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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신앙과 수행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1. 20:03
한국의 박동섭 선생이 ‘우치다 다쓰루 연구’를 위해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있다. 열람코자 하는 주제가 있는데, 한국의 도서관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하기에 서랍을 한참 뒤적거리다 보니 나왔다. 2013년 4월에 썼던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상당히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박 선생에게 보내는 김에 블로그에도 올리기로 한다.
23년간 고베 여학원 대학이라는 미션스쿨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때까지 기독교와의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근무하면서 교목과 대화하고, 예배를 보며, 때로는 권유받아 성경을 논했다. 유대교 철학이 전문인지라 비 기독교인이지만, <성경>은 학생 시절부터 계속 읽었다.
필자가 연구했던 것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프랑스의 유대계 철학자이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탈무드 해석학을 전수받았으며, 그 학지(學知)를 활용하여 붕괴 일보 직전이었던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이 철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여 이 사람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고자 힘쓰면서, 필자는 유일신 신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배웠다.
한편으로 필자는 40년 쯤 전부터 아이키도[합기도]라는 무도를 수련해 왔다. 도쿄에 있었을 적에 타다 히로시 선생께 배우고, 고베로 와서 대학에 아이키도부를 만들었으며, 퇴직 후인 지금은 1층을 도장, 2층을 생활공간으로 한 건물을 지어,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불문학도 및 조교 시절에는 점심때 레비나스를 번역하고, 저녁에 아이키도 수련을 다니는 식의 판에 박힌 루틴을 10년 이상 해왔다. 그때에는 유대교 철학과 무도 사이에 어떤 내적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몰랐다. 교수님들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연구를 하라’며 곧잘 나무랐다.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것과, 신체가 감각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어떤 식으로 ‘동일한’ 것이었는지를 말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종교와 무관한 공립 학교에서 미션스쿨로 옮아왔는데, 이곳은 무도가인 필자에게는 마음이 편해지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윌리엄 메렐 보리스가 설계했던 중후한 벽돌 건물에 머물면서, 밤낮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과 찬송가 음악에 흠뻑 젖어있던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스승인 타다 히로시 선생은 오래 전 이탈리아에서 아이키도를 지도하셨는데, 종종 말씀하시기를 ‘아이키도를 가르치기에는 이탈리아가 훨씬 낫다. 그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점을 소박하게 믿는다. 일본인은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집이 세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무도 수행이라는 것도 초보 시절에는 그저 손발을 운동적으로 기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기어코 신체 감각이 민감해지면, 수치적 외형적으로는 고량(考量; 생각하여 헤아림 - 옮긴이)할 수 없는 신호를 점차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낌새’ 라든가 ‘기(氣)의 발흥’을 알게 된다. 수련을 더욱 닦아나가면 ‘기機’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機’라는 것은 ‘전광석화’ ‘줄탁동시’라는 말에 쓰일 만한데, 입력과 출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손과 왼손으로 박수를 칠 때, ‘오른손이 왼손을 찾는다’라든가 ‘왼손이 오른손을 멈췄다’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른손과 왼손은 서로 지체 없이 만나는 점에 이른다. 무도적으로 말하자면 치는 것과 받는 것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이는 반응 속도가 빠르다든가, 동체 시력이 좋다든가, ‘선수를 잡았다’든가 하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바깥과 내면, 대상과 주체라는 이원론적인 것의 이해 방식 그 자체의 효과가 사라지는 경지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아마도 ‘여기까지가 현실이고 여기부터는 (아마 꿈이나 환상같은) 비현실’이라는 디지털적인 경계선을 지키며 살고 있다. ‘자신의 신체는 제어 가능하지만, 타인의 신체나 마음은 원격 제어할 수 없다’고 믿는다. 허나, 무도 수행의 진도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인습적인 내외, 주객의 경계가 차츰 애매하게 바뀐다. 자타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출입’이 가능해진다.
이 ‘경계선이 애매해지는 감각’과 신앙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타다 선생은 아마 그것을 지적하셨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감나게 ‘절박’해 오는 것이 있다는 실감의 토대 위에 신앙은 세워진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대상의 전부이고,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버리면 종교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여러 신앙의 기초에는 이 ‘감지할 수 없는 것의 절박’이라고 하는 경험이 있다.
정초에, 그다지 신앙심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온힘을 다해 손을 모으고 있는 광경을 마주치게 된다. 아마도 마음 속에 ‘가정의 평화’라든가 ‘학업 성취’ 와 같은 현실적인 소원을 빌고 있으리라.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러한 기도에 필요한 말들을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는 데 드는 시간 이상으로 그들은 무언가 묵상을 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무언가와 접촉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피부 감각을 민감하게 하며, ‘자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메시지’가 저 멀리서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을 이때껏 몇 백번 몇 천번 반복하여 과거에 한 번이라도 ‘메시지’가 도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기도할 때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의 도래를 기다림’ 이라는 자세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기도’를 할 수 없다.
필자가 연구했던 레비나스라는 인물은 2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감되었다. 리투아니아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의 다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귀화한 제 2의 조국인 프랑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젊은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신앙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어째서 신은 그가 택한 민족이 600만 명씩이나 죽음을 당하게끔 내버려두었는가. 어째서 아무런 기적적인 개입조차 하지 않았는가. 신도를 저버린 신을 어째서 우리들은 아직까지 계속 믿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묻겠는데, 여러분은 이제까지 어떤 신을 믿어온 것인가?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 보상을 내리고, 악행을 행하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권선징악적 신’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믿었던 것은 ‘유아의 신’이다.
아무렴, 권선징악의 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선행은 곧장 추켜세워지고, 악행은 즉각 처벌받을 것이다. 허나, 신이 여러 인간적 일들에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자기가 이뤄야 할 일이 모두 없어져버리고 만다. 그 세계에서는 만약 눈 앞에서 어떠한 악행이 저질러진다손 치더라도, 그저 손을 모으고서 신의 개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신이 모든 것을 대신해주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이 없으며, 약자를 도울 의무를 면제받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렇게 인간을 영원히 유아로 남겨놓으려는 신을 우러르며 믿었던 것인가?
홀로코스트는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죄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죄상의 배상이나 사과는 신이 해야할 일이 아니다. 신이 그 이름에 걸맞는 존재가 되려면, 반드시 ‘신의 도움 없이 이 지상에 정의와 자애가 우뚝 서게끔 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자력으로 세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성과 덕성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유일한 신에 이르는 노정에는 신 없는 목적지가 있다” (<곤란한 자유>) 바로 이 ‘신 없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자의 고독과 결단이 신앙의 주체성을 기초하게 된다. 이렇게 자립한 신앙인을 레비나스는 ‘주체’ 혹은 ‘성인成人’이라고 부른 것이다.
“질서가 없는 세계, 다시말해 선이 승리하지 않는 세계에서의 희생자의 입장을 수난이라고 부른다. 이 수난은, 여하한 방식일지라 하더라도 구세주로서 현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지상적 불의의 책임을 그 한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특히 요구하는 신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같은 책)
레비나스는 이 준엄한 논리에 의거해, 전후 한번 붕괴되었던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했다. 20대의 필자는 레비나스의 위와 같은 복잡한 변신론[theodicy]에 강하게 이끌렸다. 신앙을 기초하는 것은 시민적 성숙이라는 말을 필자는 그때까지 어느 종교로부터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필자는 무도 수업을 통해 ‘농밀한 실재감을 가지는 비현실’이 절박해오는 것을 신체 실감으로써 반복해 경험하였다. 필자는 이 감각의 제어 방식을 스승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웠다.
이를 ‘신비주의’라고 딱 잘라 분류해버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비현실적인 것을 리얼하게 감지해내는 경험은 딱히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진동수를 가진 공기의 파동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으나, 개는 들을 수 있다. 우연히 개의 가청대역 파동을 감지한 인간에게 ‘당신은 신비체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 ‘인간에게 들릴 리가 없다’고 못박는 것 모두 현명한 태도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일단 받아들이고, 어떠한 조건이 갖춰지면 ‘그런 것’이 일어나는가? 그것에 대한 문제를 주의 깊게 해결해나가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세상에 ‘신비적’이라고 불리는 경험의 다수는 ‘충분히 정밀치 못한 계측기로는 검출해낼 수 없었던 양적 변화’이다. 계측기의 정밀도가 올라가면 누구나 관찰해낼 수 있다.
따라서 종교의 의례나 무도의 기법은 대체로 ‘신체라는 계측기의 정밀도를 올리는’ 대단히 실용적인 요구를 위해 조직화되어 있는 것이다.
무도 뿐만 아니고, 필자가 수련하고 있는 노가쿠도 그렇다.
오랫동안 수련을 하면, 노가쿠 무대와 공간이 거기서 연기되고 연주되는 움직임이나 음향에 따라 미묘하게 꼬인다든지, 굽혀진다든지, 깊이를 더해간다든지, 줄어든다든지, 열기를 품는다든지, 차가워진다든지, 점도가 높아진다든지, 낮아진다든지 하는 것을 피부 감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하야시(囃子)가 연주하는 음악과 가사의 의미와 몸짓의 표상이 무대 위의 주인공에게 확연히 동선을 지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지시에 따른다면, 유일무이한 동선상에서 ‘그 이외에는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을 하게 된다. 이때 주인공은 딱히 신비체험을 한 게 아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있게 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해온 결실을 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는, 공간을 오고가는 무수한 신호를 감지하고, 그것에 반응하여 가장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는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 그럼에도 심신의 계측 정밀도를 높이는 방법은 무수히 많으므로, 일부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신호 감수성이 높아지는 일이 일어난다.
위에서 언급한 보리스는 선교사를 겸임하고 있었기에, 그가 설계했던 건물이 ‘신앙으로의 안내’ 역할을 하는 장치가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다. 건물을 실제로 보면 알게 되는데, 보리스의 건물에는 무수한 음지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문이 숨겨져 있고, 계단이 숨겨져 있으며, 방이 숨겨져 있다. 하나도 똑같이 설계된 방이 없다. 호기심이 동해 문손잡이를 돌리고, 본 적 없는 공간에 발을 디딘 학생은, 그 탐구 역정의 끝에서 반드시 ‘의외의 곳으로 통하는 문’ 이나 ‘의외의 경관이 펼쳐져 있는 창가’ 둘 중 하나를 발견해낸다. 그 점에서 보리스는 정말로 철저했다. 호기심을 갖고서, 자신의 결단으로, 문을 젖혀 열고, 계단을 오르는 이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나가는 문’ 이나 ‘그곳 말고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라는 보상을 반드시 받게 된다. 신앙으로의 초대로써, 또는 배움의 비유로써, 그 정도로 교화적인 건축물은 드물 것이다.
보리스의 건축물은 ‘계측 장치의 정밀도를 높이는’ 행위의 인센티브 제공 목적에서 매우 탁월한 작품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직접 그 건물에 오래 머물렀었는데, 그것이 무도가로서의 감각 형성과 무관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신체 기법 수업에서는, ‘자신의 신체에 이런 부위가 있었고,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었던 것이었나’ 하고 놀라기에 충분한 발견이 많이 일어난다. 그렇게 밝혀진 부위나 그 제어방법은 연습의 선행 단계에서는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애초에 그러한 신체 부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로 수련을 하는 가운데 획득된 신체 부위의 감지와 제어 기법인 것이다. 그것을 ‘단련한다’든가 ‘강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것’이 인간에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자신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수행의 순리인 것이다. 그래서 수련의 선행 단계에서 ‘도달 목표’로 작정된 것은 수행 도중에 반드시 버려지게 된다. 애초에 수행의 결과물이란 ‘그런 데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나오고 마는’ 어떤 것이다.
어째서인지 이러한 접근방식을 현대 사회는 ‘비과학적’ 이라며 배척한다. 적어도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연구’에는 연구비가 나오지 않는다. 수행적 접근방식의 유효성에 대한 신빙을 잃어버린 것이 일본의 급격한 학술적 생산성 저하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고자 한다.
현대의 신앙 공동체에 대해 논하기를 원한다는 의뢰를 받고 쓰는 원고였는데, 예비적 고찰만으로도 지면을 다 쓰고 말았다. 조금 서둘러 논점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신앙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기 위해서는 성숙과 수업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적 지견이다. 그것은 어느 종교에도 통한다.
현대 일본의 신앙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영적 성숙을 돕는 실효적인 수행 시스템을 균형 있게 정비해놓고 있는가.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물론, 모든 신앙공동체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신학의 학습과 의식의 실습이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허나, ‘영적인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것’과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여 적절히 대응할 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동시에 목적으로 하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거의 알지 못한다.
전에 기독교계 학교 교육 동맹에 초청받아 강연을 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미션스쿨에서의 일상적인 종교 교육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하겠느냐에 관련한 힌트를 제공한 질문이 나왔다. 그때 필자는 ‘예배당을 청소하는 게 어떨까요?’ 하고 답했다. 기도를 하는 곳을 청정한 곳으로 유지하는 것이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 기초 중의 기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더러운 장소에서 기도를 할 수 없다. 기도란 희미한 신호를 청취하는 자세이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오감의 감도를 최대화시켜야만 한다. 허나, 더럽고, 소란스럽고, 악취가 떠도는 장소에서 우리들은 오감을 민감하게 할 수 없다. 감각의 정밀도를 높였을 때 불쾌함이 가중되는 환경에서 우리들은 ‘기도’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다.
그래서 ‘목욕 재계’ 하는 것이 종교적인 수행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앙의 기원적인 모습이 오감의 한계를 뛰어넘어 절박해옴을 감지한 경험이 있는 이상, 기도하는 곳은 그 신앙의 발생 원 풍경을 반복해서 재연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그 오감의 감수성을 최대화시켜서,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정밀도를 올릴 수 있는 낮은 자극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한 ‘예배당 청소’ 행위는, 학생들에게 ‘기도’란 무엇인가를 신체적으로 실감케 하기 위하여 유용하다고 보아 그렇게 답하였다. ‘기도’의 신체 실감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종교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없다.
무도 수련장에서의 작법(作法)도 동일하다. 수련 전에 우리들은 도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걸레질하며, 수련이 끝나면 도장을 다시금 정성을 다해 깨끗이 하고, 창과 문을 걸어잠근 뒤 자리를 뜬다. 도장은 수련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루 지나고 나서 도장 문을 열면, 가느다라면서 상쾌한 입자의 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그것은 예배당의 문을 열었을 때의 느끼는 피부감각과 거의 비슷하다.
필자가 자기 자신의 도장을 마련하기를 그렇게도 원했던 이유는, 공공 시설인 체육관의 무도장이 그다지 청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 일행이 들어오고 나면, 직전까지 사용했던 단체에 의해 어지럽혀진 상태가 그대로였던 적이 많았다.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아도 다다미의 오염이나 미세한 먼지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마루가 충분히 깨끗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체는 미묘하게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더럽혀진 마루 위를 맨발로 걸을 때, 우리들은 될 수 있는 한 마루와의 접촉 면적을 줄이고자 발바닥을 움츠리고서 걷게 된다. 악취가 나면 콧구멍을 수축시킨다. 옆방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오면 귀를 막는다 (실제로 시립 무도장을 빌렸을 때는 옆방이 댄스 교실이었기 때문에, 끊임 없이 큰 소리의 음악이 들려왔다). 환경 그 자체가 오감의 감도를 저하시켜 입력에 대해 둔감해질 것을 요구하는 장소에서 무도의 수련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뭔가 본질적인 무리가 있다.
신앙을 가진 자가 ‘기도’의 장을 마련하고자 할 때에 갖춰야 할 조건은 ‘청정함과 정숙함’에 전념하는 일일 것이다. 무도 수행의 경우도 추구하는 대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다. 레비나스의 철학과 아이키도 수행 사이에 이십 대의 필자가 ‘똑같은 것’을 느꼈는데도 그 내재적 연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썼지만, 사십 년 동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그래도 조금은 알게 된다.
그것은 둘 다 인간의 맨몸 감각을 기반으로 구축된 체계라는 점이다.
레비나스의 변신론(전능한 신이 왜 악만큼은 일소하지 않는가를 다루는 이론 - 옮긴이)은 언뜻 보면 철저하게 이지적인 구축물로서 책상에서 사변적으로 짜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유아’와 ‘어른’을 키워드로 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성숙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구상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숙을 이룬 인간 말고는 ‘성숙함’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유아가 사전에 ‘앞으로 이런 식으로 능력과 자질을 개발시켜 어른이 되겠다’고 계획하여 그런 식으로 기안된 로드맵을 토대로 어른을 지향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유아는 ‘어른됨’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기에 유아인 것이고, 어른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어른됨’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사후적, 회상적으로 느끼기에 어른인 것이다. 성숙하고 난 연후밖에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그것이 성숙이라는 역동적인 프로세스의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정말이지 자신이 성숙을 이루었다는 성숙의 선명한 실감을 최정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지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맨몸뚱이인 것이다. 유아였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지 못했던 것이 들리며, 판별할 수 없었던 향이나 맛을 알 수 있고, 예전에는 감지해낼 수 없었던 것의 감촉이나 절박함을 선연하게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성숙했다는 말의 의미다. 영적 성숙이란 철저하게 맨몸뚱이와 관계된 것으로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생물학적인 경험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살아있는 몸을 가질 것’ 이라는 조건 말고는 진정한 신앙이 담보될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 20세기의 전쟁과 숙청, 강제 수용소의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레비나스가 배운 것은, 악이란 ‘스케일’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맨몸을 가진 인간의 척도를 뛰어넘는 스케일로 ‘인간적인 사회’나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레비나스 철학과 무도의 내재적인 연관이 필자에게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신앙이 뿌리내리고 꽃피울 관건은 결국 맨몸에 의해서이다. 신앙에 관련된 여러 해설, 여러 실천의 관건은, 맨몸의 신체에 의해서밖에는 검증받을 수 없다. 그래서 맨몸을 갖지 않은 신앙 주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자명한 말이거니와, 비망록을 겸하여 여기에 써둔다.
(2022-03-25 09:0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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