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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위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5. 22:24
<신초新潮 45> 라는 잡지가 예전에 있었다. 어느새인가 극우적인 논조로 바뀌고 질 나쁜 기사를 게재하게 되더니 그새 폐간되었다. 아직 멀쩡한 잡지였던 시절에는 곧잘 긴 글을 써줬다. 아래 글도 그중 하나다. 2012년 2월에 쓴 것인데, 10년 전 얘기다. 박동섭 선생이 ‘읽고 싶습니다’ 하여 하드디스크를 샅샅이 뒤져 찾아냈다. 10년이 지나도 읽을 만하다는Readable 느낌이 들어서, 다시금 남겨둔다.
요전번에 철학자 와시다 기요카즈 선생과 ‘3.11 이래 일본의 위기적 상황’에 관해 대담을 가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사회자를 맡아 와시다 선생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취지의 모임이었으므로, 초반에 저는 “우리는 지금 포스트 글로벌화 세계라는, 전대 미문의 역사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식의 흔하고도 정형적인 문제 제기를 불민하게 입에 담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와시다 선생은 “우치다 씨, <위기>란 말이 어느 시절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지 알고 있어요?” 라고 되물어왔는데, 허를 찔린 탓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위기라는 건 말예요, 이십 세기 들어오면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거예요” 라는 말을 듣고서 저는 “오옷…” 하고 감탄하였습니다.
확실히 둘이서 꼽아보았더니, 폴 발레리의 <정신의 위기>, 폴 하자드의 <유럽 정신의 위기>, 후설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등, ‘위기’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쓰여진 것이 그 무렵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위기 시대의 사색가’라고 불리기도 하거니와, 오르테가의 <대중의 반역>도 위기론입니다. ‘불안’, ‘고독’, ‘절망’, ‘아픔’이 철학의 상투어가 된 것도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입니다. 아무튼, 1910년대에는 ‘위기’라는 말이 철학 세계에서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이후 백 년, 우리는 계속 ‘위기 위기’ 를 말해왔어요.
와시다 선생의 철학사 강의에 의하면 말이죠, 그때까지는 철학의 우선적 주제가 ‘행복론’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부터 힐티, 알랭(에밀 샤르티에 - 옮긴이)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를 주제적으로 논해왔어요. 분명히 그럴 듯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행복론이 철학의 주요 소재로 다뤄지는 대신, 위기론이 전경에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하여 ‘어째서 위기론이 그 시기에 유행하였는가’ 하는 그 역사적 이유를 둘이서 이래저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술의 급격한 진보가 그 이유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시기에 극적인 진화를 달성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을 파괴하기 위한 기술’이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1924~1918)에는 비행기, 전차, 화염방사기, 독가스 등 대량 살육 무기가 등장하였습니다. 병사들은 중세의 전쟁과 다를 것도 없는 천쪼가리 무장만을 갖추고서 전장에 던져져서는, 끔찍한 파괴력을 가진 전쟁기계에 의해 살육당하였습니다.
유럽의 대규모 전쟁으로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40년 전의 보불전쟁(1870~71)이 있습니다. 그때 전사자 수가 25만 명이예요. 그런데 제 1차 세계대전 전사자 수는 2600만 명을 상회하였습니다. 별안간 100배나 늘어났습니다. 샤스포 소총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시민들이 갑자기 고성능 살육 기계에 던져져서, 마치 분쇄육처럼 으깨졌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사이래의 모든 전쟁의 전사자를 아득히 뛰어넘는 사상자 기록이 국지전마다 누적되었어요. 격전지에서는 시체가 쌓이고 쌓여서 저 바깥을 내다보아도 지표면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형외과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전후 유럽의 도시마다 신체 손상을 입은 상이 군인들이 귀환하였습니다. 팔이 없고, 다리가 없으며, 얼굴의 반쪽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민들이 받았을 충격을 우리가 상상해보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의해 파괴되었어요. 그 공포의 신체적 실감이 ‘위기’의 배경에 있습니다. 이는 상당히 납득이 가는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또 한가지 해석은, 제 폭주적 사변이므로 그다지 신빙성이 없으니 흘려들어도 상관 없습니다만, 무엇인고 하니 유럽의 어떤 계층의 소멸과 관련된 가설입니다.
유럽에서 1910년대에 일어난 가장 큰 역사적 사건들을 들자면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인데요, 사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더욱 거대한 사건이 있었어요. 바로 화폐 가치의 폭락입니다.
유럽의 통화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200년 동안 장기간에 걸쳐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인플레와 디플레가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시대밖에 알지 못하는 탓에, 화폐가치가 안정되어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없습니다.
화폐가치가 장기간에 걸쳐 안정되어 있으면, 그 이외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계층이 서식 가능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등 유민高等遊民’이라는 종족입니다.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유럽처럼 몇 세기 전에 지어진 석조 가옥에서 살면서, 선조 대대로 내려져오는 가구와 집기를 사용하며 사는 사회에서는, 부모나 할아버지 대에 구입한 러시아 국채라든가 프랑스 국채의 이자 수익으로 자손이 놀고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연금생활자’라는 말을 프랑스어에서는 ‘랑티에(rentier)’라고 합니다. 이 랑티에들이 상당수 존재하였습니다. 정확한 통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사치만큼만은 부리지 않는다면(사치에는 ‘권속을 거느리는 일’도 포함됩니다), 일생동안 무위도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생활을 위해 남에게 명령받는다든지, 조직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자유인’이 수십만 명 단위로 유럽 각지에 산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귀족 또한 일종의 랑티에입니다만, 그보다 수입이 좀 적고, 생활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존재할 수가 있었어요.
19세기에 활약한 명탐정들인 오귀스트 뒤팽이나 셜록 홈즈는 전형적인 랑티에입니다. 그래서 팔걸이 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물며 철학을 하고, 시를 쓰고, 음악을 들으며, 연극을 보고, 과학 실험을 하며, 살인사건 추리같은 걸 할 수 있었어요. 그들 자신이 꼭 문예 운동의 기수라든가 과학자가 아닐지라도, 동시대의 가장 민감한 향유층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뒤팽과 나’ 라든가 ‘홈즈와 왓슨’의 뜬구름 잡는 대화를 증거로 대는 한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학에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자연과학계에서 모종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혁신적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하는 때에는 랑티에들이 가장 빨리 반응했어요. 뭐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한가하기도 하거니와, 자기들의 생활 그 자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여, 그러한 신기한 이야기에 달려듭니다. ‘다음 주에 개썰매를 이끌고 북극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대원이 한 명 부족하구려’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어, 나 갈래’ 하고 곧장 손을 드는 축은 랑티에밖에 없었어요. 직장이 없고, 부양가족이 없으며, 약간의 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19세기 말까지 유럽 지성의 최전선을 담당해왔어요. 이러한 ‘유한leisure’ 계급이야말로, 유럽 근대의 예술적, 또는 학술적 혁신의 온상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만 그렇다는 것이지 그다지 역사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만, 그저 그렇게 생각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읽으면서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으로 먹고 사는 거지?’ 하는 의문이 문득 들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생계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살롱에 출입하고,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고, 시를 쓰며, 결투를 하는 남자들이 있지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묘사인 탓에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산문적인 의문이 전경화하지 않았을 뿐, 사실 그들은 랑티에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남자들이 문학 작품을 쓴다든지, 그 등장인물이 된다든지, 아니면 그 독자가 된다든지, 비평가로 행세했어요. 그들이 유럽에서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각종 지적인 운동을 거의 독점적으로 견인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인 계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소멸합니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순식간에 하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도 국채 금리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되었어요. 러시아 국채 따위는 혁명으로 휴지쪼가리가 되어버렸으므로, 이자 수익으로 무위도식하던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유럽의 랑티에라는 사회 계층 자체가 전부 소멸해버리고 말았어요.
이 랑티에의 소멸이야말로 1910년대 위기의 실상이 아닐까요. 저는 와시다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렇게 상상한 것입니다. 200년에 걸쳐, 이 계층의 향락적 생활 방식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 기반 그 자체가 붕괴했어요. 그때 그들이 느낀 존재론적 불안이 ‘위기’로 인식된게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들은 그것 이외의 생활 방도를 모른 채 2대, 3대로 내려오며 무위도식하였으니까요. 내일부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전혀 모릅니다. 삶의 노하우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술이나 학문 등에 관한 잡지식이나 드레스 코드, 테이블 매너, 그리고 밀실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추리력 등 하나같이 비실용적인 것들 뿐이었으니까요.
위기라는 말에 시대를 표상할 정도의 충격이 있다면, 그것이 머릿속에서 구상해 낸 추상적인 개념일 리가 없습니다. 생활상의 파탄이나 신체적으로 엄습해오는 불안감이 없다면 인간은 ‘위기’라는 말을 꺼내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곧잘 ‘정신의 위기’ ‘학문의 위기’같이 정련된 어휘에 현혹됩니다만, 1910년대 위기의 실상이란 집단적으로 경험된 ‘생활의 위기’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랑티에들은 ‘정신의 귀족’이므로, ‘내일 쌀이 떨어질까 하는 염려에 잠못 이룬다’는 식의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해 보았자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은 유럽의 정신적 위기다’는 식으로 미간을 찌푸려가며, 마치 인류사적인 긴급 상황인 것처럼 바꿔 말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전간기에, 영국의 귀족이 독일이나 프랑스의 실력자들과 은밀히 연합하여, 전쟁 배상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패전국 독일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그런 구식 정치가들이 모여서 밀담하고 있는 곳에, 미국에서 온 상원의원이 등장합니다. 그가 그 자리에 모인 어엿한 정치가와 외교관들을 향해 냉정하게 딱 잘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대단히 죄송한 얘기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은 나이브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소. (…) 고상하고, 정직하며, 선의로 가득차 있지요. 허나, 결국은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소이다.”
“신사분들 주위의 세상이 어떤 곳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소이까? 고귀한 본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시절은 엊저녁에 끝나고 말았소. 그저 유럽의 여러분만이 그걸 모를 뿐이요. (…) 지금 유럽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전문가인 거요.”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츠치야 마사오 역, 하야카와 쇼보, 2001년, 147~8쪽)
앞으로는 군대와 돈이라는 현실 정치의 시대다. 이제 더이상 당신네들같이 귀족끼리의 신의라든가 우정, 그런 걸로 외교를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아마추어는 정치의 세계에서 물러나라. 상원의원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저는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책을 집사와 하녀 사이의 은밀한 연애 이야기인줄로만 알고 가벼운 기분으로 읽은 것입니다만,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정치사적 전환이 이야기에 부선율로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1930년대까지는 국경을 넘어, ‘문예 공화국’적인 귀족들의 연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장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1937)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는 독일 귀족인 라우펜슈타인 대위가, 같은 나라 사람인 거칠고 투박한 독일 병사보다도 고매하고 교양 있는 포로인 드 보엘뒤에 대위에 보다 깊은 연대감과 친밀함을 느낍니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두 국민국가의 대립보다도 더욱 깊은, 뛰어넘을 수 없는 골이 귀족과 대중 사이에 존재했어요. 그래서 귀족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해야 마땅하다는 의식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대립 명제로서 당연하게 존재해도 좋을 법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서는 비정하게도 기억하려 들지 않습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그 후 역사적 사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러한 것의 존재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귀족들의 네트워크’의 그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실제로 존재했던 것임에도 말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국제적인 네트워크에 대한 역사적 사명이 종료되었다는 선고가 내려지고, 그것을 대신하여 ‘화폐와 군사력’밖에는 신용할 수 없다는 리얼리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확실히 <남아 있는 나날>의 미국인 상원의원같은 타입의 터프가이가 아니고서는 아돌프 히틀러같은 자에게 대항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레닌, 무솔리니, 스탈린, 마오쩌둥 모두 20세기적인 ‘대중’의 힘에 편승해 나타난 정치가들이라는 점에서는 ‘신흥 계층’의 면면들입니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윤리관을 갖고 있던 구시대의 귀족들을 헌신짝 버리듯 하며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화폐와 군사력, 그것이 향후 국제 정치의 역학을 결정짓게 되는 새로운 사회관 앞에 구세계의 귀족과 랑티에들은 무릎을 꿇습니다. 오르테가가 <대중의 반역>를 쓰며 나타낸 필치는, 역사의 뒤안길에 선 귀족 계급이 느끼는 시대 변화상에 대한 애석함과 점잖은 분노입니다(그래서 이 철학책에 감도는 분위기는 약간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과 비슷합니다). 자기들의 오페라 하우스에 대중이 들이닥치고, 자기들의 휴양지로 대중이 신발에 흙을 잔뜩 묻히며 들어오는 것을 손 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는 왕년의 귀족과 랑티에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이제까지 그들이 독점해왔던 예술, 학문, 정치, 과학, 모험, 쾌락 등을 리얼리스틱한 실력을 배경으로 한 신흥 계층이 차례차례 접수해나갑니다. 그 피할 길 없는 모멸감과 박탈감이 아마도 ‘위기’라는 말의 기저를 이루었던 생생한 신체 실감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저는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앞에서 열거한 발레리, 하이데거, 후설, 오르테가의 공통점은 ‘정신의 귀족성’입니다. ‘정신의 귀족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이 그 시기에 일제히 ‘위기론’을 펼쳤습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였던 것은 구체적인 제도나 이론, 기술이 아니라 전위적인 것을 창출해 내는 행위 그 자체, 생성적인 프로세스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눈앞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고 하고 있다, ‘전대 미문의 것’이 탄생하려고 하고 있다, 극적인 돌파가 지금 여기서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생성적인 것과 관련된 센서의 고성능 감도야말로 랑티에들이 가진 집합적 특기였습니다. 그들의 계층적인 몰락에 의해 그 센서가 일거에 열화되어버린 게 아닐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에 대해 전전긍긍하게 된 동시에, 그러한 인류사적 책무를 도맡을 이들이 그들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요.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정이 있었다고 보면 대략 맞습니다. 1910년대라는 시기는 러일전쟁(1905~6년) 직후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래 분투해 온 대일본제국은 러일전쟁에서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향해 달려오다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세상을 내다보는 관점이 일변하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메이지 유신 이래 관민 합동으로 식민지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열강의 한 축을 파고들자는 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성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어떤 의미로는 가련한 국민적 연대감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무너져갑니다. 일부 국민 사이에 ‘일본은 일등국이 된 것이다’ 하는 보잘 것 없는 우쭐함이 만연하게 되었어요. 외적으로부터 동포와 조국의 산하와 전통 문화를 지켜나가겠다는 비장하고도 낭만적인 기풍이 사라져감에 따라, 승전국 몫으로 돌아가는 영토나 권리를 희희낙락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국가적인 규모의 욕망이 민중들에게까지 전염되어, 그들도 또한 권력이나 금전에 대해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제멋대로의 상상입니다만, 이러한 꼴을 본 당시의 지적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쟁에서 이긴 탓에, 도리어 일본은 타락하였다’며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작품 <산시로>의 초반에는, 구마모토에서 상경하는 산시로가 기차 여행 도중에 러일 전쟁 이후 세간의 들뜬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동승한 남자에게 “뭐, 앞으로는 일본도 점차 발전해나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을 거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산시로의 나이브한 물음에 남자는 냉담하게 “망할 걸세”하고 대답합니다. 산시로는 “구마모토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금세 얻어터질 텐데. 악담을 하였다가는 대역 죄인 취급받을 텐데” 하고 경악합니다. 허나, 이 ‘망할 걸세’라는 말에는 러일 전쟁 이후에 나타난 일본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바라보는 소세키 자신의 통렬한 비판의식이 가미된 것으로 제게는 읽혔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개전(1914년)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개전(1939년)까지 사반 세기 동안, 19세기까지 존재하여 왔던 세계 구조가 요란하게 붕괴되는 한편, 현재까지 이르는 20세기적 세계의 프레임이 완성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적인, 어떤 의미에서 우아하고도 상호호혜적이며 느슨한 국제 관계가 종식되면서, 심플하고도 범용하며 호전적인 워딩이 대중을 몰아붙이고, 그 압도적 에너지가 시장을 구동케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폭력성과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어요.
근대 과학 기술이 초래한 대량 살육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 국민 국가 간의 전면전을 억제해왔던 귀족들의 초국가적 연대의 상실, 지적인 혁신을 담당하던 계층의 몰락과 탐욕적인 ‘대중’의 출현… 이러한 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실현되었음을 감안하여 볼 때, 이것은 확실히 ‘위기’로 칭하기에 마땅한 상황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법합니다.
이후, 이 당시 원형이 만들어진 ‘위기’적 상황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바뀐 감이 있습니다만 요 100년 간, 동일한 구조를 유지해온 것으로 제게는 보입니다. 지극히 간략하게 말해도 좋다면, 지난 100년 간 사상의 대결이라는 것은 세상을 단순한 이론이나 도식으로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의 이원론으로 분단하는 것을 염두에 둔 ‘적을 만드는 사상’이 길항해 온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이 일관되게 ‘이원론’적, 대립적인 사고와 그것이 분비하는 타책적[他責的; extrapunitive]이고도 공격적인 어법이 우세하게 된 나머지, ‘뭐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하는 식의 관용적인 사고를 궁지로 몰아가게 됩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사상’은 지금에 와서는 코너에 몰린 나머지 전신을 다해 사력으로 버티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전반적 추세 속에서, 언론의 말본새는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에 천착해 왔습니다. 그 정형적인 어법 덕에, 확실히 일시적으로는 세상의 전망이 확 트이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이 똑부러진 사고방식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셈 치든지, 존재하지만 관찰이나 분석을 할 가치는 없다는 식으로 탁상에서 치워버리고 말아요.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는 사이에, 세계의 현상 가운데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이 탁상에 남게 되고,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이게 됩니다. 확실히 탁상 위만 보면 이야기는 대단히 깔끔해요.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합니다. 하지만, 발밑에는 탁상에서 휙 던져버린 부정형적인 것들이 갈곳을 잃은 채 끈적한 오물처럼 퇴적되어 우리들의 발목을 휘감고 있어요. 그 불쾌함이 도리어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들자’는 식의 무모한 욕망을 자극하게 됩니다.
우리들 시대에 있어서의 병리적 현상은, 여러 영역에서의 ‘플랫flat화’ 지향이라는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의 ‘플랫화’는 대체로 ‘문제는 대단히 간단하다’는 워딩을 서두로 하여 발언이 이루어집니다. 어떠한 제도든, 관습이든, 법률이든, 집단이든, 더 나아가 개인이든, 그것이 본능적으로 사악하며 무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회는 이다지도 불행해졌다, 그래서 ‘만악의 근원’을 특정짓고, 그것을 척결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고, 우리들의 사회는 ‘본원적 청정 상태’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하는 겁니다.
이 정치적 설화는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왜 불행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놈들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희생양을 지목하는 것만큼 그들의 침체 상태를 완화시켜주는 정치적 수사는 달리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구원투수들은 ‘<악>에 대한 엄청난 공격성’으로 높은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제 언론은 ‘말씨가 곱다’라든가 ‘생각이 깊다’ 라든가 ‘반대 세력을 상대로 꿋꿋한 인내심을 통해 설득을 시도해본다’ 같은 것들을 정치가의 미덕으로 꼽는 습관을 거의 완전히 포기하였습니다. 그러한 문언을 저는 오래 전부터 언론으로부터 보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언론만 보는 한, 지금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속도감’이고, ‘속 시원함’이며, ‘똑부러짐’같습니다.
분명히, 그러한 사람들은 탁상 위에서 솜씨 좋게 ‘쓰레기’를 치워버리는 일은 잘합니다. 하지만, ‘내침 당한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유폐된다든지, 숙청되지 않는 한) 결과적으로는, 그 정치가가 내건 정책을 실패시키기 위한 방향으로만 행동합니다. 이를테면, ‘일 못 하는 부하’나 ‘근무 태도가 좋지 않은 공무원’을 감봉하고 해고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인건비를 삭감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치체제에 대해 깊은 불평과 원한을 품은, 공공 복리에 헌신할 의사가 손톱만큼도 없는 시민을 조직적으로 양산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초래할 사회적 비용은 도무지 과소평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근시안적인 비용절감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거대한 손해를 초래한 사례로서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이를 호되게 배웠을 텐데도 말이죠.
언론이나 인터넷 상에서도,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열띤, 단순한 공격적 언사와 그에 대한 응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불쾌한지, 얼마나 화났는지를 서로 다투고 있어요. 마치 좀 더 히스테리를 부리고, 좀 더 침을 튀겨가며 말을 내뱉는 발언자야말로 문제의 본질에 비교적 가장 가까이 육박하고 있다는 규칙이 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노라는 감정의 레벨을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물론 제가 쓴 글도 유감스럽지만 그 폐해를 답습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지성의 깊이라든가, 두루 포용력 있는 전망이라든가, 인간적 국량의 광대함을 느끼게 해주는 언설을 접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기 가운데서도 더더욱 위기적인 징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기다 위기’하고 경종을 난타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위기의 원인은 이것’이라고 지목하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기를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를 모아서, 수중의 자원을 분배하기 위한 대화와 상호 지원의 장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 제기에 답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너무나 어려워요. 그러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타인에 대한 관용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만, 정말이지 ‘관용과 상상력’의 필요성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명백한 현실이, 즉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몇 안 되는 길목조차 사람들이 앞다투어 막고 있다는 개탄할 만한 사실이야말로 이 사회가 품고 있는 위기의 실상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2-03-28 08: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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