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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제도에 관한 인터뷰 (<겟칸 닛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2. 10. 21:06
<겟칸 닛폰> 2월호에 천황제와 관련된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 현재 황실은 황족 수의 감소 등에 따라 존속이 위태로운 한편, 황위 계승의 당위성에 대한 의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치다 님은 <저잣거리의 천황론>이라는 저서에서 상징 천황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셨는데요, 황실이나 황위 계승의 당위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징 천황제는 전후 70년 이상에 걸친 황실의 노력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저같은 2차 대전 전후 세대에게 천황제는 반드시 존재해야 마땅한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주위 어른들 가운데 '천황제 폐지'를 공언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천황제의 존속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면 '필요 없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황과 국민과의 관계는 패전 직후가 아마 가장 위기적이었고, 그 뒤에는 차츰 안정적인 것으로 되어갔다고 봅니다.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59년 당시 황태자와 미치코(美智子) 비의 성혼입니다. 국민은 민간 출신의 총명한 황태자비를 환영했고, 성혼을 축복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황실에 대해 느끼는 일반인들의 친밀감은 단번에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황실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60~70년대는 전공투(全共闘) 운동이나 안보 투쟁 등으로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황실은 어느 쪽도 직접 지지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관철했습니다. 저는 과격파 학생 측이었습니다만, 천황 측에서 저를 적대시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당시 황실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국민의 평화와 안녕을 바란다는 입장을 유지함에 따라, 좌익을 포함한 전 국민이 천황을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기운이 천천히 배양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천황과 국민 사이의 안정적이고도 온화한 관계는 주로 천황 측의 노력에 의해 조성된 것입니다. 국민은 황실에 대해 소소한 흥미 정도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황실은 이러하여야 한다'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합의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헌법 조문에 이미 실려 있다고 넘길 뿐, '입헌 민주주의와 천황제를 어찌 양립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실천적 문제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씨름해보지 않고서 75년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상황[上皇陛下]은 2016년 오코토바[おことば; 말씀]를 통해 상징 천황의 구체적인 책무가 무엇인가를 밝혔습니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의 진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여러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이재민을 방문해 '곁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심정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천황은 그동안 매번 죽은 이들이 숨진 현장, 국민이 재난을 입은 현장으로 가서, 꿇어 앉아 기도하고, 위로의 말을 건냈습니다.
일본국 헌법 제 7조에는 '천황의 국사國事 행위'로 법률의 공포, 국회의 소집, 대신[大臣; 장관]과 대사의 임명 재가 등에 이어, 마지막에 '의식을 행할 것'을 들고 있습니다. 천황은 이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그것은 궁중에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의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사자(死者)의 넋을 애도하고, 고통받는 자들 곁에서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를 장시간 타고 이동하는 구체적인 여로였던 이상, 신체적인 부하가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령에 이른 상황은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상징의 책무를 다 하는 일'이 힘들어졌다고 여겼지 않았나 합니다.
천황의 제 일의적인 역할이 제례와 함께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일이라는 것은 고대 이래로 변하지 않았습니다만, 상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징 천황의 본무로써 사자들의 진혼과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위로라는 '새로운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이를 언명한 것은 천황제 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확실히 입헌 민주주의와 세습 천황제는 '물과 기름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를 잘 타협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것은 취하고 어느 것은 버리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상, 다른 나라의 성공 사례를 참고할 수도 없습니다. 자력으로 무엇인가 해야만 합니다.
현재 황실 내부에 정착된 '가풍'으로서의 천황의 책무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고, 국민과 함께 고락을 나누는 존재라는 해석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남계 '혈통'의 계승 여부보다도 '가풍'의 계승 여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풍'을 계승하는 것에 성별은 상관 없습니다. 황실의 지금 '가풍'이 계승될 수만 있다면, 여성 천황도 여계 천황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점을 우선한다면 어렸을 적부터 황후의 훈도를 받아온 아이코(愛子) 공주가 다음 천황에 즉위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애초에 현재 일본이 이렇게까지 쇠퇴하고 있는 것은 여러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는 더이상 가부장제가 살아남을 여지가 없습니다.
-- 정부의 공청회에서는 옛 궁가(宮家)의 자손인 남계 남자를 황족으로 들이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풍'의 계승입니다. 단적으로 '황통皇統에 생물학적으로 연계되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황족의 수를 늘린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지금 황실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국민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경의나 친밀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도 보여지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인 '유전자(gene)'에 대비시킨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이라는 개념을 제창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 생물인 인간의 사고나 행동은 유전자에 의한다기보다는 두뇌에서 두뇌로 전이되는 사회적, 문화적인 정보에 의해 결정된다는 학설입니다. 제가 '가풍'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실에서 계승되고 있는 밈에 관해서입니다.
-- 천황의 존재 의의는 역사적으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이라는 건국 설화와 '황통은 영원하다(천황은 만세 일계이다)'라고 하는 혈통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만.
그 서사에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 국민이 황실을 지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징 천황제라는 현실적 정치 제도가 적절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이므로' 라든가 '만세 일계의 황통을 이어받았으므로'라는 이유로 천황제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비슷한 기원 설화, 건국 설화는 어느 공동체에서나 발견됩니다. 고조선은 5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건국했다고 하고, 프랑스는 로마 제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갈리아'가 그 기원이라고 합니다.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조차 건국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이로 '창조주'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러한 이야기가 존재하면 국민적인 통합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만세 일계'라는 말을 처음 꺼낸 이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택한 근대적인 개념입니다. 부레츠(武烈;499?~506?)에서 게이타이(継体;507?~531?)로의 황위 계승에 무리가 있었다는 점, 남북조(南北朝)의 분열(1337~1392)은 일본사 교과서를 읽어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절 '천황은 신성 불가침하다'고 헌법이 못박아 두었습니다만, 실제의 역대 천황은 당대의 권력자에게 줄곧 이용당해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천황이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즉위하였고, 또한 유배되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이야기는 시대의 요청에 기반해 형성된 것이므로, 그 형성에는 역사적 필연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특정 시대에 채용된 이야기를 초 역사적 진리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 보통 역대 황위는 근대 이전부터 예외 없이 남계로 계승되어 왔습니다. '만세 일계'라는 혈통 서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노가쿠 <하나가타미(花筐)>는 에치젠에 머물던 오아토베노오우지[大迹部皇子; 継体天皇] 에게 교토의 사자가 찾아와서 돌연 '황위에 올라 주시라'고 간청을 하는 바람에 상경을 하게 되는데, 그에 앞서 그가 총애하던 데루히(照日)에게 탄식을 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무로마치 시대(1336~1573) 사람들에게는 '이정도로 먼 혈족 사람이 황위에 오를 리가 없다'는 상식이 전제로 되어있었습니다. 여기에 이 노가쿠 드라마의 '의외성'이 있습니다. 종종 시국에 따라 어떤 종류의 문화 콘텐츠는 상연 금지가 되므로, 아마 <하나가타미>도 상연이 금지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황위에 오를 리가 없는' 사람이 황위에 오른다는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몇 세기에 걸쳐 읊어져 오면서 일본인의 천황관을 형성해 온 이야기 모둠이 때가 바뀔 때마다 그 시점에서 지배적이었던 이데올로기에 의해 금지당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만세 일계' '신성 불가침'으로 정의했던 것에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막부 말기에 아시아 나라들을 차례차례 식민지화해오던 구미 제국주의 열강의 압도적인 경제력, 군사력의 배경에는 백인종을 인류의 정점으로 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이 열강과 맞붙을 때는 물질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적 산물인 기독교와도 대적해야만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칙령을 통해 에도시대의 지배적 민간 신앙이었던 구래 신토-불교를 철저히 해체한 뒤, 새로이 천황과 이세 신궁(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신토를 만들어냈습니다. 민중의 신앙심을 토속적인 다양성이 그 특징이었던 구래 신토-불교로부터 거두어들이는 한편, 영적 에너지를 현인신에게 집중시킨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황을 '예수', 이세 신궁을 '바티칸'으로 빗댄 '일본식 일신교'를 설계했습니다.
저는 신토의 근대적 변형에 의한 일본의 전통적 종교 문화의 훼손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일신교 문화에 대항하는 영적인 이야기를 창조해내지 않으면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는 정치적 판단 자체에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와의 불편한 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제가 천황제 지지를 표명하고 난 뒤 허다한 매체가 저를 취재했습니다만, '어째서 우치다는 천황제를 지지하는가' 하고 가장 삼엄한 질문을 던진 것은 개신교 계열 매체였습니다. <아카하타赤旗> 같은 좌익 매체도 저를 취재했었지만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공산주의보다도 기독교가 천황제와 상성이 안 좋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기독교는 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천황제는, 상징인 천황의 희생적 헌신에 의해 국민의 통합이 유지되고, 팔굉에 평화가 찾아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은' 한 사람이 '사私'를 희생물로 바침으로 하여 '공公'을 이룩해내어,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에 존재합니다. 마르크스가 '유적 존재'라고 부른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과 가깝습니다. 일본의 경우 그 '고통 받을 의무'가 개인이 아닌 황실이라는 특정 가계에 세습되고 있습니다.
그걸 '인권 침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정도의 차는 있어도 가업의 세습이 의무화되어 있는 집안은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노가쿠, 일본 무용이나 양조, 어업 등의 분야에서도 그 집안의 자녀는 '가업' 계승 의무로 인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약받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가도 그러하지요. 3~4대 째 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있어 의원이란 피할 길 없는 '가업'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황실과 비교해보면, '사'를 희생시켜 구원해야만 할 '공'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요.
-- 일본은 천황이 예수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수요가 없는 거겠군요.
기독교 인구 비중은 중국이 7%, 한국이 30%입니다만 일본에서는 아무리 해도 1%의 벽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동아시아 유교권 나라들과 비교해 보아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그것은 천황제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고 추리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봅니다. 천황제와 기독교는 스토리 형식이 유사합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제로섬 관계가 된 게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전후의 상징 천황제는 예전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더 가까워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황은 황태자 시절 가정교사로 퀘이커 교도였던 바이닝 부인을 초빙하였고, 미치코 비도 학생 시절 가톨릭 수녀와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게 천황의 본무라는 '상징적 행위'의 아이디어가 기독교의 발상과 가까운 점이 있다고 해도 저는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 천황과 예수는 겉은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양자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천황은 일본의 메시아인 것입니까.
천황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종말'이 도래했을 때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구원하는 존재입니다만, 천황제에서는 그러한 유대-기독교적인,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르는 직선적인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와도 같이, 반복해서 재귀하는 원환적인 시간 가운데 천황제는 존재합니다.
-- '수난 서사'는 상징 천황제에 한하지 않는, 역사적인 천황의 존재 양식에도 통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닌토쿠 천황이 민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서는 민생을 다스리기 위해 조세를 3년 간 면제하고, 그에 따라 극빈 생활을 감내했다는 에피소드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또한 천황의 수난은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였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대 전공투와 토론하였을 때, 쇼와 천황이 도쿄 제국대학 졸업식에서 3시간 동안 미동도 않고 계속 앉아있었더라는 에피소드를 열띠게 강변하였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에 표정 변화도 없이 견디는 쇼와 천황의 의지는 미시마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입니다.
상황도 니이나메사이(新嘗祭; 11월 23일에 天皇가 햇곡식을 천지(天地)의 신에게 바치고 친히 이것을 먹기도 하는 궁중 제사) 때 저녁부터 새벽까지 신카덴(神嘉殿)에서 의식의 수행을 계속하던 중 안면창백하여 기진맥진하였다는 이야기를 궁내청 가쿠부(楽部)의 영인(伶人; 궁중 음악의 연주자) 아베 스에마사 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임무를 다 하기 위해 얼마나 신체적인 고통을 묵묵히 견뎌왔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며 아베 씨는 울먹였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을 견디는 공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국민을 감동시키고, 통합을 이룩케 합니다. 그래서 상황은 생전 퇴위 의사를 표명하며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국사를 수행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의중을 밝힌 게 아닌가 합니다.
-- 쇼와 천황은 맥아더와 면회했을 때, 자신의 신변은 어떻게 처분되어도 좋으니 국민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쇼와 천황은 아마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수난과 맞바꾸어 백성을 구한다는 선택은 아마 쇼와 천황에게 있어서도 천황으로서의 '절박한'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 천황제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천황의 '수난 서사'는 기독교에서 유래된 인권 사상과 모순됩니다. 상황이 생전 퇴위 의향을 표명했을 때도, 내친왕[적출(嫡出) 황녀(皇女)]이 애인과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을 때도, 일부 국민으로부터의 당혹감과 반발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천황이나 황족이 '수난 서사'로부터 이탈하여 인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의 불화는 천황과 인권을 둘러싼 문제의 연장선상이 아닐까요.
확실히 천황제는 인권 개념과는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황족은 나면서부터 '수난받는 입장'을 제도적으로 강요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수난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으로 자기 자신이 떠안는 것이어서, 타인이 강요해도 좋을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는 '인간 제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천황제의 생명선은 황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결연히 받아들인다는 '픽션'에 존재합니다. 현실적으로는 황족 중에서 그 역할에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픽션을 유지할 수 없다면 천황제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협하는' 일입니다. 입헌 민주주의와 상징 천황제의 타협에 대해서는 '오코토바'로 일단 정식화되었습니다. 다음은 유럽식 인권 사상과 천황제를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천황에게 인권은 없다'는 주장도 '황족에게도 100퍼센트의 인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도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상식적인 '타협점'을 찾는 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실제로 '가업을 이어라'라든가 '부모님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대신 이뤄주게' 하는 압력과 '자유로이 살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필사적으로 '타협점'을 찾고 있습니다. 천황은 그러한 사람들의 롤모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미시마 유키오는 쇼와 천황의 '인간 선언'에 대해 '어찌하여 임금께서는 사람이 되셨나이까' (<영령의 소리>) 하고 비판했습니다만, 이 또한 같은 문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품은 이상적 천황상과 현실의 천황 사이에는 항상 엇갈림이 있습니다. 있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현실의 천황보다 자기 뇌 속에서 만들어낸 이상적 천황상을 우선하는 사람들은 결국 '누구보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에서는 '당위적 천황상'을 권위로써 등에 업은 정치가나 군인들이 '황송하옵는 조정에 아뢰옵건대'라는 주문을 소리 높여 외치고, 국민의 사고를 마비시키며, 천황을 들먹여 자신의 욕망을 우회 실현코자 했는데, 이로써 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 그때 천황은 국민의 '위'나 위정자, 군인의 '뒤'에 있었습니다만, 전후의 상징 천황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천황은 국민의 '앞'에서 대화의 상대가 되고 있으며, 국민의 '옆'에서도 또한 함께 걷는 '동반자'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국민의 일이란 무엇보다 상징 천황제를 적절히 기능케 하고, 황족이 될 수 있는 한 자유롭고 유쾌히 살아갈 수 있게 지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월 2일 인터뷰어 스기하라 히사토)
(2022-01-24 15:5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더보기번역가의 변: 天皇(이)라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이것은 제게 상당히 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에서조차 몇 가지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굳이 사실상의 사회적 합의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본 문서의 본래 저술 및 게재 목적은 일본 사회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가깝다고 (제가 멋대로) 판단하였으므로, ‘천황’으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애써 격을 낮춘다고 긍정적인 효과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상대편은 이 문제를 상당히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다는데, 그런 이들로 하여금 대화하게 할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대화 따위는 필요 없는 사안이라고 하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덴노’가 가장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소 전문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일본인 입장에서 이 번역문을 읽는다면 또 어떨까요.
(영미권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합니다만) 으레 그러는 것처럼 〇〇〇〇라는 네 음절로 표기하는 관습을 저는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아직 없는) 특정 시호를 붙이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피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는데요, 위에서 언급한 이유를 근거로 결국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는 현재 天皇에게 속한 신민은 없기에, 경칭은 일부 생략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어의 피동형을, 제 번역 실력으로는 원어 어감 그대로 전할 수 없었다는 점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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