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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3. 10. 23:14
미국에서의 자유와 통제
미국 이야기를 하려 한다. 자유를 논하는 마당에 어쩌자고 미국 얘기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 일본인에게는 ‘자유는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다’라는 실감(實感)이 희박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독립전쟁이나 시민 혁명을 경유하여 시민적 자유를 획득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 자유를 얻고자 싸우고,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 자유를 손에 넣은 뒤, 자유가 극히 다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까딱 잘못하다가는 얻은 것 이상으로 크게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섬뜩해지는 경험을 우리들은 집단적으로는 해본 적이 없다. ‘자유’는 freedom/Liberté/Freiheit를 번역한 것인데, 패키지화된 개념으로써 근대 일본에 수입되었다. 순수 일본어에는 ‘자유’에 상응하는 어휘가 없다. 그렇다 함은, 자유는 토착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걸핏하면 ‘자유는 멋진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의심의 여지 없는 전제로 두고서 비로소 의논을 시작한다. 허나 그래서는 자유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자는 그저 ‘사악한 권력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이 말하는 자유론은 ‘어떻게 권력자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를 탈환할 것인가’ 하는 전술론에 그치고 만다. 우리들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지 않는 까닭은 이러한 고정적인 체계에서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해서가 아닐까.
J. S. 밀의 『자유론』(1855년)은 미합중국 건국이라는 역사적 실험을 코앞에서 관찰한 바를 바탕으로 행해진 고찰이다. 우리들이 우선 놀라는 점은, 밀이 논한 최초의 주제가 “사회가 개인에 대해 당연하게 행사해도 좋을 권력의 성질과 한계” (J. S. 밀, 『자유론』, 하야사카 다다시 역, 『세계의 명저 33』, 주오코론샤, 1967년, 215쪽)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면 시민적 자유를 제한해도 되는가. 밀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물음에서부터 자유를 논하는 습관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은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 확대’에 대해 말하고, 통치자는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확대’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가 거의 겹치지 않는다.
통치 기구는 어디까지 시민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혹은 제한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밀이 말한 자유론의 한 가지 논점이다. 이러한 물음은 시민 혁명과 정부 타도를 경험해보고서 통치 기구를 손수 만들어본 시민밖에는 제기할 수 없다.
시민혁명 이전의 인민에게 있어 지배자는 ‘민중과 항상 이해가 상반’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인민은 지배자의 권력 제한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었다. 하지만 민주제(民主制)를 시민이 이룩한 후, 이론상으로는 인민의 대표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배자의 이해와 의지는 인민의 의지와 이해와 일치한다고 합의가 되었다. 정부의 권력은 “집중화되고 행사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진 국민 자신의 권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같은 책, 217쪽) 라는 얘기다. 민주제 이전의 공상적 민주제였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실제로 시민 혁명을 행하고, 민주제를 실현시켜버렸더니 이야기가 그리 순탄치 않다는 점이 밝혀졌다. “권력을 행사하는 ‘민중’은, 권력의 지배를 받는 민중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218쪽)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제의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서 ‘민중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이란 “실제로는, 민중 가운데 좀 더 활동적인 부분의 의지, 말하자면 다수자 혹은 자신들이 다수자라고 인정받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218쪽)였기 때문이다. “민중이 그 성원의 일부를 압박하려 들 수도 있는 것이다.”(218쪽)
이는 시민 혁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자밖에 말할 수 없는 지견이라고 본다. 지배자 대 인민이라는 이항대립으로 얘기가 끝날을 적에는 간단한 문제였다. 허나 근대 민주제의 아포리아(난점 - 옮긴이)는 사후에 나타났다. 시민 혁명을 통해 민주제를 실현해보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가장 활동적인 민중의 일부가 그만큼 활동적이지 않은 다른 민중의 자유를 제약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에 의한 민중의 지배’라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하면 민주제의 이름으로 그러한 사태를 제어할 수 있을까?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해도 좋을 권력의 성질과 한계는 얼마만큼일까? 이것이 약 170년전에 밀에 의해 정식화(定式化)되어, 오늘날까지 결정적 해답을 낼 수 없었던 자유에 관한 최대의 논건이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러한 질문을 우선적으로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시민 사회가 성숙하지 않다. 실제로 “다수자의 전제専制”가 “사회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는 해악 중 하나”(219쪽)라는 인식은 일본 국민의 상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선거에 이겼다는 것은 민의의 총의를 신임받았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이겼으니 큰일은 무사히 마친 것이다’라는 말을 정치가들이 부주의하게 발언하고, 이를 그대로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써재끼는 일이 일어난다. 밀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민주제에 치명상을 가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170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밀의 책은 메이지 유신 초기에 일본에 번역되어 상당히 널리 읽혔을 것이다. 하지만 읽었다는 것과 육화(肉化)했다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우리들은 토크빌과 해밀턴, 밀이 살았던 18~19세기의 서구 시민 사회보다도 아득히 민주제 성숙도가 낮은 사회에 지금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을 우선 인정하자.
자유는 단적으로 자유의 그 자체적 성격을 띤다든가, 마치 자연물과도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근대 시민 사회에서 ‘어느 정도까지면 자유를 제한해도 좋은가’ 하는 물음을 통해, 결락적(缺落的) 성격을 띠고 그 윤곽을 서서히 드러낸다.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는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사적 자유와 공공의 복지는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그때, 어디쯤이 적절한 ‘합의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리상 결정할 수 없다. 범용하고도 통속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절한’ 지점을 피부 감각과 후각으로 때려맞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정밀한 조작이 가능하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은 자기 손으로 ‘생생한 자유’를 취급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다.
필자가 본 논고에서 건국기 미국의 사례를 검토하는 것은, 그 시대 미국 사람은 참으로 성실히 ‘통제와 자유’의 문제로 고민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와 씨름할 적에 거기서 생산적인 지견을 길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한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지금 그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독립선언(1776년) 이후 합중국 헌법의 제정(1787)까지는 11년 간의 시간 지체가 있다. 그것은 새로이 창출한 나라의 형태를 논하는 마당에 그 나라 국민 사이에서 합의 형성이 어려웠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쪽에는 연방 정부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권한을 맡기자는 ‘중앙 집중파(페더럴리스트; 연방주의자)’가 있고, 상대편에는 단일 정부 아래에 직할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여, 주 정부의 독립성에 비중을 두는 ‘지방 분권파’가 있다(State를 ‘주州’로 옮기는 게 적절한지를 필자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래에 전재하는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의 일본어 번역문에는 ‘주’와 ‘방邦*’이 혼용되어 있다).
[* 일본어 邦(구니)에는 국가와 지방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음. - 옮긴이]
중앙정부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려면 인민은 자신의 자연권 가운데 일부를 양도해야만 한다. 이는 홉스, 로크 이래로 근대 시민 사회의 상식이다. 이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근대 시민 사회에서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어느 기관에 어느 정도의 개인적 권리를 양도할 것인가가 된다. 말하자면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원리의 문제라면 옳고 그름의 판가름이 있지만, 정도의 문제에 ‘최종 해결책’은 없다. 그것은 반드시 오픈 퀘스천으로 남는다. 미합중국이 나중에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통치의 근본 원리를 채택할 때 통제와 자유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를 끝끝내 결정내리기 어려워했음의 덕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갈등에 처한 가운데 성숙한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해결이 나지 않는 근원적 난문을 품고 있는 나라는, 단일의 무모순적인 통치 원리의 통제를 받는 사회보다 살아남는 힘이 강하다.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은 합중국 헌법 제정 직전에 여론을 연방파로 이끌기 위해 존 제이,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세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저술의 직접적인 이유는 제이가 쓴 바에 의하면 “하나의 연방 안에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에, 각기 다른 방邦을 여러 연합으로, 혹은 여러 국가로 분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안전과 행복 추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상배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 사이토 마코토 역, 『세계의 명저 33』, 317쪽)
미국은 한몸이어야 한다. “본 국토를 비우호적으로 질투 반목하는 여러 나라의 독립국으로 분할할 수는 없다”(같은 책, 318쪽)는 게 연방주의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때 연방 통합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내걸었던 것이 ‘자유’의 원리였다. 그들은 연방 정부에 강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주정부의 자유를 손상시키는 일이며, 더욱이 시민의 자유를 손상시킨다고 하였다. 그래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때 ‘자유’의 대립 개념은 ‘연방’이었던 것이다. 명백한 분류 착오처럼 보이지만, ‘자유’와 ‘연방’은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그 시점에서는 현실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제이의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다.
“같은 선조로부터 태어나,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같은 종교를 믿으며, 같은 정치 원리를 신봉하고, (...) 한몸이 되어 협의하고, 무장하고, 노력하며, 장기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끝까지 싸웠던” 미국인은 독립전쟁 뒤 ‘13개주 연합(the Confederation)’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정치체제는 전시를 맞아 급조된 것인지라,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
“자유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연방에도 애착을 갖고 있던 그들은 직접적으로는 연방(유니언)을, 간접적으로는 자유를 위태롭게 할 위험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연방과 자유 양 쪽 모두를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란 좀 더 현명하게 구성된 전국적(내셔널) 정부(거버넌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헌법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318-9쪽)
주의를 기울여 읽지 않으면 빠트릴 수도 있는데, 여기서 제이는 연방과 자유를 양립시키는 것이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자유만을 추구하면 연방은 존립할 수 없다. 연방이 존립하지 못하면, 자유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자유와 연방 ‘양쪽을 모두 충분히 보장할’ 궁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때 연방이 없으면 자유가 위기에 처한다는 논거를 뒷받침하고자 제이가 채택한 것은 ‘침략자가 쳐들어왔을 때 누가 전쟁에 나설 것인가?’ 하는 가정이었다.
독립 직후의 합중국은 영국, 스페인, 프랑스, 더 나아가 국내 원주민과 군사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리스크를 떠안고 있었다. 만약 어느 방邦이 이들 나라와 전투 상황에 돌입했을 때, 전투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방邦 정부가 군사적 독립을 바란다면, 방邦 정부는 일단은 단독으로 외적과 대처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 정부가 공격받는 경우 다른 정부는 그 지원을 위해 급히 달려와, 그 방위를 위해 몸소 피를 흘리고 몸소 금전을 지출할 수 있겠는가?” (329쪽).
상당히 직설적인 이야기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미국밖에 모르니만큼, 이를테면 버지니아 주가 외국군에 의해 공격받을 때 코네티컷 주가 ‘연방의 지위가 저하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방관하는 것과 같은 사태를 상상할 수 없다. 혹은 “미국이 세개 내지는 네개의 독립된, 어쩌면 상호 대립하는 공화국 내지는 연합체로 분열되어, 첫째는 영국에, 둘째는 프랑스에, 셋째는 스페인에 붙게 되어” (330쪽) 신대륙에서 대리전이 시작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개념을 근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 생성 상태까지 되돌아가서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미국이 되기 이전의, 앞으로 미국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직 내다볼 수 없는 시점으로 되돌아가, 그 시점에서 자유와 연방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해 보아야만 한다.
외적의 침략 리스크를 상정한 상태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방邦 정부에 군사적 재량권을 부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연방 정부에 군사를 맡겨야 하는가, 둘 중 어느 쪽이 적절한가. 그것이 제이가 제시한 질문이었다.
연방 정부에 군사를 맡긴다는 것은 상비군을 둔다는 의미이다. 허나, 지방 분권파는 상비군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에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현재의 미국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곧장 믿기 힘들지만, 합중국 헌법을 둘러싼 최대의 논쟁은 사실 ‘상비군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 분권파가 상비군에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까닭은, 상비군이 간단히 권력자의 사병이 되어 시민에게 총구를 돌렸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공포와 고통을 동반하며 회상하게 되는 트라우마였다. 확실히 영국군은 국왕의 뜻을 받들어 식민지 인민에게 총을 겨눴다. 그에 맞서 자신들의 의지로 총을 쥐고서 들고 일어난 ‘무장한 시민(militia)’들이 최종적으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 것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미국 건국의 정통성과 신화성을 유지시키고자 할 때의 양보할 수 없는 요건이었다. 실제로 독립선언에는 분명히 이렇게 명기되어 있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고, 창조주에 의해 양도할 수없는 권리 즉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자명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 어떠한 형태든 정부가 이 목적을 방해하는 때에는, 이를 개혁 혹은 폐지하고서, 새로이 정부를 창건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
독립선언은 인민의 무장권, 저항권, 혁명권을 인정하고 있다. 독립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게 논리적으로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전쟁 직후에 제정된 펜실베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방邦 헌법에 따르면 ‘평시의 상비군은 자유를 위협하므로 이를 유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기되어 있다.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델라웨어, 메릴랜드 방邦 헌법에는 다소간 완곡하게 ‘상비군은 자유를 위협하기에, 의회의 승인 없이는 모집, 또는 유지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되어있다.
‘자유를 위협하는 상비군’이라는 명제는 건국 당시 미국 시민의 ‘법감정’이 아니라, ‘성문법’이었던 것이다. 이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에 반해, 연방주의자들은 외적의 침입 리스크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이는 ‘국가 존망의 위기’와 관련된 것이다. 해밀턴은 “국방군의 창설, 통솔, 유지에 필요한 일체의 것에 관해서 제약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46쪽)
강대한 국방군을 창설할 것인가, 아니면 상비군은 최저한도로, 잠정적인 것으로 그치게 할 것인가. 이 원리적인 대립은 결국 헌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합중국 헌법은 상비군 반대론을 고려하여, 상비군 보유는 헌법 위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조항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방 의회의 권한을 정한 헌법 8조 12항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연방 의회는 육군을 소집하고, 지원할 권한을 가진다. 단, 이를 위한 예산 지출은 2년을 넘어서는 아니 된다.”
상비군은 어느 나라든지 대개 행정부에 속한다. 하지만 합중국 헌법은 육군의 소집과 유지를 입법부에 맡겼다. 더욱이 2년 이상에 걸쳐 국방비를 연속 지출하는 것을 금했다. “이를 잘 살펴보면, 명백한 필요성이 없는 한 군대를 유지하는 일에 반대하는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보장이라고 볼 수 있는 고려인 것이다”라고 해밀턴은 8조 12항에 대해 쓰고 있다. (351쪽)
미국이 상비군을 금한 헌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많지 않다. 개헌파는 헌법 9조 2항(군사력 보유 및 전쟁 포기 조항 - 옮긴이)과 자위대 존재의 ‘모순’을 지적하며 ‘헌법과 현실 사이에 어긋남이 있을 때는, 현실에 맞춰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상비군 규정에 대한 합중국 헌법과 현실 사이에 심각한 어긋남이 있기에 개헌해야만 한다고 미국 정부에 제언했다 하는 바에 대해서는 필자가 과문한 탓에 알지 못한다. 필자는 오히려 헌법 조항과 현실 사이에 어긋남이 있다는 사실이 미국의 민주제에 활력과 풍양성(豊穣性)을 불어넣어준다고 이해하고 있다. 미국 시민은 헌법 8조 12항을 읽으면서, ‘건국자들은 어째서 이러한 조항을 써넣었는가?’ 하는 건국 당시와 관련된 통치 원리의 근원적인 대립에 대해 사량(思量)하기를 여지없이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정답 없는 물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널리 훈도된 한 가지의 해답을 암송하는 것보다, 시민의 정치적 성숙에 있어서 훨씬 유용하다.
상비군에 대한 원리적 대립은 수정헌법 제 2조의 무장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재연된다. 1789년, 헌법 제정 2년 후에 채택된 수정 헌법 제 2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잘 훈련받은 밀리시아는 자유로운 방邦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므로, 인민이 무기를 보유 휴대할 권리는 침해받을 수 없다.’
수정헌법 제 2조의 문언을 확정할 때 어떠한 의논이 있었는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방邦의 수중에 군사력을 남기고자 하는 지방 분권파와 군사력을 연방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는 중앙 집권파가 맺은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헌법 제정 시점에서 연방주의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점은, 외적의 침공과 동시에 방邦정부와 연방정부의 군사적 대립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분명히 ‘내전’의 리스크를 언급하고 있다.
“각 주의 정부가, 권력욕을 기반으로 연방정부와 경쟁 관계에 서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경향이고,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어떻게든 싸우게 되면, 사람들은 (...) 주 정부에 반드시 가담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마땅하다는 점은 이미 말했다. 각 주의 정부가 (...) 독자적 군대를 소유함으로써 그 야심을 증대시키는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군사력은 각 주의 정부에게 있어서 헌법이 인정하는 연방의 권위에 대해 감히 도전하고자 하는, 결국에는 이를 전복하고자 하는 너무나 강력한 유혹이 되고, 그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되리라.” (356쪽)
밀리시아를 방邦의 자기 재량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서 영향권에 넣고 싶은 지방 분권파와, 될 수 있는 한 군사력을 연방 정부가 독점하고자 하는 연방주의자의 극한 긴장 관계 속에 헌법이 기초되고, 수정 헌법이 더해졌다. 원칙으로써 상비군을 두지 않겠다고 한 것, 군대를 소집, 유지할 권한을 입법부에 부여한 것, 시민의 무장권을 인정한 것, 이같은 것들은 연방파 측으로서는 비 자발적인 양보였으리라. 연방파의 저항의 흔적은 간신히 ‘잘 훈련된(well regulated)’ 과 ‘자유로운 방邦의 안전을 위하여(the security of a free state)’라는 이중의 조건을 남기게 되었다.
밀리시아는 후에 National Guard로 개칭되었다. 주 방위군 정도로 번역되는데, 이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모국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에 이끌었던 Garde Nationale에 경의를 표하고자 개칭된 것으로서, 본래 의미는 ‘국민 경비병’이다. 한편으로 무장한 시민들은 자신을 지금도 ‘밀리시아’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2021년 1월 20일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는 ‘무장한 트럼프 지지자’의 난입에 대비해 ‘주 방위군’ 15000명이 배치되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하였는데, 그들은 ‘폭도와 병사’도 ‘시위대와 경찰’도 아닌, 모두 주관적으로는 ‘밀리시아’였던 것이다.
미국 정치문화에서는 원리주의적인 수미일관성보다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재빨리 최적화하는 복원력(resilience)이 높이 평가받는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이지만, 이 정치문화의 형성에는 미국이 건국 시점부터 이중의 통치 원리로 분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부여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트럼프 이후 미국의 국민적 분단을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건국 시점부터 미국은 통일국가와 연방 사이의 논쟁이라는,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은 양의적 성격을 줄곧 가져왔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개의 통치원리 사이에 항상 분열이 있어왔던 것이다. 분단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양원으로 성립되는 입법부의 구성도 두 가지 원리가 맺은 타협의 산물이다. 하원 정원은 인구 비례로 결정함으로, 하원 의원은 ‘그 권한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직접 도출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상원의원은 각 주마다 2명이 할당되어 있으므로, 방邦을 대표한다.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선거인단 제도도, 대통령을 뽑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邦이지,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은 ‘통일 국가적 성격과 동시에, 수많은 연방적 성격을 가진 일종의 혼합적인 성격’을 갖춘 국가인 것이다.
그로부터 미국에서의 자유가 갖고 있는 특수한 함의가 도출된다. 자유지상주의자는 ‘리버테리언(libertarian)’을 자칭한다. 그들은 공권력이 사적 권리, 사유 재산에 개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징병에 응하지 않고(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다룰지는 자신이 결정한다), 납세도 하지 않는다(자신의 자산을 어떻게 다룰지는 자신이 결정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리버테리언이었으므로, 네 번에 걸쳐 병역을 기피했고, 대선 때도 후보로서의 자신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그러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공권력의 상층에 군림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공권력이 시민적 자유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강한 거부감이 미국 정치문화를 이루는 한 갈래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통치 하의 미국에서 코로나19의 감염 확대가 멈추지 않은 채,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을 보유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가 세계 최다를 기록한 것은, 의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공권력의 개입을 꺼리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마치야마 도모히로 씨의 미국 관찰기인 『트럼프주의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 제목은 질병의 리스크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예방하며,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하는, 원래대로라면 과학적으로 결정되었어야 했을 사안들에 대해 ‘자유인가 통제인가’ 하는 정치적 이념의 선택이라는 문제에 급급해버린 미국 특유의 풍토를 웅변하고 있다.
감염병은 전 주민이 균등히 양질의 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는 한 종식될 수가 없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환자의 치료나 백신 접종이라는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의료를 상품으로 간주하여, 돈이 있는 자는 의료를 받을 수 있으나, 돈이 없는 자는 받을 수 없다는 시장 원리를 믿는 사람들의 눈에 이는 의료 자원을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재분배하는 사회주의적 ‘통제’로 비친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은 실은 양립시키는 것이 극히 어려운 정치 이념인 것이다. 우리들은 프랑스 혁명의 표어에 익숙한 탓에 ‘자유 평등 박애’를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평등은 공권력이 강력한 개입을 행사하여, 부유한 자가 갖고 있는 사유 재산의 일부를 빼앗고, 힘 있는 자가 가진 사적 권리의 일부를 제한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 약한 자에게 재분배하는 일 없이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을 실현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자유가 침해된다. 그것도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넉넉하고, 힘이 있으며, 보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자유가 침해된다.
밀의 논점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평등은 ‘민중 가운데서도 좀 더 활동적인 부분’의 사적 권리를 제한하고, 사유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밖에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활동적인 부분’은 밀에 의하면 진실로 ‘자신들이 다수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활동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평등은 ‘다수 시민’의 자유를 공권력이 제약하는 도식으로밖에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에 ‘다수의 시민’은 반대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자산이 가장 가난한 36억 명이 보유한 자산과 액수가 같다. 이 정도로 부가 편중되어 있는데도, 그 가난한 36억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조차 제프 베조스나 빌 게이츠와 같이 자신은 ‘다수자’ 측에 있다고 믿고서, 공권력이 사적 권리를 통제하고, 사유 재산을 공공재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백만장자 출신인 트럼프의 지지 기반이 ‘화이트 트래시’라고 불리는 백인 빈곤층이었다는 점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들은 평등보다도 자유 쪽에 중점을 두는 정치적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 ‘자유주의’ 사상은 ‘독립선언’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독립선언’ 중 아까 언급한 ‘저항권’을 보장한 부분의 직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창조주에 의해 생명, 자유 또는 행복 추구를 아우르는 불가침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로서,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말하자면 평등은 모든 인간의 기초조건이기 때문에 미래에 평등을 꼭 이룩해야만 한다는 목적의식이 없다.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수립된 것인지라, 평등의 실현은 정부 사업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된다. 평등은 이미 창조주에 의해 실현되어 있다. 그래서 정부가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인민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에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였으므로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 86년에 걸쳐, 공민권법이 성립되기 전까지 거듭 101년에 걸쳐,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나, 아직도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하여금 흑인이 백인과 평등한 인권을 추구해야만 했던 것은, 평등의 실현이 미국 건국 당시의 아젠다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치문화가 지금도 계속 살아있다.
너무 길어졌기에 이제 마치려고 한다.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 사이의 갈등에 ‘최종 해결책’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정도’를 찾아내는 경험지의 축적이다. 자유를 다루는 기술의 습득에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2022-02-22 11: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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