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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부The Godfather>와 <북쪽 나라에서北の国から>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4. 20. 22:34

    ‘KOTOBA’라는 잡지가 <대부> 공개 50주년을 기념하여 특집호를 냈다. 거기서 기고를 의뢰받아 아래와 같이 썼다.

     

     

    이상한 제목을 붙여버렸다. 허나 이 두 드라마를 서로 비교해 보면 <대부> 시리즈의 예상치 못한 층위에 가닿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이 두 드라마를 함께 논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술자리에 동석한 젊은 벗의 불평을 듣고서부터였다.

     

    “직장 상사가 <북쪽 나라에서>라는 드라마를 보라고 권하여 봐봤더니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밝혔더니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라는 힐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유감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어째서 남들은 이런 이야기에 감동하는 것인지요?” 하고 그가 물어서,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답했다.

     

    “<북쪽 나라에서>로 말할라치면, 가족이라는 것은 결국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통절한 진리를 그저 담담하게 그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네. 사실, 무척 긴 장편 홈드라마임에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깊이 이해한다든가, 공감을 나눈다든가 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지. 그 책임은 단적으로 부친인 구로사카 고로에게 있어. 그가 ‘가족이란 것은 이해와 공감으로 엮여있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린 탓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간다네. 그 비극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 것이고.”

     

    그렇게 말하니 그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그렇군요’ 하고 수긍하였다.

     

    아마 그는 <북쪽 나라에서>를 ‘마음 따뜻해지는 좋은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갖고서 본 탓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의 씁쓸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청자는 ‘이건 우리 가족 이야기다’는 걸 통감하고서, 절절한 기분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때 퍼뜩 생각이 나서 “그러니까 <북쪽 나라에서>와 <대부>는 거의 똑같은 얘기라구” 하고 말을 이었다.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는 구로사카 고로인 거야”하고 말하려는 찰나, 필자 자신 ‘어이쿠, 그런 거였나’ 하고 납득이 갔다.

     

    필자 혼자 맘대로 납득해버려도 난처해지니까, 그 이유를 아래에 설명하면서 필자의 <대부>론을 펼쳐보고자 한다.

     

    <대부>는 친족 서사다. 긴밀하게 엮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가족이, 기어코 한 명씩 그 구성원을 잃고, 결국 와해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이의가 있는 분은 없을 것이다. 가족들의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살해당하고, 어떤 이는 가족을 증오하고, 어떤 이는 가족에게 미움받는다.

     

    1부에서는 패밀리의 후계자인 장남 소니(제임스 칸)가 살해당하고 위대한 가부장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가 병으로 죽는다. 차남 마이클은 시칠리아에서 결혼한 새댁 아폴로니아를 눈 앞에서 폭살시켰다. 장녀 코니(탈리아 샤이어)의 남편 카를로는 마이클에게 살해당한다.

     

    2부에서는 아내 케이(다이앤 키튼)가 남편 모르게 아이를 중절한 것을 계기로 부부는 위기적인 관계에 이르는 한편, 콜레오네 가를 정서적으로 통합시켰던 모친이 죽고 나서, 마이클은 패밀리를 배신한 둘째 형 프레도를 죽인다. 3부에서 마이클은 시칠리아에서의 그의 보호자였던 돈 토마시노를 죽이고, 딸 메리(소피아 코폴라)를 죽인다. 마이클을 중심으로 보면, 그의 가족은 <대부> 시리즈에서 부친과 모친이 죽고, 맏형이 죽고, 첫 아내가 죽고, 자신의 매부와 둘째 형을 죽이고, 두번째 아내에게는 그 자녀의 죽음을 선사하고, 아버지의 대리인이었던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딸을 죽인다. 굉장히 살벌한 인생이다. 이야기 마지막에 이르러 마이클에게 가족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아들 앤서니와 여동생 코니와 조카 빈센트(앤디 가르시아) 뿐이다. 허나 아들은 자상한 삼촌 프레도를 아버지가 제거한 사실을 용서치 못하고 가족을 떠나게 되고, 코니는 오빠가 자신의 남편을 살해했다는 트라우마를 껴안고 있으며, 빈센트는 패밀리를 계승할 때 마이클로부터 메리를 포기할 것, 즉 ‘가족으로 두지 말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즉, <대부>는 코니의 결혼식에 콜레오네 패밀리가 전원 집합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가족 모두를 잃은 마이클의 고독을 그리며 끝나는 식의, 끝끝내 가족이 말라죽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어이쿠야.

     

    이 마이클의 비극적인 ‘가족 해체 드라마’에 대선율과도 같이 얽혀 있는 것이 <대부 2>에서의 비토 콜레오네(로버트 드 니로)에 의한 ‘가족 형성 드라마’이다.

     

    비토의 이야기는 9살 소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을 돈 치치에게 살해당해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처지가 된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는 시칠리아의 규칙에 따라 그를 보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져서, 엘리스 섬으로 들어가, 리틀 이태리에 조촐한 생활 거점을 얻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으며, 클레멘자와 테시오라는 동료를 얻고서, 드디어 콜레오네 패밀리를 형성한다.

     

    어째서, 고독한 소년 비토는 가족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시칠리아 남자의 규칙’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행동 규범을 비토는 가지지 않았다. 비토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동포를 수탈의 대상으로 삼는 리틀 이태리의 보스 돈 파누치를 쏴죽였을 때도, 시칠리아에 돌아가 가족의 원수인 돈 치치의 배에 복수의 나이프를 꽂아넣었을 때도, 비토는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규칙이 명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 비토는 딱히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의 감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 치치를 죽이기 위해 시칠리아로 떠난 여행은 비토에게 있어서 돈 토마시노와의 올리브오일 비즈니스를 위한 교섭의 여행이기도 하였고, 고향으로의 가족여행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토의 마피아 보스를 찔러 죽이기 위한 여행에 가족을 데리고 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썩 잔인한 이야기다. 비토는 거기서 보복으로 죽을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토를 보조한 돈 토마시노는 그때 벌어진 총격전에 의해 생애에 걸친 중상을 입는다.

     

    이미 뉴욕에서 성공한 비토에게 있어서 죽어 가는 노인을 살해하러 시칠리아에 가는 것은 리스크만 있지 어떠한 메리트도 없는 여행이었다. 허나 비토는 이 복수 여행을 아홉 살 때부터 계속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하면 ‘시칠리아의 남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 전원이 죽을 가능성도 있는 여행길에 오를 때, 비토는 물론 여행의 취지를 가족의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비토에게는 ‘시칠리아 남자의 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가족과 안락하게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토 콜레오네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해득실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따르는 것은 시칠리아에서의 소년기에 이르러 이미 깊이 내면화했던 ‘규칙’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이해도 공감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가족의 복수를 위해 시칠리아에 가려고 한다. 모두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와 같은 말을 그는 아내나 자식들에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기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와 같은 투정을 비토는 아마 생애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가족에게 이해도 공감도 요구하지 않는 이 남자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은 가장 강고히 결속되었던 것이다.

     

    마이클은 이 아버지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해병대에 지원했던 이야기의 서두에서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가족에게 ‘내 기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계속 간원하였다. 그리고 가족의 누군가가 ‘자기 기분’을 진심으로 알아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그로 인해 가족에게 무의식중에 못되게 굴고, 결국 가족을 전부 잃는다.

     

    <대부>는 ‘패밀리’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 세대만에 뉴욕 최대의 ‘패밀리’를 형성한 비토 콜레오네가 가르쳐준 것은, 가족을 견고하게 지키기를 원한다면, 가족을 이해와 공감 위에 기초하여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가족은 (그 제도 자체가 어느정도 부조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규칙’ 위에 구축해야만 한다.

     

    그 ‘규칙’이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그 ‘규칙’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으로써 책무 보증할 수밖에 없다. 사태가 역순이라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런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인간이 있음으로 하여 비로소 ‘규칙’이 기능한다.

     

    비토에게 있어 남자란 ‘가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 엄숙한 선언에 의해 그는 가족을 결속시키는 가부장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허나, 마이클은 마지막에 가족 가운데 그 한 사람만이 살아남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과적으로는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자기를 위해 가족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마이클의 가족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부>에서 배울 교훈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절절하게 와닿는 교훈이었다.

     

    (2022-03-19 09:2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
    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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