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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에 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14. 23:57
얼마 전에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청년이라고는 하지만 필자보다 30세 정도 연하이므로 중견의 위치에 가깝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조금 생각해본 뒤 ‘그건 용기 아닐까?’ 하고 답하였다. 말하고 나서 보니까 확실히 어렸을 적에 만화나 소설 같은 매체를 통해 ‘소년이여 용기를 가져라’ 하는 식의 주입식 교육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 탐정단 주제가” 역시 ‘우리는 늠름한 소년 탐정단 / 수정과 같은 확고한 용기’ 운운하는 대목으로 시작된다. 1950년대의 소년에게 요구되었던 자질은 무엇보다 용기였다.
용기라는 것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틀리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말해도 그만 두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을 겪은 어른들이 우리들 전후 세대 아이들에게 ‘일단 용기를 가져라’ 하고 가르친 것은, ‘자신에게는 용기가 부족했었다’ 하는 그들 스스로의 참담한 심정을 깊이 뉘우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시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발설하지 못하고, 행동으로도 옮기지 못했으며, 마지못해 대세를 따라, 끝내는 망국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시 세대 사람들은 우리들 전후 세대에게 ‘먼저 용기를 가질 것’이라고 가르쳤을 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 함은, 그 세대가 낳은 자식들이 자라서 운동권에 투신하였을 적에 내걸었던 ‘연대를 추구하되 고립을 두려워 말자’는 슬로건에 정서적인 반응을 표한 것도 당연하다.
어찌하여 ‘용기를 갖고서’라는 훈도가 자취를 감추었겠는가 하는 그 이유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받게 된지라, 이 또한 그 자리에서 잠시 생각해본 뒤 <소년 점프>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답하였다. 월간 만화잡지 <소년 점프>가 작가들에게 요구한 이야기의 기조는 ‘우정, 노력, 승리’이다.
첫째로 ‘우정’을 꼽는 것이다. 필자가 보건대, 우정과 용기는 궁합이 안좋다. 우정은 이해와 공감에 기반한 것이다. 주위 친구들이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며, 지지해주는 것이다. 한편 ‘용기’는 주위의 이해, 공감, 지원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다. ‘애초에 모든 게 우정에서 비롯되는’ 세계에서는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이 설 곳이 없다.
<맹자>에 ‘천만 명 앞에서도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옛사람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의 주인공 주변에는 동맹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모양이니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우정’과 ‘승리’가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세상 속에서, 이 주인공은 그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놈’으로 대접받는 수밖에 없다.
용기가 최우선적인 덕목이었던 시대에는, 그 뒤를 잇는 덕목으로 ‘정직과 친절’이 있었다. ‘용기, 정직, 친절’과 ‘우정, 노력, 승리’는 정말로 다르다. 정직이나 친절은 사적인 것이다. 눈 앞의 살아 숨쉬는 변화무쌍한 인간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자신의 진솔한 감정이 필경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얼마나 전해질 수 있을지에 관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윤리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력은 다르다. 노력에는 남이 관여하지 않는다. 노력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자기 한 사람의 문제이다. 그리고 참으로 ‘노력’했는지의 여부는, ‘승리’의 여부로 검증될 수 있는데, 이는 사후적이고, 객관적이면서도 외형적이다. 과연 시대는 그런 변천사를 겪은 것이구나 하고 필자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축사를 낭독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내면과 직관에 따르는 용기입니다’ 라고 감동적으로 웅변했다. 이어서 그는 ‘내면과 직관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잡스는 ‘내면과 직관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내면과 직관에 따르는 용기’야말로 그렇다고 말했다. 용기가 필요한 까닭은 미숙한 아이들이 ‘내면과 직관에 따르는’ 일을 주위의 성숙한 어른들은 허락치 않기 때문이다.
큰일을 도모할 때, 먼저 주위의 공감이나 이해를 바라서는 안된다. 잡스의 이러한 견식에 필자는 전폭적인 동의를 표명한다.
(2022-04-07 10:5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 노트】
* 맹자 공손추 上 제 2장: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자반이축 수천만인 오왕의)
*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 “연대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보이는 이러한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연대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롭게 탄생된 것인데,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야. 지금 연대로 보이는 것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지. 인간들은 서로가 두렵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있어. 신사는 신사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는 학자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은, 그게 누구던가를 막론하고 운명에 준비했다는 것만으로 유능하고 활동적이었던 거야. 모세와 부처가 그러했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러했지. 그 사람이 어떤 파동에 휩쓸리는가, 어떤 극에 지배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선택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니야.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되었을지 모르지만 운명의 인물이 될 수는 없었을 테지. 나폴레옹도, 카이사르도, 로욜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던 거야!”
“우리는 같은 심연에서부터 시작된 시도이고 투척이다. 하지만 자신 나름대로의 목표를 실천하며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 (Uns allen sind die Herkünfte gemeinsam, die Mütter, wir alle kommen aus demselben Schlunde; aber jeder strebt, ein Versuch und Wurf aus den Tiefen, seinem eigenen Ziele zu. Wir können einander verstehen; aber deuten kann jeder nur sich selbst.)
<데미안> (이순학 역)
*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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