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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서는 안된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7. 20:01
아사히 신문과 가진 인터뷰의 롱 버전이다.
— 문장을 쓸 때 ‘상정 독자’로 염두에 두는 존재가 있을 법도 한데요.
글을 쓸 때 설정하는 상정 독자는 두 명인데, 한 명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는 히라카와 가쓰미 군(71)이고요. 다른 한 명은 두 살 위인 친형 도오루(徹)입니다. 형은 6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지금도 변함 없이 형이 읽고 나서 납득해 줄 만한 것을 쓰자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 형님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어렸을 적에는 저를 심술궂게 대하니 ‘갑갑한 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는 점점 친해졌습니다. 특히 형이 기타를 치기 시작하며, 록 음악에 열중할 때부터였어요. 형이 싱글 음반을 사가지고 와서 저를 형의 방으로 불러놓고서는, ‘일단 한 번 들어봐’ 하고 요란하게 권하는 겁니다. 캐럴 킹,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등을 전부 ‘아무튼 좀 들어봐’라면서, 저에게 다짜고짜 들려준 겁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그게 저에게는 음악적 자양분이 되었어요.
그리고 영화도 그랬어요. 자기가 재밌게 본 영화의 어느 부분이 흥미로웠는지 한도 끝도 없이 얘기해주는 바람에, 저도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요.
형은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습니다만, 1970년대 전공투 운동 시절이었으므로 흐름에 따라 태연히 수업을 빼먹곤 했는데, 대학 생활이 뭔가 못 내켰던 모양으로 반 년쯤 정도가 지나자 학교를 안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친이 경영하던 건설 기계 회사에서 몇 년 동안 일한 뒤, 서른 살 즈음에 혼자서 창업했습니다.
요코하마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차려놨지만 직원이 한 명도 없어서,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제게 ‘접수계원 좀 해줘’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이 형과 굉장히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박사 과정에 진학했을 무렵이었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주 3회 정도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접수계라고는 하지만 막 창업한 참이라 아무도 이쪽에 용건이 없었어요. 이거 잘됐네 하여,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오롯이 책을 읽고, 번역하며, 논문을 썼습니다.
점심이면 형이 출장 갔다 돌아와서 같이 점심 먹으러 나갔는데, 오는 길에 차 한잔 하거나 서점에 들르면서 얘기가 길어지게 되면 그대로 사무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대화에 빠져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형은 어떤 주제든 재밌어해줬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연구하고 있던 주제도 잠자코 들어줬어요. 저는 그 시절 지극히 마이너한 프랑스 정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형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얘기도 참으로 열심히 들어줬어요. 그럼 저도 기세를 몰아 계속 얘기해버려요. 아무 얘기나 해도 들어주는 ‘착한 손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책을 쓰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형을 상정 독자로 두고 쓰게 되었습니다.
— 형님은 우치다 님을 어떻게 바라본 것일까요.
‘보호자’라는 느낌도 약간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6살 때 심장병을 앓아서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운동 금지령’이 내려졌던 허약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형한테는 이 병약한 동생을 보호해 줘야만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해를 거듭해나가며 서로 다른 방향의 인생을 살게 되는 법입니다만, 애지중지 돌봐주던 동생이 자기도 모를 지혜를 이것 저것 습득하고서는 떠드는 걸 재밌다고 느낀 것이나 아닐까요.
— 그런 형님에게 들었던 가장 인상적인 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너는 <일급 제자>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십수년 전 일일 겁니다. 20년 전쯤에 형과 히라카와군 이렇게 오순도순 매년 두 번 정도 하코네 온천에 묵으며 목욕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술 마시고 마작 치는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에 어떤 계기로 형이 한 말이 있습니다. “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면, 너한테는 선생님이 있었지만 나한테는 없었단 거야” 라는 거예요.
— 그게 어째서 인상깊으셨나요?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걸 의식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듣고 보니 진짜 그 말대로다, 무릎을 탁 치게 된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 <스승은 있다>(2005년 지쿠마쇼보 펴냄, 원제 ‘선생님은 위대하다先生はえらい’ - 옮긴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습니다만, 형이 한 말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책에 뭐라고 썼냐면 ’스승’이란, 제자 측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모종의 교육적 환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내가 일생을 걸고 노력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의 예지와 기예를 습득한 사람이다’라고 믿고 배우는 인간과, ‘이 선생님은 과연 전폭적인 신뢰를 가져도 충분할 기량의 소유자인가’ 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서 배우는 인간은, 동일한 시간만큼 노력했다면, 서로 습득하게 되는 결과물에 결정적인 차이가 생겨요.
‘위대한 스승에게 사사하는 제자’라는 위치 설정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대단히 쓸모 있는 일이라고 저는 자연스레 이해한 것입니다만, 형에게 듣자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들은 극히 소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형은 결국 일생동안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견식을 갖춘 인물은 여러 번 접했겠지요. 하지만 형은 그때마다 ‘정말로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어요.
저는 그러한 의구심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생님’으로 부르기 위한 조건을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따지지는 않아요. ‘이 조건이 충족되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겠다’는 말을 배우는 측에서 입에 담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배우는 사람이 가질 태도가 아닙니다. 탁월한 스승이란, 제자가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앎’을 전수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기에 앞서 제자가 ‘이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든가 ‘이 정도의 지식이나 기예를 습득하고 싶습니다’ 하는 식으로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것이 가득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있다’는 겁니다.
—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상대방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예요, 물론. ‘이 사람은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경우에 한합니다. 그저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할 기준을 제가 먼저 구비해두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감적으로 ‘이 사람을 <선생님>으로 부르자’고 마음 먹는 거예요. 스승이란, 제자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이나 기예를 양적으로 증대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러한 지식이나 기예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지식이나 기예’를 전수해 주는 존재이므로, 스승에게 사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이 되겠다고 결의를 하는 것입니다. 사제관계는 끊임 없는 ‘자기 해체, 자기 쇄신’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많이들 하시는데요, 저는 ‘자기다움’이라든가 ‘자신만의 고집’같은 게 전혀 없는 인간입니다.
— 대체적으로 우치다 님은 ’우치다 타츠루’라는 독자적 존재 방식을 확립하고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자신다운 삶의 방식’따위 저는 흥미 없습니다. 뭐가 됐든 공부하는 것과 남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할 따름입니다. 전문가한테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저 듣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가지고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의 프레임에 끼워맞추고서는 ‘아아, 그건 이미 알고 있다구’ 하고 생각하기를 될 수 있는 한 자제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고 ‘거기에 대해 좀 더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되었든 간에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쩌다 잠깐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사람일지라도 될 수 있는 한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대해 경청합니다. 요전번에 제 연구수업 졸업생의 결혼식에 갔을 때, 옆에 앉아 있던 분이 신부의 상사였습니다. 귀금속 업계에 계신 분이었는데요, ‘요즘 귀금속 업계는 업황이 어떻게 됩니까?’ 하고 운을 띄웠는데, 30분 정도 참으로 자세하게 업계 동향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도중에 상대방이 저를 보고서 ‘근데요, 이런 얘기가 재밌으신가요?’ 하고 묻길래,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 그러한 축적이 여러 논고의 토대가 된 것이로군요.
딱히 이야기의 요점을 정리해 두고자 들은 게 아닙니다. 그저 정말로 흥미가 동했습니다. 제가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얘기를 듣다 보면 ‘자기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차차로 알게 됩니다. 사방 천지가 ‘전인 미답’이라서 발 닿는 곳마다 개척지가 되는 ‘암흑 대륙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남의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무지를 가시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이런저런 식으로 저술 및 강연하고 있는 것도 ‘지식을 전달하자’는 취지로 그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자신 이제까지 다양한 선생님에게 배우며 지식과 기예를 전수받아왔으므로, 이제는 그에 대한 보은으로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전합니다. 선인(先人)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을 후행 세대에게 ‘패스’한다는 느낌으로요.
—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움을 지속하는 자세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순수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외려 ‘이것을 모른다면 세상의 구조나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없겠다’는 절박감에 몰려 공부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만, 그것은 기원전부터 계속된 반유대주의라는 것을 어째서 서양 문명은 청산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인종차별주의가 있는데요,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잔인한 것은 반유대주의입니다. 어째서 인간은 어떤 종류의 집단에 대해 이렇게까지 증오를 품는 것인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포감 때문에 살 수가 없겠다는 절박함이 동기였다고 생각합니다.
— 어째서 자신을 ‘무너뜨리는’ 공부를 중시하는 것입니까.
공부라는 것은 자아를 강화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자기해체, 자기쇄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일은, 정말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런 짓을 해도 자신의 성장에는 1밀리미터도 보탬이 되지 않아요. 그럴 여유가 있다면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좀 더 공부하여, 자신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둬버리면,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법이지요. 끊임 없이 변화하여, 보다 복잡한 것으로 되어가는 것이 생물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 인생의 이른 단계서부터 커리어 형성을 의식케 하는 교육관과는 대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벌써 중등 교육 과정때부터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세밀한 ‘커리어 플랜’을 아이들에게 작성케 한다지요. 이 다음에 어느어느 학교에 진학하여, 무슨 자격을 따고, 어떤 곳에 취직하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될 수 있는 한 이른 단계에서 결정하게 합니다. 저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중학교 아이들이 알고 있는 직업이란, 정말로 극히 일부니까요. 실제로 아이들이 그 이름조차 모르는 무수한 직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확률로, 아이들은 지금 그 이름도 모르는 직업에 언젠가 종사하게 됩니다.
미국 연구에 따르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 가운데 65%는 대학 졸업 후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모양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아이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 순위 1위는 ‘유튜버’인 것 같은데요, 20년 전에는 그런 직업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 같은 질문을 함부로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전번에 어느 중학교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은 뭐야?> 라는 질문을 부주의하게 던져서는 좋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더니, 부모님들도 선생님들도 상당히 놀라더군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함부로 말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서 일단 ‘앞으로 …가 되고 싶다’고 말해버리면,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저주 비슷한 것이 되어서, 자기 인생에 한계를 설정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를 거의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함부로 ‘자신의 꿈’을 말하게 하면, 아이들은 그 이외의 가능성을 자신의 시야로부터 멀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는 될 수 있는 한 개방적인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미래 사회의 전망이 이렇게나 불안정한데도, 확실한 장래 설계가 없어서는 불안하다는 의식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확실한 미래 설계’같은 건 세울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뭔가 일을 시작하게 될 때, 대체로는 상대방이 말을 걸어주는 법입니다. ‘있잖아, 좀 도와줘’라는 말을 듣고서, 곧장 ‘그래’ 하고 받아들였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있는 일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딱히 그 직종이 ‘장래 희망’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거기에 대한 적성이나 능력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음에도, 달리 누가 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그럼 내가 해볼까 하는 식으로 사람은 ‘천직’과 만나게 돼요.
— 커리어의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 마음을 항상 열어둔 채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겁니다. 저는 불문학과 조수를 8년간 했습니다. 근데 이게 대단한 일은 아니예요. 전화 받는 일과 복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모처럼 ‘해 볼래?’ 라는 말을 듣고 ‘하겠습니다’ 즉답해서 시작한 일이니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따라서 취직자리가 나서 그만 둘 때, 선생님들이 무척 아쉬워했어요. 연구 성과가 대단했다는 게 아니고, 말하자면 총무 일에 대한 평가로 말예요. ‘우치다 군은 정말로 접대 일처리가 좋았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다지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이, 제가 간사이로 취직했던 것도 실은 대학원의 집중 강의에 참가한 간사이 대학의 선생님을 접대하라고 해서, 일 주일 동안 매일 밤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와 선생님을 접대하게 된 덕택입니다. 그 선생님이 제 연구 업적 같은 것은 잘 모르고서는 ‘연회의 흥을 능숙히 북돋는’ 점을 높이 사서, ‘우리 대학에 오지 않겠나’ 하고 불러 준 것입니다. 그때 ‘집중 강의차 온 객원 교수를 접대하는 일 따위 내가 할 쏘냐’ 하고 물리쳤다면, 지금까지의 제 이력은 없었을 것이기에, 인생이란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법이랍니다.
(2022-03-30 09:0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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