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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 여러분께: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16. 21:04

한국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금번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살까 말까’ 고민하는 분께도 책을 손에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모처럼 고르셨으니까, 잠시나마 이 ‘들어가는 글’ 만큼만은 읽어주십시오.
‘들어가는 글’을 읽어보기만 해도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와 인연이 있는 듯한 책’인지 ‘아예 상관이 없는 책’인지는 직감적으로 식별해낼 수 있습니다. ‘인연이 있다’는 것은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 있다’든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술술 이해된다’ 혹은 ‘애초에 이 주제에 흥미가 있었다’같은 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반대입니다.
이 책을 예로 들자면, ‘레비나스가 대체 누구야?’ 하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손에 들어, 이 문장까지 읽어내려온 것, 그것이 ‘인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의외의 책과 만나게 됩니다.
제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은 책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서점 안을 한가하게 거닐고 있는 와중에, 문득 어떤 책과 ‘눈이 맞는’ 일이 있습니다. 어떠한 조건이 갖춰지면 ‘눈이 맞는’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와 편집자(이 책의 경우에는 번역자)가 ‘이 책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만든 책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표지 디자인이라든가 제본이나 지질(紙質),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행간이나 여백 등, 그런 물성적인 사항에도 묘한 ‘힘’이 배어 있습니다. 그 ‘힘’은 서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해도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우치다 다쓰루’, ‘레비나스’, ‘박동섭’ 등이 모두 처음 본 이름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끌어당긴 것은, 이 책이 발하고 있는 그러한 ‘힘’이라고 봅니다.
제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0년 경입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군요. 저는 그 당시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 연구와 관련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모리스 블랑쇼라는 프랑스 문예비평가의 문학 이론에 대해서였습니다(아마 블랑쇼의 한국어 번역은 아직 거의 나오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름을 모르셨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연구를 하려면 참고문헌이 있어야 하므로, 블랑쇼와 관련된 문헌을 인지하는 족족 프랑스 서점에 주문하였습니다(아직 인터넷 서점이나 전자우편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얘기인지라, 인쇄된 카탈로그를 넘겨보고 나서 서점에 편지를 써 보내면, 수개월 후에 책이 도착하는 식의 목가적인 연구 환경이었습니다). 레비나스의 책은 그중 하나였습니다(레비나스는 블랑쇼와 학생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의 책에서 뭐라도 블랑쇼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힌트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주문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도착한 레비나스의 책들 가운데 <곤란한 자유>(Difficile Liberté)라는 300쪽 정도 되는 책을 골랐습니다. 그러고 나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말 한 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10쪽 정도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하나도 못 알아먹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상당히 난해한 철학책들을 읽어왔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전무후무했기 때문입니다.
평소대로라면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겠지만, 저는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힘’에 의해 저자에게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딱 거리를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낯선 외국인이 제 손을 거칠게 낚아채서는 엄청난 기세로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인지라, 뭘 말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길을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곧바로 저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붙들고서 말을 걸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끔 되자’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이 구사하고 있는 ‘외국어’를 먼저 습득해야만 했습니다.
레비나스는 물론 프랑스어로 쓰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문법을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틀림없는 프랑스어입니다. 저는 그때까지 10여년 간 프랑스어를 상당히 집중적으로 공부해왔으므로, 사전만 있다면 대체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여러 철학 용어 또한 구사합니다. 모두 ‘철학 사전’을 펼치면 의미를 알 수 있는 말들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해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때, 제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이 책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 슬쩍 책을 덮고, 다시는 손에 들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자’고 결의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레비나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의 ‘컨텐츠’는 이해할 수 없지만, ‘받는이’가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딱히 수수께끼같은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애당초 모친이 아기에게 말을 걸 때, 아기는 모친이 발하는 메시지의 ‘컨텐츠’같은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직 모국어를 습득하지 않았으므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의 ‘받는이’가 자기라는 점은 압니다. 그 사람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고, 그 목소리의 파동이 피부에 직접 부드럽게 감촉이 되면서, ‘이 사람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물론 ‘나’라는 개념이나 ‘말을 건다’는 개념은 아직 아기의 어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확신을 기반으로 해서 비로소 정말로 ‘이 사람’이라는 개념, ‘나’라는 개념, ‘대화 상대가 되고 있다’는 개념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국어를 습득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자신이 수신인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는 메시지를 받음으로써 ‘성장’해 나갑니다. 그것은 모국어의 습득이라는 경험 하나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 신체에는(머리 뿐만이 아니고 오감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 - 옮긴이) 그게 두 번 일어났습니다.
레비나스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를 향해 말을 걸고 있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후 40년간, 저는 레비나스를 계속 읽어왔습니다. 레비나스의 저작을 몇 권 옮기기도 했고, 논문도 썼습니다. 이 <레비나스의 시간론>은 제가 40년간 써 왔던 레비나스론 가운데 최신 저작입니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시간을 들여서 제가 확신할 수 있었던 레비나스의 ‘말하고자 하는 바’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인간은 자기가 받는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내용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두고서 이를 독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 형성해 나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물이다’였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레비나스와 처음 만났던 순간, 저는 레비나스로부터 배워야 했던 것을 이미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비나스와 만났던 순간에 저는 이미 ‘레비나시앵Levinassien’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란 것은, 그런 식으로 시간의 앞뒤를 역주행하여 성취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들어가는 글’을 이쯤에서 맺고자 합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가 2차대전 직후 파리의 철학학원이라는 곳에서 4번에 걸쳐 행한 시간론(時間論) 강의를 거의 직역적으로 정독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굉장히 난해합니다. 그래도 신경쓰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면서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게 내게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쓴 보람이 있겠습니다.
항상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해 주는 박동섭 선생의 노고에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국에서의 레비나스 독자가 한 사람이라도 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2022년 5월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 그의 대표작 『시간과 타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뒤 파리 철학학원에서 이뤄진 네 차례 강연(1946~1947)을 토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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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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