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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치유의 이야기 ー <귀멸의 칼날>에 대한 구조분석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4. 11. 22:13
트위터에도 썼는데, 어느 대학 입시 문제에 아래 글이 쓰였다 하여, 기출문제집에 수록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있었다. 대체 뭘 썼었는지 생각해보니 ‘주간 금요일’에 기고한 <귀멸의 칼날>론이었다. 상당히 진귀한 글감을 찾아내 작문하였던 것이다. 2020년 12월에 썼던 글인데, 내용을 깨끗이 잊어버린 탓에 컴퓨터를 샅샅이 뒤져 찾아내 읽어보니 이게 꽤 재밌는 내용이기에 블로그에 올려둔다.
만화를 논하는 건 오랜만이다. 수 년 전에 집영사集英社가 <원피스 스트롱 워즈>란 책을 내게 되어가지고 당시 <원피스>론을 쓴 게 마지막이었다. 오다 에이치로 씨의 <원피스>는 세계 누적 발행부수 4억 7천만 부라는 천문학적 히트를 친 작품이었기에, 집영사 측에서 ‘왜 이리 잘 팔리는가?’ 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줬으면 한다고 해서 썼다. 아마 ‘그저 엄청 팔았다’는 것만으로는 출판하는 입장에서 뭔가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을 거다.어째서 어떤 만화는 세계적인 매상고를 이룩하는데 다른 만화는 그렇지 않을까? 거기에는 뭔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걸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고, 출판인으로서는 사업상 필요로 하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림을 잘 그린다든가, 스토리가 재밌다든가, 인물 묘사에 묘미가 있다든가, 대사가 확 와닿는다든가... 그런 ‘이유’를 아무리 나열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히트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동등한 실력이 있고, 스토리텔러로서 재능이 있으면서도 어떤 만화는 수억 부의 거대한 매출을 실현하는데, 다른 작품은 그정도는 아니다. 그럼, <귀멸의 칼날>에 기록적인 판매를 가져다준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이번 필자의 미션이다.
지난번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낸 책이었으므로, 만화의 세세한 부분을 숙지하고 있는 열성 독자를 상정 독자로 두고 썼다. 허나 이번에는 <귀멸의 칼날>과 하등 상관이 없는 ‘주간 금요일’이라는 매체이다. ‘주간 금요일에 <귀멸의 칼날> 특집이 실려있으니 사다주세요’ 하고 부모님을 조르는 갸륵한 자녀들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정 독자를 정 반대로 변경하여, <귀멸의 칼날>을 보지 않는데, 12월 어느 아침 신문 전면 광고를 접하고서는, ‘대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고 답답해진 사람을 위해 쓴다. 그런 분들도 또한 <귀멸의 칼날>의 대사가 총리의 국회 답변 자리에 인용된다든가, 일억 부 판매를 기록했다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안읽은 분을 위해 스토리를 요약한다.
다이쇼 시대에, 식인 혈귀들이 출몰한다. 혈귀에 먹히면 인간은 혈귀가 된다. 좀비와 똑같은 메커니즘이다. 전부 먹히면 소멸하는데, 조금만 먹혀버려도 혈귀가 된다(이것도 좀비와 같음). 이것이 감염증을 빗댔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죽으면 더 이상 감염이 진행되지는 않으나, 감염된 채로 살아나면 확산체가 된다.
주인공은 산 속에 사는 숯불구이 소년 탄지로. 그가 외출한 사이 일가가 요괴에 습격당해, 여동생 네즈코만 남겨놓고 일가가 학살당한다. 살아남은 여동생은 ‘감염’되었으므로, 인간의 심성을 조금 남겨놓고서는, 반쯤 혈귀화한다. 여동생을 원래의 인간으로 되돌리고,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탄지로는 혈귀 사냥을 주 임무로 하는 ‘귀살대’에 몸을 던지는데, 가혹한 훈련을 견디고 나서 어엿한 검사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되찾은 (신체 능력은 요괴 그대로인) 여동생이나 동료 검사들과 손잡고서, 이형(異形)의 혈귀들과 사투를 거듭 펼쳐나간다... 는 이야기이다.줄거리만 놓고 보면 ‘옳거니, 코로나 얘기였구나’ 하고 무릎을 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고 본다. 악성 감염증을 앓는 여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백신이나 특효약을 개발하는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바이러스 근절’을 위해 싸우는 젊은 감염내과 전문의의 성장과 승리의 이야기... 확실히 <귀멸의 칼날>은 곧장 팬데믹의 우화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수공통감염증은 만나서는 안 될 것들이 만나서 생겨난다. 바이러스는 기생한 생물의 특징을 파고들어 변이한다. 치사성 낮은 ‘만만한 것’이 있다면, 강독성의 ‘굉장히 무서운’ 것도 있다. 무엇보다 바이러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물이 아니고, 다른 생물의 세포를 이용하여 자기를 복제시키는 구조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들의 특성은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혈귀의 속성과 모두 일치한다.
혈귀들은 반복해서 ‘자신들은 죽지 않는다’고 호언한다. ‘불사’를 자칭하고, ‘영원한 생명’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검으로 참살당하는 것도 있고, 약물로 힘을 잃는 경우도 있으며, 예외 없이 햇빛을 받으면 괴사한다. 그래서 혈귀들은 이론적으로는 일관성이 맞지 않는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혈귀가 생물이 아닌 구조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된다. ‘기생한 생물은 죽지만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다’는 명제는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혈귀와 싸우는 검사 즉 의료진들은 취약하다. 그들은 차례차례 부상을 입고, 죽어간다. 그들에게는 혈귀와 같이 수족을 잘려도 되살아나는 세포재생능력이 없다. 애초에 혈귀를 죽이기 위한 결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을 베면’ 되었지만, 어느 단계를 지나면 그것도 통용되지 않는다. 잘린 목이 곧바로 재생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항생제를 계속 쓰면 내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런 고로, <귀멸의 칼날>의 설화구조는 ‘귀살대=의료진, 혈귀=바이러스’라는 도식으로 매듭지으면 이야기가 간단하다. ‘그렇구나, 코로나 사태로 난처해진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우정, 단결, 승리>의 서사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구나’ 라는 설명으로 많은 독자가 납득해 주실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건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 고토게 코요하루 씨가 <귀멸의 칼날>의 원형에 해당하는 만화를 <소년 점프>에 투고한 게 2013년 이야기이고, 같은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16년. 팬데믹과의 상관관계는 완전히 우연이기 때문이다.
걸출한 작품이란 걸 말할라치면, 진짜로 현실이 작품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오토모 가쓰히로가 그린 <AKIRA>의 무대는 다음 해에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2019년의 네오 도쿄(현실의 오다이바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데, 도쿄 만 매립지에 빽빽한 고층 건물 숲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만화가 1982년에 연재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소년 가네다는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탄다. <AKIRA>이후, 오토바이 제조사가 이 ‘가네다 바이크’를 본떠서 오토바이를 디자인하게 되었다(혼다 NM4, 야마하 MAXAM 3000 등).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가상 세계에서 아르테미스가 타고 다니는 게 직설적으로 말해 ‘가네다 바이크’이다. 오토모 가쓰히로는 38년 전에 2020년 도쿄의 풍경과, ‘올림픽 특수’와,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영감을 주게 된 21세기의 첨단 머신을 만화에 그려넣은 것이다.뛰어난 만화는 세상의 미래를 예견한다. 그래서 마치 세상이 만화를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난다. <귀멸의 칼날>은 그런 예외적인 만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견성을 갖춘 만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간과 세상의 향방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있는 작품은 그게 만화든, 영화든, 소설이든 독자나 관객에게 ‘마치 지금 이곳의 자기 이야기를 묘사하는’ 듯한 착각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럼 그 ‘깊은 통찰’이란 무엇인가.
<귀멸의 칼날>에는 어떤 ‘구조’가 되풀이된다. 그것은 ‘하이브리드’ 혹은 ‘모호함’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혼합’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무대는 ‘다이쇼 시대’로 설정되어 있다. 다이쇼 시대가 만화의 무대가 되는 일은 그다지 없다(필자가 알고 있는 예로는 순정만화 <하이칼라 씨가 간다> 뿐이다). 어째서 작가가 이 시대를 골랐는지 잘 모르겠다. 배경이 다이쇼 시대가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상의 필연성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은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이는 ‘하구’ 같은 시대였다는 것이다. 아직 숯불구이가 직업으로 성립되는 시대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기차나 자동차가 드물던 시대이다 (단지로의 동료 중 한 명인 하시비라 이노스케는 산에서 자라 기차를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것을 짐승으로 오해했다). 그런 정경 가운데, 검사들은 쓰쓰소데(筒袖), 노바카마(野袴), 하오리(羽織)에 다이토(帯刀)라는 보신전쟁 당시의 전쟁복식을 갖추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가 이 만화에서는 뒤섞여 있다. 작가는 아마 ‘그런 것’을 좋아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검사와 혈귀 사이도 그렇다. 여기에서도 ‘혼합’이 눈에 띈다. 한 쪽에 무구한 ‘선역’이 있고, 다른 쪽에는 사악한 ‘악역’을 설정해두는 것과 같은 디지털적인 구분선이 사실상 없다. 이야기에 중심에 선, 탄지로와 동료들이 전력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네즈코는 ‘반半 요괴’이다. ‘기사’가 ‘무구한 공주님’의 순결을 지키는 게 기사 문학의 정형이지만, <귀멸의 칼날>에서 검사들이 전력으로 지키는 ‘공주님’은 이미 더럽혀진 피를 가진 병자인 것이다.
네즈코를 낫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무적인 혈귀들을 체내에서부터 썩게 하는 맹독을 조합하는 타마요-유시로라는 ‘의료인 콤비’는 검사들의 큰힘이 되지만, 이 두 사람은 ‘과거의 혈귀’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혈귀적 속성을 내던져버리지 못한 채 ‘전향한 혈귀’로서 혈귀 사냥에 관여한다.
단지로와 동기 검사인 시나즈가와 겐야는 ‘도깨비를 먹어서’, 도깨비의 능력을 빨아들여 전투력을 높이는 자멸적인 스킬을 구사한다.
클라이맥스에서는 마지막까지 순수함과 무구함의 결정체로서 혈귀 사냥의 주력이 되었던 탄지로 자신이 그가 쓰러트린 최종 보스 혈귀 키부츠지 무잔의 주술에 의해 혈귀화하여, 혈귀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의 ‘줄다리기’를 겪고서 결국 인간 세계로 되돌아온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검사들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속성이 심플’한 자는 한 명도 없다. 모두 무언가 트라우마적 경험과 거기에서 파생된 깊은 아픔을 품고 있다. 트라우마적 경험이라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핵심으로 삼아 그들의 개성은 조형되는 것이다. 자기 인생관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약점을 검사들은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검사들의 개성적인 전투력이 생겨나게 된다.
똑같은 일이 혈귀 측에서도 일어난다. 그들도 (최종 보스인 키부츠지를 제외하고) 제반의 사정에 의해 본의 아니게, 혹은 자신의 의지로 혈귀가 된 ‘옛 인간’ 들이다. 그들이 혈귀가 된 것은, 인간이었을 때 ‘차라리 혈귀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괴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검사들의 손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자신을 혈귀로 몰아넣었던 예전의 트라우마적 경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검사에게 털어놓음으로써 그들의 증상은 극적으로 완화된다(그리고 이 세상에서 소멸한다). 이는 말 그대로 정신분석의 메타포다.
지면이 부족하므로 결론을 서두르기로 하자. <귀멸의 칼날>은 질병과 치유를 둘러싼 이야기이다(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우연히도 팬데믹 시기에 딱 들어맞게 되어버린 것이다). 검사와 혈귀들은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병자’이다.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의료인’ 혹은 ‘간병인’이다. 그래서 좀 과장하자면 이야기는 ‘전장’과 ‘병원’이라는 장소에서만 전개되는 것이다. 전투에서 부상당해 한계에 이를 정도로 지쳐버린 검사들이 서로 마음을 통하고, 추스르고, 화해하는 것은 병상에서 침대를 나란히 하는 ‘치료중’의 시간에 행해지는 것이다.
이 만화의 탁월한 점은 ‘건강’과 ‘질병’을 디지털적인 이항대립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두 상태 사이의 ‘애매함’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무대라는 투철한 철학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100% 일반인도 100% 환자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종의 부족함이나 과잉을 품고 있고, 각자의 방식대로 상처받으며, 각자의 ‘낙인’을 갖고 있다. <귀멸의 칼날>의 성취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환자들에게 다가가고, 때로는 돌봐주고, 때로는 ‘성불’시키는 탄지로라는 웅대한 포용력을 가진 주인공을 탄생시켰다는 점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022-02-23 08: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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