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 위기와 ‘반항’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4. 13. 22:01
어느 농업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위기와 식량 안보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받았는데, 완전히 딴소리를 써버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여러 매체에서 의견을 물어왔다. 이리하여 농업신문으로부터도 원고 청탁이 왔다. 이는 심상찮은 일이다. 필자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전문가가 아니다(물론 농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2014년 크림 반도 합병 때도, 그 이후의 친러파와 분리파의 동부 분쟁 때도 누구 하나 의견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둘 다 푸틴이 행한 ‘특수한 군사 작전’이고,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기였지만, 당시 필자 주위에서 ‘우크라이나 정세의 향방’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적은 없었고, 물론 원고 청탁도 없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로 돌아가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모두가 실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하등 관심도 없었던 자들이 갑자기 소란을 피운다’는 식으로 냉소하며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가 군사 행동을 했을 때에는 손 하나 내밀어주지 않았던 인간이,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기부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비웃음을 살 만한 이중잣대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절반은 타당할지 몰라도, 절반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구도에서 똑같은 플레이어가 연기하는 똑같은 정치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감지하게 되면, 사람은 그때부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반항적 인간>이라는 장대한 철학서의 서두에, 똑같은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무언가가 이제까지와는 다르다’고 직감하는 인간은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주인의 명령에 항상 희희낙락하며 따르던 노예가 어느날 갑자기 ‘지금까지는 잠자코 복종해 왔지만, 역시 못할 짓이다’ 하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때 노예가 항명의 근거로 삼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사전에 개시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넘으려고 할 때에 비로소 거기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다.
이 독특한 느낌을 알베르 카뮈는 révolte라는 프랑스어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일본어로는 ‘반항’으로 번역되지만, ‘반항’이라는 말은 일의적 의미에 지나지 않아서, 원어의 독특한, 애매한 느낌을 끝내 길어올릴 수 없다. 카뮈의 말을 그대로 채록해보자.
“누군가가 ‘제멋대로’ 굴고, 경계선을 넘어 그 권리를 확장하려고 할 때, 인간이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해도 해도 정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권리와 다른 권리가 서로 마주보며 견제하고 있다. 반항의 운동은, 그 사이에서 생겨난 용서키 어려운 침범 행위에 대해 결연하게 ’아니요’라고 반항하는 인간 측의 ‘인간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애매한 확신에서 출발하는데, 그것은 기분에 기초하고 있다.” (Albert Camus, L’homme révolte, in Essais, Gallimard, 1965, p.423)
이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카뮈는, 영역 침범 행위를 앞에 두고 사람이 반항을 선택하는 건 단적으로 ‘참을 수 없다’는 감정에 이끌린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받아들이고 나면 자기 혼자서는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어떤 것들을 잃어버리겠다는 걸 느꼈을 때 사람은 반항을 택한다. 그것이 카뮈의 생각이었다.
자기 혼자서 굴욕을 견디고,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대개 ‘반항’을 택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 고통받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나면 권리 침해를 받아들이는 게 심리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필자라면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사람이 목숨을 걸 정도의 ‘반항’을 택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권리 침해를 받아들이면 그로 인해 잃어버리는 건 그 사람 한 명 몫의 권리나 자유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람이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종종 반항 도중 목숨을 잃는 것은, 그것이 자기 개인의 운명을 뛰어넘는 ‘대의’를 위해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 지키고 있는 권리를 부정당할 바에 오히려 죽음을 택하는 것은 그 권리를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보다 상위에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가치의 이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막연하기는 해도 그 가치를 만인과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Ibid., p.425)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반항적 인간은 외롭지 않다. 그 반항이란 싸움을 통해 잠재적으로는 만인과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용감한 싸움의 동기를 많은 사람들은 ‘애국심’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애국심은 이롭다(모든 나라의 국민은 이만큼의 애국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편에 있고, ‘애국심은 해롭다(실제로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쪽에 있다. 이래서는 대화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지금 카뮈가 살아있다면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혹은 러시아 국내에서 투옥될 리스크를 감수하며 ‘반전’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꼭 ‘애국심’만 가지고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밝힐 것이라 필자는 본다. 그들은 그보다 더 상위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싸우는 사람들 자신도 ‘당신이 <반항>을 택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애국심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사건을 자기 자신의 절박함으로 느끼고 있는 게 설명이 안 된다. 우리들은 다른 나라 사람의 애국심에 대해서 그것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얼마나 진지하고 절박한 것인가의 여부와는 상관 없이 그렇게까지 감동받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2021년 1월 6일에 미국 연방 의회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주관적으로는 ‘목숨 걸고 미국의 이상을 지키려고 한’ 애국자였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들은 애국자다’ 라고 옹호하며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은 미국을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을 할 각오가 있었지만, ‘만인의 권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애국심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아도 보통은 딱히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고, 그러세요. 나라를 많이 사랑하시네요. 좋은 일입니다’ 하고 눙치거나 ‘어리석기는. 공허한 환상에 사로잡혀가지고’ 하며 냉담하게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지금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서 ‘반항’이라는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동기를 ‘애국심’이라고 필자는 해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위의 가치’를 위해 그들은 싸우고 있다고 본다.
우리들이 반항이란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 싸움을 통해 멀리 떨어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우리들의 권리 또한 동시에 지켜주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히 비합리적인 얘기다.
하지만, 이 반항자들이 패배했을 때 우리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밀이나 옥수수의 수입량이라든지 천연가스의 공급량이라든가 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 그것을 우리들은 아마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2022-03-17 14: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의 신앙과 수행 (2) 2022.05.01 <대부The Godfather>와 <북쪽 나라에서北の国から> (0) 2022.04.20 질병과 치유의 이야기 ー <귀멸의 칼날>에 대한 구조분석 (0) 2022.04.11 자유론 (0) 2022.03.10 2022년도 연구 수업 주제는 '위기론' (0) 202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