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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화의 교육론>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2. 25. 22:43
들어가며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이 책은 2020년 여름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번에 걸쳐 행해졌던 교육에 관한 강연에 대해 펴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본 전국을 찾아 현지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제가 강연을 하고서, 객석의 선생님들과 대화하려는 여행을 기획했었는데요, 아시는 바와 같이 팬데믹 확산 탓에 대면 강연이 어려워져서 투어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고베의 가이후칸(제가 꾸리고 있는 도장 및 학원)에서 강연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청중을 모시고 그분들 앞에서 제가 2시간 정도 얘기를 하고서, 질문 시간을 갖는 방식입니다. 아무튼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방식은 갖출 수 있었습니다. 청강자 모집, 행사 준비, 녹음, 활자화 등을 모두 도요칸 출판사의 편집자 오사베 아이카 씨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복잡화의 교육론>이라는 제목도 오사베 씨의 제안입니다. 오사베 씨는 제가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복잡화이다'라고 어딘가에서 했던 말을 접하셨는데, '복잡화'라는 말이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이 서문에서는 그 제목의 의미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고자 하는 점을 써두고자 합니다.
분명히 교육을 운운하는 사람 중에 '아이들이 보다 복잡한 생명체가 되게끔 지원하는 게 교육의 목적'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지식의 양, 감정의 풍부함, 의사소통의 원활함을 '성숙'의 지표로 삼는 사람은 많은데, '이전보다 복잡한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성숙의 징표로써 축복해주는 사람을 그다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이전보다 복잡한 생명체가 되었다' 하는 경우, 자녀들은 이제까지 본 적 없던 표정을 짓고, 들어본 적 없던 어휘를 써서 말하기 시작하며, 이제까지 한 적 없던 행동을 하게 되는데요, 자녀들의 그러한 변화를 보고서 그야말로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어제까지와는 다른 인간을 앞에 둔 것임으로 당혹스럽기는 할지언정 기뻐할만한 리액션은 별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녀의 복잡화를 솔직하게 기뻐해주는 것이 어른의 가장 중요한 직무(職務)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된 자녀를 상대하는 어른보다,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자녀들 스스로가 진짜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당혹해하는 것은 당사자입니다. '어제까지의 자기'인 채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신의 의지로는 제어할 수 없는 변화인 것입니다. 생명체의 유생(幼生)이 그때까지 덮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지고, 다음 단계로 변태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화했다손 쳐도 자녀들은 '어제보다 행복'해진 것도 아니요, '어제보다 자유로워진' 것도 아니며, '어제보다 강해진' 것도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아지지만, 즉각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복잡화한 자녀들은 그저 '어제보다 더 복잡해진'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화 프로세스를 연속적으로 반복 실행하는 것 말고는 자녀들이 성숙할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부모님 등 주위 어른들은 결연하게 자녀들의 복잡화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채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수고스럽게 '복잡화' 같이 교육 현장에서는 그다지 쓰이지 않는 말을 제가 꺼내들었는가 하면, 복잡화라는 것은 수량적으로 계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아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복잡화는 계측 불가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이, 무게, 부피 모두 확실히 그것을 잴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잡화를 잴 수 있는 '척도'는 우리들 수중에 없습니다.
복잡화할 때 일어나는 것은 양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표정의 변화' '감촉의 변화' '분위기의 변화' 등입니다. 표정이 깊어지고, 목소리의 깊이가 달라지며, 신체 기동의 분절이 바뀝니다.
변화가 생겨난 이상, 정밀한 계측기기가 있으면 계측 가능하겠지만, 우리들의 손에는 '준비된 척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복잡화를 계측하고자 한다면, '척도'는 지금 이 자리에서 손수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복잡화하는 자녀'를 상대로 그 성숙을 지원한다는 것은, 주위 어른들에게 집중력과 발명의 기예를 요구하는, 참으로 힘든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자녀들의 성숙의 지표로서 '복잡화'라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최우선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이외의 사회제도에도 당연히 해당된다고 봅니다만, 그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시민적 성숙을 요구하는 제도는 '바람직한 제도' 입니다. 이를테면 민주제(民主制)가 그렇습니다. 독재제 하에서는 '현명한 독재자'에게 모두 내맡기고서, 시민들은 '고복 격양(鼓腹撃壌; 민중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염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선정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의미의 옛 고사 - 옮긴이)' 하고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시민이 '아이'여도 독재제는 기능합니다. 그러나 민주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공공의 복리'를 배려하고, 그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성숙한 시민'이 일정 수 존재하지 않으면 민주제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민주제는 구성원에게 '어른이 되어 주게' 하고 간청하는 제도입니다. 그 수행적인 힘 덕에 민주제는 다른 모든 제도보다도 월등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육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사회 제도를 같은 기준에서 평가합니다. 그 제도를 제대로 기능케 하기 위해 제도 운용자들의 (전원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일정 수가 '착실한 어른'일 것을 필요로 하는 제도는, 운용자들 전원이 '유아'여도 운용할 수 있는 제도보다 더욱 바람직한 제도입니다. 저는 그 기준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운용자 자신에게 성숙을 요구하는 제도가 자녀들을 성숙시키는 제도로서는 가장 '참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일정 수의 성실한 어른'의 머릿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동기입니다. 알아듣기 힘든 얘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신다면, 분명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여러분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2022-01-29 09:4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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