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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들이여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 31. 22:24

    일간 겐다이 설날 호에 실을 ‘사고를 정지하고 있는 중장년 샐러리맨에게 고함’ 이라는 이상한 원고 청탁을 받았기에 이런 걸 썼다.
     
     
    돗토리 현 치즈(智頭)라는 곳에 천연 효모로 빵과 맥주를 만드는 타르마리라는 가게가 있다. 그곳의 와타나베 이타루와 마리코 부부가 어제 고베에 있는 우리집에 놀러왔다. 그때 가장 먼저 나왔던 화젯거리가 ‘일본 남자들은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를 버려버렸느냐’ 하는 탄식이었다.
     
    ‘일본 남자들은...’ 하는 식의 엉성한 일반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면 안되지만, 감히 ‘엉성하게’ 다루는 게 문제의 윤곽을 분명케 하는 때가 가끔 있다. 이런 경우는 방편으로써 감히 ‘잡스런 논법’을 채용한다.
     
    타르마리를 운영하고 있는 두 사람에 의하면, 남자 종업원은 일을 못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곧장 ‘힘들다’고 그만둔다면서, 남아서 제 몫을 할 정도로 성장하는 건 여자들 뿐이라고 탄식하는 걸 들었다. 납득이 가는 바가 있었다.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무도 도장인 가이후칸에는 ‘동아리 활동’이란 게 있다. 스키부, 등산부, 마작 동호회 등이 있다. 속속 새로운 ‘동아리’가 만들어지는데, 요 몇 년 간을 되돌아보면, 기획 및 운영, 참가하는 것은 모두 여성들이다. 승마부, 폭포 수행부, 수학여행부 등 재미난 동아리가 여럿 등장하곤 하는데, 부원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일전에 하구로 산에서 수행하는 도사의 거처에 머물렀을 때도, 모여든 수행자들은 태반이 젊은 여성이었다. <일간 겐다이>를 읽을 만한 분들은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현대의 도사 계통은 젊은 여성들이 지탱하고 있다는 얘기다. 원 세상에나.
     
     
    몇 년 전에 ‘의학부 시험에서 여자 지원자에게만 감점을 한’ 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그건 지필고사 점수 순서대로 뽑게 되면, 여학생이 과반을 점하기 때문에 여자 면접 점수를 깎은 거라는 내부 정보를 의학부 교수한테서 들었다. ‘균등’이라든지 ‘쿼터제’라는 의논을 표면상으로만 들어보면 ‘여자를 우대해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정반대인 것이다. ‘남자를 우대해야 균형이 맞는다’는 게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젠더 문제의 실상인 것이다.
     
    제도적으로 ‘남자를 좀 쳐줬던’ 게 우리 가부장제의 전통이다. 예로부터 남자는 그 진짜 인간적 실력과는 상관없이 ‘포스트’가 주어졌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포스트’는 정형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가장에게는 자녀의 진학이나 취업, 결혼에 관해 결정권이 있었다. 종전의 일본 민법에 따르면 가장의 판단에 따르지 않는 구성원은 의절 당할 리스크가 있었다. 가장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이 그럴싸한 표정을 짓고서, 그럴듯한 말을 하면 가족은 묵묵히 그에게 복종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제도에는 의지할 수 없다. 남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실속과 진짜 실력만으로 가족한테서 존경을 얻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남자는 미안한 말이지만, 극히 소수에 그친다.
     
     
    본지의 기자로부터 받은 원고청탁은 ‘연초를 맞아 사고를 정지하고 있는 중장년 샐러리맨에게 고함’이란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정년까지 일하다가 꽃다발을 받고 물러나서 유유자적한 연금 생활을 보내는 것과 같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인구 감소와 팬데믹, AI에 의한 고용 불안정이 눈앞에 닥쳐있다. 그들은 내일이라도 거리에 나앉을지 모를 리스크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 엄혹한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이,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타조와 같이 사고 정지에 빠져 있다는 게 기자님의 진단이었다.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도 필자에게 묘안이 있을 턱이 없다. 중장년 샐러리맨 모두에게 일단 ‘나는 사고정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병식을 갖게 해줄 수밖에 없다. 병에 걸리는 건 ‘흔한 일’이다. 병에 걸렸으면 치료하면 될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병에 걸렸는데도 ‘병에 안 걸렸다’고 고집하게 되면 얼마 안 가 위기적 사태가 터진다. 문제는 아마도, 중장년 샐러리맨의 많은 수가 ‘자신은 사고정지 따위 안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야 ‘주위 인간들과 똑같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모두가 하는 일’이 ‘정상’이고, ‘모두가 하지 않는 일’이 ‘이상’한 거다. 모두가 사고 정지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고 정지하고 있는 게 ‘보통’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 일본 사회의 진정한 병적 양태인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이를테면 중앙지나 티브이는 머지 않아 그 비즈니스 모델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적지 않은 신문사나 티브이 방송국이 문을 닫을 텐데, 이럴 경우 이제까지 이런 미디어가 맡아왔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그에 대해 입을 다물고서는 말하려 들지 않는다. ‘어째서 우리들은 존재 이유를 잃었는가?’ 하고 자문하는 게 괴로운 작업이란 건 알겠다. 허나, 자기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고 있는 판국에 그것을 보도도, 분석도 않을 정도로 지적으로 허약한 언론은 냉정하게 말해서 존재 이유가 없다.
     
     
    사고 정지로부터 탈출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다. 자신의 발밑을 내다보고, 미래를 내다본다. 그리고, 올바르게 절망하는 것이다. 과감하게 ‘풀이 죽는’ 것이다. 무도를 수련해보면 알 수 있는데, ‘풀이 죽는’다는 것은 자세로서 극히 안정적이고, 유연한 것이다. 아무데도 허세나 경직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바로 대처할 수 있다.
     
    ‘밝음은 멸망의 자세이지만, 사람도 집안도 어두울 때는 아직 멸망하지 않는다’고 다자이 오사무는 <우대신 사네모토>*에 썼다. 어두울 때는 아직 안 망한다. 어쨌든 일본의 남자들에게는 적절한 ‘풀죽음’부터 시작하기를 권한다.
     
    *) <우대신 사네모토>는 1943년 작. - 옮긴이
     
    (2022-01-12 16:5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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