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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러분께: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12. 19:33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를 손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점에서 막 집었는데 살까 말까 고민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서문’만큼은 꼭 읽어주십시오. ‘서문’을 읽고 나서 ‘아, 이건 나랑은 상관 없는 책이다’라고 느낀다면 책꽂이에 슬쩍 다시 갖다놓아주세요. 다른 기회에, 다른 책으로 만나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책은 제 일생을 바친 작품인 ‘레비나스 삼부작’ 중 제 2부에 해당합니다. 제 1부가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2001년)이고, 제 3부가 <레비나스의 시간론>(2022년)입니다. 모두 박동섭 선생의 번역으로 한국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 선생의 수고에 우선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정말 언제나 고맙습니다.
제 3부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으로 말씀드리면, 이 책의 후기에도 ‘곧 쓰겠습니다’라고 예고하였는데요, 6년에 걸친 끝에 작년 무사히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출간되었는데, 성마른 박 선생이 이미 번역에 착수하였다 하여, 한국 서점에서도 조만간 삼부작을 모두 접하게 되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자로서의 제 입장을 초장부터 밝혀두고자 합니다. 저는 레비나스 선생을 ‘철학 스승’으로 우러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서재 책상 앞에 1991년 8월 레비나스 선생이 써 주신 편지를 액자에 넣어 장식해두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푸아리에와 레비나스 선생이 가진 장시간의 인터뷰 <레비나스와의 대화>를 번역 출간해드린 것에 대한 사례의 글월이었습니다. 선생이 쓰신 문장의 일부를 옮겨둡니다.
“당신이 행한 작업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어를 읽을 수는 없지만, 당신의 작업이 훌륭한 것임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 대해 대단히 정확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 출장 혹은 관광 때문에 오신다면, 잊지 말고 파리에 있는 저를 방문해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공감과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의 철학적 미래가 번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저는 막 40세에 이르렀을 뿐이었습니다. 아직 학술적 업적다운 업적도 없는 신참 불문학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읽고서 그야말로 뛸듯이 기뻤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상상하실 수 있겠죠.
저는 편지를 받기 4년 전, 1987년 여름에 파리에 계신 레비나스 선생 댁에 방문하여, 몇 시간동안 면담을 가지며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뵌 것은 그때 딱 한 번이었습니다. 90년의 프랑스 방문 때 만나시겠냐고 전화로 의향을 여쭈었더니, 선생은 학회 때문에 막 이탈리아로 가게 되어 시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편지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다음 해에 받은 것입니다. 95년 말에 선생은 돌아가셨으므로, 이것이 제가 레비나스 선생으로부터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제가, 훗날 일생동안 레비나스 선생의 철학적 업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본무로 삼았던 사정을 이해하셨으리라고 봅니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과 <타자와 사자>는 레비나스 선생의 영전에 바친 것입니다. 돌아가신 선생의 학문적 은혜에 대해 제 감사의 감정을 담아 쓴 책입니다.
이 책들은 ‘레비나스 연구자에 의한 레비나스 철학 연구’가 아닙니다. 저는 ‘레비나스 연구자’가 아니라, ‘레비나스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적인 사고방식이나 언어 구사법을 대부분 레비나스 선생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레비나스의 독해 방식을 레비나스 자신으로부터 배운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제 작업은 그저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철학자인지를 여러분께 전하기 위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쓴 레비나스론을 읽어도 아마 여러분에게 ‘그랬군, 그랬어. 이로써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있겠어’라고 무릎을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레비나스를 읽지 않고도 알아먹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제가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레비나스는 이러이러한 것을 썼습니다’라고 조술(粗述)하는 것은, 그것을 읽고서 여러분에게 ‘이해가 갔다는 느낌이 들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레비나스 이해에 쐐기를 박고자’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읽고 나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머리를 싸쥐며,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레비나스를 읽을 수밖에 없다’고 안달이 나는 독자를 한 명이라도 늘리고자 하여 저는 책을 쓴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뒤 레비나스의 책을 실제로 입수하여, 저와는 전혀 다른 독해 방식을 취하는 독자(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오리지널한 레비나스론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한국에도 등장해 주는 것을 저는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부디 앞으로 <레비나스의 시간론>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2022년 4월
우치다 타츠루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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