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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과 반유대주의 음모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1. 20:13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품 <장교와 스파이>(J’accuse, 2019)의 공식 팸플릿에 짧은 글을 싣게 되었다. 이 영화의 일본 배급 과정에서 필자가 자막 검수 작업을 통해 협력하였다. 곧 개봉하므로 부디 봐주셨으면 한다. 그 전에 우선 드레퓌스 사건이 어떠한 역사적 문맥 상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설명해본다.
로만 폴란스키는 소년 시절 나치 점령 하의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유대인 사냥’과 조우하게 된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모친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했다. 홀로코스트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영화는 1895년 1월 5일에 있었던 드레퓌스 대위의 군적(軍籍) 박탈식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날 있었던 일로 인해, 50년에 걸친, 마지막에는 600만 명의 학살에 이르게 된 근대 반유대주의 역사의 신호탄이 울려퍼졌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좋다.
이 군적 박탈식에는 독일 신문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젊은 유대인 저널리스트가 참석한다. 헤르츨은 그 장소를 지배하다시피하는 파리 시민들의 강렬한 유대인 혐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근대 반유대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드뤼몽이 <유대적 프랑스(La France juive)>를 출판, 프랑스 정치 경제 언론 모두를 유대인이 지배하고 있다는 망상적 선동을 시작했던 것은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886년이었다. 그의 <유대적 프랑스>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음모론’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음모론이라는 것은 파멸적인 대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여러가지 복합적 원인의 귀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서, 단일한 ‘오서author(장본인)’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을 이른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은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었는데, 그것을 왕정의 기능 상실, 자본주의의 발전, 계몽 사상의 보급과 같은 복합적인 효과라고 생각하는 대신, 프랑스의 모든 것을 막후에서 지배하고 있는 ‘비밀 조직’이 꾸민 계획의 실현이라고 보는 게 음모론이다.
이 경우 ‘오서’는 반드시 ‘비밀조직’이어야만 한다. 그렇다 함은,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프랑스의 경찰은 이러한 거대한 운동을 털끝 하나도 들키지 않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조직’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암흑 조직’이어야만 한다.
어쨌든 ‘비밀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전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그게 누군가?’하는 점이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템플 기사단, 영국 해적자본, 신교도… 여러 후보가 거론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유대인 세계 정부’가 ‘오서’였다는 얘기로 낙착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은 피차별 신분에서 해방되었고, 시민권을 획득하였으며, 정치 경제 언론 각계에 명실상부히 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목전에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드뤼몽은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의 유일한 수혜자는 유대인이다. 모든 것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유대인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유대적 프랑스>)
어떤 사건의 수혜자가 그 사건의 ‘오서’라는 추론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은 ‘바람이 부니 통발 장수가 돈을 번다*’는 사실에서 통발 장수가 기후현상을 컨트롤할 수 있는 오묘한 힘을 갖추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만큼이나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이 음모론에 프랑스 독자는 달려들게 되어, <유대적 프랑스>는 19세기 프랑스 최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은 이 황당무계한 음모론이 한 사람의 유대인 장교를 파멸로 이끌 정도의 현실 변성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세상에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 바람이 세게 불면 눈을 상하기 쉬워 맹인이 늘어나고, 그 맹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악사가 되고자 한다. 악기 샤미센은 고양이 피부로 만든다. 그래서 고양이가 줄어들고, 동시에 쥐가 늘어난다. 쥐는 통발을 갉아먹는다. 따라서 통발장수는 돈을 번다는 이야기 - 옮긴이)
헤르츨은 그 책의 이러한 주장을 믿은 사람들이 ‘자유 평등 박애’의 조국이었음이 분명한 프랑스의 수도에서 분노에 치를 떨며 ‘유대인은 물러가라’고 절규하는 광경에 대단한 충격을 받아, 유럽 땅에는 앞으로 유대인이 발 붙일 장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통찰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헤르츨은 ‘유대인은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나 아시아 어디든 좋으니 자기들끼리의 나라를 만들어 거기서 살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대들의 민족적 존엄 또한 지킬 수 있다’는 드뤼몽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유대인의 본향’을 창건하겠다는 근대 시오니즘의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헤르츨이 바젤에서 제 1회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한 것은 드레퓌스의 군적 박탈이 일어난지 2년 뒤의 일이다.
이 똑같은 광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또 한 사람의 유대인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보다 무려 2년 전에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여, 드레퓌스의 무죄 운동을 촉구하는 논진을 펴게 된 베르나르 라자르이다. 그는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드레퓌스 사건에 무관심을 표명하며 자기 안위에만 급급한 태도에 분노가 폭발하여, ‘맞아도 저항하지 않고, 등을 구부리고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태고적부터 처세술로 삼아왔던 유대인’에 작별을 고하며, ‘전투적 유대인 군단’의 등장을 예언하였다. 이 군단은 언젠가 드뤼몽과 그 일당과 대치하여 “그저 연대하는 것만이 아니고, 습격을 가할 것이다”라고. (<반유대주의에 반대한다>)
헤르츨과 라자르 두 사람은 뒤에 근대 시오니즘 운동을 견인하는 키 퍼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유럽 사람과의 공생을 단념하고, 유대인만의 나라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그들에게 뼈저리게 확신시켜준 것은, 드뤼몽의 반유대주의 프로파간다와 드레퓌스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만 보고 있으면, 드레퓌스 사건이 그 뒤 일어난 무수한 폭력과 유혈의 근원적 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로서는 알기 힘들다. 영화는 ‘드레퓌스 파’의 승리(피카르의 육군장관 취임, 드레퓌스 복직과 승진) 장면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드뤼몽은 그 뒤로도 ‘드레퓌스 파’는 프랑스인을 노예화하려 하는 유대인 세계정부의 주구(走狗)라고 계속 주장하며, 드레퓌스의 무죄 확정과 복권 그 자체를 유대인 세계정부가 프랑스의 통치 기구를 막후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드뤼몽은 유대인이 유죄라면, 그것은 유대인이 악행을 획책하였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고, 유대인이 무죄라면, 그것은 유대인이 만사를 깡그리 없던 일로 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암흑의 힘을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무적’의 논리를 관철하였는데, 많은 프랑스인이 그 주장을 지지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되어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우익의 거두가 되었으며, 만년에는 프랑스 학사원Académie française의 회원 자리까지 차지했다.
<유대적 프랑스>의 최신판은 2016년에도 출간되었다. 이 음모론은 족히 3세기를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프랑스의 반이슬람, 반이민, 반LGBT 등 유해한 민중 운동을 끝없이 양산해내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가 이 영화 제작 추진에 현시대성이 있다고 느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22-04-18 09:3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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