만 명의 국민을 잃고, 국가 주권과 국토를 잃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교육이 일본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 전례를 철저하게 반성하여, 다시는 정치가 교육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자율적인 교육의 구조를 만들자는 결의로부터 전후 교육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존재했던 것과 같은 긴장감을 현재 일본 학교 교육에서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기업계의 학교 교육 개입도, 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산업계는 주구장창 ‘높은 능력을 소지하고, 값싼 임금을 받고 일하며, 상급자에게 거역하지 않는 인간’을 양산하라고 말해왔습니다. 이는 영리기업인 이상 당연한 요청입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에 기여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재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기업 내부에 교육 기관을 만들어 자기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교육을 행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업으로 하여금 인재 육성 비용을 부담시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육 비용을 전부 공교육에 ‘외주화’시키려 듭니다. 세금 지출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인재를 육성시키려고 합니다. ‘비용의 외주화’는 자본주의 기업의 기본이므로,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본은 학교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지 마라’고 끊임없이 반복해 말하는 것 뿐입니다.
정치의 개입과 관련해서는 부모도 꽤나 신경질적으로 나오지만, 자본의 개입에 대해서만큼은 보호자들 스스로가 뼛속까지 ‘자본가적 마인드’를 갖추고 있는 까닭에, ‘시장 개입이 뭐가 어때서?’ 라며 의심쩍은 눈초리를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육이란 자녀들한테 ‘부가가치’를 붙여서 노동 시장에 비싸게 내놓기 위한 것이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보호자는 적지 않습니다. 기업이 채용해 줄 만한 인재로 키우기를 학교 교육에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육 투자’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농합니다. 시장 논리나 용어를 부모들 뿐만 아니라 자녀들 자신조차 내면화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정치와 자본의 개입을 물리치고 공교육에 자율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시급한 과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교육을 정치의 개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의 개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육 현장의 자유 재량에 맡겨두고, 정치는 교육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치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공권력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모순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정치의 변화에 기대’하는 것은, 학교 교육에 있어서 양날의 검과 같은 리스크가 있습니다. 확실히 정치의 변화 없이는 어지간히 학교 교육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허나, 정치의 변화에 기대한다는 것은, 정치의 공교육 개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딜레마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의 개입을 막는 일은, 현재 일본에서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부모 교사 모두, 자녀에게 높은 부가가치를 붙여서, 노동 시장에 내보내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적이라고 마음 속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 옹고집을 어떻게 조금이나마 불식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설득해봤자, 아마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교육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제시한 뒤, ‘지금 교육은 이런 꼴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은 망할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는 물음을 제기해 놓고서, 모두의 지혜를 끌어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힘 있는 누군가에게 ‘정답’을 내놓으라고 한 뒤 그것에 따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민 전체가 철저하게 ‘학교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공교육을 이렇게까지 파괴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으므로, 이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는 관민 합동으로도 똑같은 만큼의 세월이 걸릴 거라고 봅니다.
— ‘격차사회’가 이슈가 된 지 오래되었는데요, 사회 격차나 학력 사회 등을 학교 교육과 연계하여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학력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현재 차츰 완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들이 유명해질 기회라든가, 돈을 많이 벌게 될 커리어패스란 게 여러가지 마련되어 있는 시대니까요.
제가 학생이었던 때는 일본이 아직 가난했었던 시절이었는데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출세를 하려면 좋은 학벌밖에는 달리 수단이 없었습니다. 프로 야구선수라든가 가수가 된다는 커리어패스는 굉장히 예외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밖에는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커리어를 형성하고자 할 때 가장 공평히 문호가 열려있던 분야가 학벌이었습니다. 그래서 학벌 사회가 되었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개념이 2차대전 이후 일본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므로, 학벌을 중시하게 된 것은 어떤 의미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들 한 명 한명에게는 선천적인 능력차가 있으므로, 그조차 결코 공평한 경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집이 가난하거나 몸이 허약하다 할지라도 학벌 사회에서는 경쟁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공평합니다. ‘학벌 사회’는 패전으로 가난해진 일본 사회가 민주주의를 채용한 이상,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지금은 학벌의 비중이란 게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많은 직업이 세습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치도 세습, 기업도 세습, 연예계도 세습입니다. 사회의 상위층을 점하는 직업일수록 세습 비율이 늘어납니다. ‘가업’을 잇는 자녀들은 커리어 형성에 있어서 압도적인 어드밴티지가 있습니다. 지금으로써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만으로는 올라갈 수 있는 지위란 게 한정지어져 있습니다.
탈(脫) 학벌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딱히 뭔가 ‘나아진 세상’이 된 건 아닙니다. 오히려 태어났을 때부터 커리어패스의 할당이 마감된 마당에, 개인적 노력으로 기어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사회적 유동성이 희박해지고, 계층이 고정화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학벌이 경시받게 된 또다른 이유는 ‘반지성주의’가 확산된 탓이라고 봅니다. ‘공부를 잘해도 소용 없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 사이에 늘었습니다. ‘내 경우엔 말야, 공부를 못했는데도 이렇게 성공했어. 그러니까 학교 공부 같은 건 안 해도 돼’ 라는 식으로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전후 일본이 학벌 사회가 되었던 것은, 물론 지금 말하는 식으로 ‘커리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 졸업장을 받아야 한다는 게 합리적인 수순이었다는 사정도 있었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지성과 교양’을 높이 평가하는 ‘교양주의’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직해 출세하여 높은 연봉을 받고자 하는 식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입신양명’은 제 공부의 동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 훌륭한 선생님 아래에서, 수준 높은 학문을 닦으며, 학우들과 열띠게 토론하고자 하는 교양주의적인 동기에 구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생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출세하여 돈을 벌고자 공부하는 것이 아닌, 공부하여 폭 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교양을 익히고자 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시공부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것을 통과하기만 하면, ‘학문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에게 설득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의 공부가 ‘수준 높은 지성의 장’에 참여하기 위한 발판이라고 여기는 학생은 극히 소수가 아닐까 합니다. 입시는 그저 ‘줄세우기’를 위한 경쟁일 뿐이고, 공부해서 높은 점수를 따두는 건 차후에 ‘학문의 전당’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이 되므로, 그것이야말로 공부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보호자나 자녀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학교 교육이 그저 선발과 합격을 위해 있다고 생각해버리고 나면, 경쟁에서 상대적 우위에 서는 것밖에는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경쟁 상대를 한 명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유리해집니다. 자신의 학력을 높이기보다, 주변 경쟁 상대의 학력을 낮추는 쪽이 비용대비 효과가 월등하므로, 학교 교육을 랭킹 게임처럼 취급하면, 자녀들의 학력은 점점 하락하는 게 당연합니다.
상대적인 우열만을 문제삼으면, 모두가 ‘공부를 못하는’ 상황에서야말로, 최소한의 학습 노력으로 최대한의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학령 집단 전체의 학력이 저하하는 상황이,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는 환경에서는 가장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전원이 공부에 의욕을 잃게 될까에 관해 자녀들이 힘쓰게 됩니다. 현재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거의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봅니다. 학생들끼리 하는 대화를 어깨너머로 엿듣다 보면, 서로의 지적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화 주제는 일단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대화는 ‘그런 걸 알고 있어도 학력 향상에는 어떠한 영향도 가져다주지 않는 정보’의 교환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화제의 선택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근 10년 간 정치가들의 지적 열화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깊은 교양을 느끼게 하는 정치가의 발언이라는 것 자체를 저는 오래 전부터 접해볼 기회를 잃었습니다. 도리어, 지성과 교양에 아무런 존경을 표하지 않는 정치가들이 교육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의 고등 교육은 선진국 최하위를 향해 전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절실한 위기감을 갖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2022-06-06 10:4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주석】
* 2020년 당시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 내각이 일본 학술회의 신규 회원 임명을 거부한 사건 등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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