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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 여러분에게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 31. 16:44
오사카 시립 미나미 고등학교라는 학교가 이번년도에 없어진다. 다른 두 시립 고등학교와 통합되어 다른 고등학교가 되는 것이다. 독특한 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이고, 이곳의 국어 선생님이 필자의 연구수업 수강생인 관계로, ‘고별 강연’에 초빙되었다. 그때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 소개받고 온 우치다입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이 배우는 교과서에 제가 쓴 글이 실려 있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인간인지는 알고 계시리라고 봅니다.
이런 장소에 서게 된 건 오랜만입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런 환경은 좀 번거롭습니다. 요즘에는 줄곧 온라인으로 강연을 해왔고, 거기에 익숙해져버렸어요. 자기 방에서 자기 의자에 앉아, 아이패드 스위치를 누르면 바로 접속이 되고, 상대가 10명이든 100명이든 하는 건 똑같습니다. 화면에 뜬 자기 얼굴을 보면서 얘기합니다. 어떤 리액션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데에 서면 반응이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말이 잘 안 먹히면 바로 압니다. 아무도 웃어주지 않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선생님이 이런 장소에 모아놓고 ‘자 얘기를 들어보렴’ 하면 들을 맘이 사라지기 마련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올라와 있는 인물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경계심과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제가 고등학생같았어도 이런 장소에 모여서 강사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 아마 기본적으로는 그다지 마음을 열지 않게 될 거라고 봅니다. 애초에 얘기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하고 나름대로 경계심을 갖고서 듣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디까지 얘기를 진심으로 믿어도 될지 의심하면서 듣습니다. 그런 자세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랍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보다는 이 사람의 말을 얼마나 믿어도 될까, 이야기에 얼마나 진실성이 내포되어 있는가를 음미하며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람의 말을 얼마나 믿어도 좋을까 하는 판단의 ‘기준’을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서 그걸 갖고 판단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 부분은 진짜인 것 같으니 믿어도 좋겠다. 이 얘기는 일단은 믿을 수 없으니 집에서 찾아봐야겠다, 그런 식으로 들어주십시오.
오늘 강연은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기’라는 주제입니다만,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제 들었던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저는 고베에 있는 가이후칸이라는 도장에서 ‘연구수업 학당’이라는 것을 열고 있습니다. 도장이므로 다다미 70 장 정도의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 1인용 책상을 각각 놓고서 매주 화요일 연구수업을 열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 연구수업이 있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스트리밍되므로 도장 참가자는 10명 정도, 온라인이 40명 정도로 전부 60명 정도가 참가했습니다.
2학기 연구수업은 10월 부터 시작했는데,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테마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 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경제나 정치에도 변동이 있지만, 의료도 바뀌고 학교교육도 바뀝니다. 거기에 대해 연구수업 수강생들이 각자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를 고르게 해서 자유로이 발표하고, 모두가 거기에 대해 토론을 합니다. 그런 형식의 연구발표입니다.
저저번주가 첫 회라서 제가 전체적인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어제가 첫 연구발표였습니다. 주제는 중국의 학교 교육이었습니다. 지금 중국의 학교 교육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제 발표자는 대학 선생님입니다. 대학에서 중국어와 중국 사상을 가르치는 분입니다. 중국어를 잘해서 지난 여름 코로나 이후의 중국에 일어나고 있는 학교 교육의 변화에 대한 현지 뉴스를 그대로 보고해주었습니다. 8월 말에 일어난 일입니다만, 일본의 언론은 거의 보도를 안했다고 봅니다. 상당히 엄청난 일이 중국에서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입시 경쟁이 과열되어 있습니다. 어떤 대학을 가느냐에 따라 취직이나 연봉에 커다란 격차가 벌어집니다. 따라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계속 학원에 보냅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자녀들의 부담도 많았습니다. 여기서 정부는 ‘쌍감 정책’이라는 걸 내놓았습니다. ‘쌍감’이라는 것은 ‘두 가지 사항을 줄인다’는 의미입니다.
그중 하나가 학습 시간 감소입니다. 처음에 한 건 숙제 양의 제한입니다. 초등학교 1,2학년은 숙제가 없습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하루 60분에 끝내는 양입니다. 중학생은 90분입니다. 그 이상의 양을 숙제로 내는 게 금지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학원의 비영리화입니다. 학원으로 돈을 벌지 말라는 겁니다. 이로써 초 거대 학원이 휘청휘청 파산했습니다. 학원이나 영어학교가 중국에는 난립하고 있는데요, 정부가 앞으로는 돈을 걷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러면 파산하는데요. 거대 학원은 주식회사이므로,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해외 자본이 학원을 운영하는 일은 이미 금지되었습니다. 해외와 연계되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도 금지입니다. 인터넷 게임에는 시간제한이 걸렸습니다. 자녀들이 인터넷 게임을 해도 되는 때는 금~토요일, 공휴일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입니다.
이런 사항들이 정부의 명령 하나로 실행될 수 있는 게 중국이라는 나라입니다만, 그 때문에 8월 말부터 9월 초에 걸쳐 중국의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이 중국의 정책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연구 수업에서 다같이 생각해봤습니다.
중국은 이제까지 급성장해왔고, 대학 진학률도 50퍼센트에 달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 탓에 자녀들의 몸과 마음에 무리가 갑니다. 게다가 학원이나 해외 프로그램 자체에도 상당한 돈이 듭니다. 이렇게 되면 돈많은 집 자녀는 수험 경쟁에서 유리해집니다. 가난한 집 아이는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 다닐 수 없고, 해외 프로그램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격차가 확대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중국 사람들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패배자는 자기 책임’이라는 와일드한 룰을 채용해왔습니다. 이 부분에 제동이 걸린 겁니다. 부잣집 아이들만에게만 유리한 경쟁은 시키지 않기로 한 겁니다. 이 뉴스를 듣고서 ‘중국은 항상 어마어마하구만’ 하는 식으로 흘려넘겨서는 안됩니다.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거고, 이 현상이 그 징후는 아닐런지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일어난 걸까요.
간단히 말하면 온 국민이 지위와 권력을 앞다퉈 경쟁하며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몰락하여 거리에 내앉아도 그것은 자기책임인데, 그게 당연한 일이자 그것이야말로 공정함이라는 것을 규칙으로 삼음으로써 중국은 이제까지 급성장을 이뤄온 겁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이제 약발이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아이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합니다. 양극화가 대물림되는 것을 막습니다. 우선 아이들을 그다지 공부시키지 않습니다. 일본의 ‘유토리 교육’과 비슷한 것을 하려는 겁니다. ‘지력, 체력, 도덕성, 미의식 육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서, 아이들을 예전처럼 그저 공부만 시키는 게 아니라 신체를 단련시키고,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케 하는 식인데, 인간으로서 전방위적으로 보다 윤택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방침입니다. 공부만 잘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 방향으로 당 중앙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정책을 내놓은 걸까요? 어제 여기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논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게 과열된 입시 경쟁을 방치하면 머잖아 중국의 국력이 쇠퇴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중국 정부가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사실 중국이나 일본이나 꽤 비슷합니다. 하는 게 스케일만 10배 차이가 날 뿐이고, 일어나는 일에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데가 있습니다.
일본이 인구 감소 국면에 들어간 것은 고등학생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일본은 2008년의 1억 2천 8백만 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마 수업 시간에 들으셨을 거라고 보는데요, 보건 당국의 예측으로는 2100년-지금으로부터 80년 후 일본의 인구죠- 고위 추계로는 6800만 명, 저위 추계로는 3800만 명, 중위 추계로는 4850만 명입니다. 아마 무난하게 잡아서 5000만 명 정도가 되는 거죠. 80년 뒤의 일이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일부는 오래 살아 22세기를 맞게 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그때 일본의 인구가 5000만 명으로 줄어든다는 겁니다. 80년 동안 7600만 명이 줄어듭니다. 매년 90만 명입니다. 고령화도 그 뒤를 잇습니다. 2065년에는 고령화율이 38.4%,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사회가 됩니다. 그런 시대를 지나 일본의 총 인구가 5000만 명이 되는 사회를 맞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학교로 진학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실 텐데요, 그걸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일본은 앞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단기간에 이런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경험한 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인구 감소 국면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성공 사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시대’에 여러분은 돌입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엄청난 일에 대해 아무도 진지하게 의논하지 않는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의논을 안하는 겁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고, 현상이 어떤가를 조사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정책을 세우기 위한 센터가 지금 일본 정부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기관이 없는 겁니다. 확실히 ‘저출생 대책’같은 건 있습니다. 곤카쓰*를 지원한다든가 유치원을 늘린다든가, 무상 교육을 하는 식의 정책은 펴고 있는데요, 인구 감소라는 것은 그런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어떻게 풀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 婚活. 결혼도 입시나 취업처럼 적극적으로 임해야 성공한다는 의식 하에 행해지는 일련의 활동 – 옮긴이)
인구 감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선 확실히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산업, 교육, 의료의 변화 양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겁니다, 하고 국민에게 발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구 감소의 향방에 대해서는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을 법합니다. 그 시나리오 가운데 어떤 게 가장 바람직할지에 대해 전 국민이 논의하고서, 합의를 얻어두는 일이 필요합니다. 일본 열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 국민적인 의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언론은 요식 행위로써 인구 문제에 관해 가끔 보도합니다만, 심층 분석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해본 적 없는 문제니까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쩌면 좋을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앞에 두고서 행해야 마땅한 정책을 세울 구상력이 없는 겁니다. 현대 일본 지도층은 그걸 생각해 볼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웃 나라 한국도 이미 2년 전인 2019년에 인구가 정점에 다다라 앞으로 급격한 인구감소와 고령화 국면에 들어갑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등 고령화 사회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중국입니다. 어째서 중국 정부의 교육 정책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방향타를 틀게 되었을까요. 이 또한 인구 감소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합니다. 중국은 6년 후인 2027년에 14억 명을 정점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연간 500만 명의 기세로 인구가 줄어듭니다. 생산 가능 연령 인구인 15세부터 65세 사람들이 2040년까지 1억 명 줄어드는 한편, 65세 이상 인구가 3억 250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중국은 2015년까지 ‘한 자녀 정책’을 실행해 왔으므로, 인구 구성이 굉장히 뒤틀려 있습니다. 성비도 균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외동인데 배우자가 없는 사람의 경우 부모님이 죽으면 아내도 자식도 형제자매도 없는 천애고독한 몸이 됩니다. 이제까지는 이런 경우에 대비한 안전망으로써의 친족 네트워크가 있었습니다. 생활이 곤란해지면 친족에게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자녀 정책과 인구 감소로 그 친족 네트워크가 성립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에는 일본 같은 사회보장 제도가 없습니다. 이를 단기간에 내놓지 못하면 고령화에 대처가 불가능합니다.
이제까지 급증해왔던 인구로부터 윤택한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제공받아왔던 중국이므로, 이 경제 성장의 엔진이었던 ‘일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조건을 앞으로 잃어버리게 됩니다. 2027년부터 사달이 나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중국이 국력을 유지코자 한다면, 자녀들을 과도한 경쟁에 던져놓고서 살아남은 자에게만 모든 것을 몰아주고, 패배한 자들은 제거하는 구조에 맡기는 엄혹한 선발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됐든 주위에 있는 학생 모두에게 동등한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한 명 한 명의 퍼포먼스를 올리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습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놓치지 않고 짜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지필고사 점수만으로 학생들을 선별하는 것같이 비효율적인 일이 없습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과거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지필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들을 등용해 권력의 중추에 앉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엄청난 인문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그 이외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 글자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도 탓에 청나라에 이르러 국력을 잃고 망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중국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국민이 균등한 학교 교육을 받게끔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요근래 다시 지필고사로 승자에게 권력과 부를 집중시키는 예전의 과거 같은 시스템이 부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그것을 억제하고 전 국민이 각자의 다양한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끔 궤도 수정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정부는 14억 명의 국민을 통치해야만 하는 입장입니다만, 이는 19세기 말 세계 인구와 같은 수치입니다. 이런 숫자의 국민을 떠안은 정치 체제를 통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상부도 필사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IQ가 높은 사람들이 통치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중국은 때때로 폭주합니다만, 조잔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할 때는 거대한 스케일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교육 개혁도 거시적인 견지에서 수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상당히 처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은 중국보다 십 년 일찍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는데도 지난 십년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인구 감소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문화적인 자원을 이제까지와 같이 엘리트에 집중하는 게 아닌, 될 수 있는 한 많은 국민에게 찬스를 부여하고자 하는 정책을 시행하려는 것으로 제게는 보입니다. 확실히 젊은 사람의 수가 이렇게까지 격감하는 사태 가운데 국력을 유지하려면 모든 젊은 사람들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시스템을 궁리하는 쪽이, 지필고사상 상위권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시스템보다도 유효합니다. 일본에서도 앞으로 이런 일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합니다.
일본에는 앞으로 경제성장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30년 동안도 안 그랬는데, 앞으로도 안합니다. 오히려 경제 규모는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일본은 42년에 걸쳐 GDP 순위에서 미국 다음인 세계 제 2위였습니다. 지금도 3위입니다만, 1인당 GDP는 24위까지 떨어졌습니다. 시가총액 세계 순위에서도 2000년까지는 상위 30개 가운데 21개 기업이 일본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없습니다. 21개 기업은 미국 회사입니다. 중국, 한국, 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점하는 비율이 16퍼센트였습니다만, 지금은 6퍼센트입니다. 일본만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가 덮쳤습니다. 이게 학생 제군이 직면한 현실입니다.
그런 전대미문의 상황에 일본 사회는 처해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앞으로 어떠한 기술이나 능력을 익힐까, 어떠한 진학 계획을 고를까, 어떤 곳에 취업할까를 고민할 적에, 이제까지 했던 대로 아버지 어머니, 학교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난 뒤 ‘이렇게 하면 좋다’는 과거의 성공 체험에 따르면 좋았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갖고 있는 진학관이나 취업관에 관한 지식은 앞으로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진로 상담을 할 적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게 오히려 성실한 태도가 아니겠나 합니다. 이 자격증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산다든가, 여기에서 일하면 마음 푹 놓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건 앞으로 어지간히 단언 못하게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자녀들에게는 ‘너 좋을대로 하렴’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봅니다. 격동기이므로, 어떤 직업에 취직해야 ‘평생 먹고 살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예측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전해 보여서’라는 기준으로 진로를 정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먹고 살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으니’라는 식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생계가 곤란해지더라도 아무도 유감 갖는 일 없이 마무리지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금은 정보를 말씀드려야 하겠기에,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앞으로 어떤 직업이 사라져갈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인 리서치를 종종 실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것은 2020년에 세계 경제 포럼이 실시한 바 있는 ‘향후 5년 간 직업 구성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조사 보고입니다. 이것은 아직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기 전의 이야기로서, 직업 구성 변동의 주된 요인은 AI입니다. AI 도입과 로봇화로 얼마나 일자리가 없어질까 하는 게 골자입니다. 고용 소실에 대해 제가 본 가장 낙관적인 숫자는 14%, 가장 비관적인 숫자는 52%였습니다.
업종별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얼마만큼 고용이 사라질 것인가. 가장 큰 것은 금융 부문입니다. 20퍼센트입니다. 제조업이 19퍼센트. 한편 AI화가 진행됨에도 고용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 분야가 있습니다. AI나 로봇으로는 대체 불가한 맨몸의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료 간호, 그리고 교육입니다. 의료과 교육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부분입니다만, 이 근간 부분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더, AI로는 대체효과가 그다지 없는 게 행정입니다. 의료, 교육, 행정. 앞으로 사회는 점차 바뀌어나갈 것인데, 이 세 분야에 대해서는 고용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는 게 미국에서의 통계 결과입니다.
2012년에, 코로나 훨씬 전인데요, 미국 노동통계국이라는 곳에서, 앞으로 고용이 확대될 분야는 어디일까 하는 조사를 했었습니다. 1위가 간호사입니다. 놀랍게도 이 조사에서는 상위 30위 가운데 7개가 의료 관련입니다.
이는 미국 얘기입니다만, 일본은 많은 점에서 미국 사회를 모방하고 있으므로 일본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의료는 신체만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도 상대합니다. 의료 종사자에게는 환자의 자가 치유 능력이 최대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중요한 임무입니다만, 환자의 마음을 ‘낫게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따르는 작업은 기계로는 대행 불가능합니다.
제 친구 중에 의료경제학자**가 있는데요, 미국에서 25년 일하고 나서 최근 귀국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지방 도시의 경우 그 지역 고용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분야가 행정, 의료, 교육인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주 정부가 있고, 커다란 종합병원이 있으며, 그리고 대학이 있습니다. 행정 기관에는 엄청난 수의 공무원이 고용되어 있습니다. 병원 주위에는 의료종사자, 직원, 환자, 의료품이나 의료기기를 납품하는 업자와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대학에는 교직원과 학생이 있고, 자취방이 있으며, 서점이 있고, 식당과 카페, 라이브 하우스가 있습니다. 행정, 의료, 교육이라는 세 가지 활동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경제 활동이 영위되고, 거기서 고용이 발생합니다. 세 가지 분야 모두 돈을 많이 벌 만한 사업은 아니고, 환경 부담도 적습니다. 그런 것들이 향후 경제 활동의 축이 되고, 고용의 축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일본을 살리기 위한 ‘플랜 B’: 의료경제학자가 제언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유병광 저)
AI 도입에 따라 사라질 고용분야 가운데, 지금 가장 큰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게 운전사입니다. 자동차가 자율운전 체제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미국에는 트럭과 버스 운전사가 300만 명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율운전으로 전환되면 직업을 잃습니다. 마차가 기관차, 자동차로 바뀌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 그 이전 테크놀로지로 먹고 살던 사람들은 직업을 잃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기관차나 자동차로 바뀔 때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이직을 고려할 수 있었습니다. 승마용품 가게나 피혁 가게로 비즈니스를 바꿀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율운전으로의 전환은 엄청나게 짧은 시간동안 대량으로 고용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를 두고 ‘AI가 도입되고 나면 일거리를 잃는 직종에 취업한 본인의 자기책임이므로, 정부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가면 안됩니다. 규모가 너무 크니까요. 이 대량 실업자를 연방정부, 주정부는 생활지원하고, 재교육하고, 재고용의 길을 보장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한 의논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앞으로 생산 가능 연령 인구가 늘어나는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일본이나 중국같이 인구 감소 리스크에 직면할 우려가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 미국조차 테크놀로지 진화와 연관된 고용환경 변화에 대해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놓고 대응책을 생각해두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인구 감소에 대처하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영어탐구과이므로 영어에 힘을 실은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학생 제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시 공부가 아닙니다. 정보 수집입니다. 고등학생에게 유익하고도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 상에 널려있습니다. 여러분은 보통 고등학생보다 영어권 정보를 접하기 쉬운 입장에 있으며, 그것을 소화해 내 설명할 수 있는 스킬을 익혔을 겁니다. 그럼 그걸 활용해주기를 바랍니다. 일본 언론만 봐서는, 일본이나 전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영어과 여러분, 뉴욕 타임스 인터넷판을 부디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월 2천 엔 정도입니다. 고등학생에게는 무리일까요(웃음). 하지만 낼 돈이 없다 하더라도 뉴욕 타임스 공식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해 두면 그것만큼은 읽을 수 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만 읽어두면 지금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생 제군이 지금 당장 직면하고 있는 것은 입시와 취업입니다.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 결정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싶냐입니다. 어떤 학과에 가면 장래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동기로 전공을 골라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갖고 있는 잠재능력을 100%까지 낼 수 없습니다. 100이 상한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잠재능력의 150% 아니 200%까지 내려고만 하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침식을 잊고서 열중합니다. 재밌어서 미칠 것 같을 때, 그 사람의 잠재능력이 폭발적으로 발휘됩니다.
방금 전 일본의 장래가 비관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것을 V자 반등시킬 가능성을 학생 여러분은 갖고있습니다. 제군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100의 기대치를 150이나 200으로 놓아주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일본의 부활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능력을 100까지 내는 사람조차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 학교에도 ‘이지메’가 있을 겁니다만,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반 친구는 앞으로 사회를 함께 지탱해 나갈 소중한 파트너인 겁니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를 능력을 갉아먹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요. 괴롭혀서 살아갈 기력을 잃게 한다든가, 학교에 나오지 않게 하는 일은 동년배 전체에게 있어서 손해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동료와 살아나가며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하고, 이긴자가 ‘독식’하며, 패배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한 신자유주의적인 사고와 ‘이지메’는 궁합이 잘 맞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중요하니까, 경쟁 상대인 동 세대 전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든가, 살아갈 의욕을 잃게 만든다든가 해버리면 경쟁에서 이길 찬스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선시되는 사회는 점차 집단으로서 살아갈 힘을 잃어갑니다.
하지만 학생 제군이 앞으로 맞이할 시대는 정말로 엄혹한 시대입니다. 서로 발목을 잡으며 경쟁 따위를 하면 모두 넘어집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재능을 갖고있는가, 어떤 자질이 있는가, 아직 발휘 못한 힘은 무엇인가, 그것을 발굴해내어 어떻게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일,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집단으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우리들이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사람들과 컬래버레이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년배 친구들이 중요합니다. 그저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함께 팀을 짜서, 공동 작업으로 서로 갖고 있는 것의 100을 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가치 창조적인 작업 방식을 앞으로는 꼭 해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동료를 보고서, 자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이 기분 좋게 일할 수 있게 할까, 속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지원해줄 수 있을까, 그것을 여러분 세대는 우선 생각해내야만 합니다.
저희 세대는 경쟁적인 환경에 있었습니다. 남을 밀어내서 출세하는 것이 장려되었습니다. 뭐 어쨌든 젊은이가 넘쳐났고 계속 경제 성장을 했으므로,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식의 와일드한 경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이 다릅니다. 환경이 달라진 이상 생존 전략도 바뀝니다. 국민 모두가 경쟁을 해서 국력이 상승하는 시기가 있는 한편, 그렇게 해서 나라가 망하는 시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동세대 간에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며 넘어뜨리면 전멸하는 환경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전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에서 공생으로 머리를 전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좀 더 이기적이어도 됩니다. 어떻게 자기 이익을 최대화시킬까를 생각해보면, 주위 사람과 함께 협력하여, 집단 전체의 퍼포먼스를 올리는 것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학급 붕괴’라는 이상한 사태가 예전에는 있었습니다만, 그건 경쟁적인 마인드가 가져다준 겁니다. 전원이 동 학령 집단 내부에서의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는 경쟁에서 자신만이 살아남는다면, 학급붕괴하는 게 필연적인 겁니다. 최소한의 학습 노력으로 경쟁에 이기려고 들면 주위 반 친구들의 학습을 방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업 중에 걸어다니고, 떠들고, 이지메를 하고, 교사의 수업을 방해하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냅니다. 확실히 주위 사람들의 학습을 방해하면 자신의 상대적인 포지션은 조금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단 전체로서의 학력은 내려갑니다. 연대감도 사라지고, 컬래버레이트할 의욕도 잃습니다.
경쟁을 시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활동적으로 되고, 그 결과 집단 전체의 힘이 올라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사회가 풍족해서 나눠 가질 자원이 윤택했던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런 시대는 없습니다. 역사적 환경이 바뀌면, 사는 방식도 바뀝니다. 앞으로는 경쟁에서 공생으로, 사는 방식을 바꿔야만 합니다. 도덕 운운하려고 제가 지금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일본은 아직 풍요롭습니다. 열대 몬순의 비옥한 토지가 펼쳐져 있고, 물맛도 좋고, 생태계도 다종다양하며, 공기도 맑습니다. 자연 환경이 굉장히 좋습니다. 치안도 좋고, 사회적 인프라도 충실히 갖춰져 있으며, 교육이나 의료도 양질의 것일 뿐만 아니라 충실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민 자원을 앞으로 소중히 잘 활용하여, 다같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아, 서로 북돋아준다면 일본의 국력을 V자 회복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뭐든지 하기 나름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을 계속한다면 국력은 쇠퇴해갈 뿐입니다. 머리를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찌하면 자신의 잠재능력을 꽃피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퍼포먼스를 최대화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자기 머리가 더 좋아질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겁니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은 시험 성적이 오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머리가 활동적인지의 여부입니다. 자신의 머리가 활동적으로 돌아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지성이 꿈틀꿈틀 활동하는 일을 막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방해를 해제하는 일, 그것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무도 도장을 하고 있으므로 잘 알고 있는데, 기술을 가르쳐도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운동 능력이 낮다’는 식으로 말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근육을 만들라느니, 달리기를 하라느니 해도 기술이 잘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움직임을 막습니다. 기술이 걸리지 않는 것은 상대가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이기려고 드는 경쟁적인 마음이 신체 능력의 자유로운 발현을 방해합니다. 필요한 것은, 자연스레, 무럭무럭, 기분 좋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움직임, 자신에게 있어서 쾌적한 움직임, 그것이 올바른 움직입니다.
뇌도 똑같습니다. 뇌를 어떻게 써야 지적인 퍼포먼스가 올라가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은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하고 궁리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학생 제군에게 있어 최우선시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머리를 좋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지적 퍼포먼스가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다지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간단한 겁니다. 어떤 걸 하면 지적 퍼포먼스가 올라가고, 어떤 걸 하면 내려갑니다. 그래서 올라갈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화낸다든가, 슬퍼한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질투하게 되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살고 심호흡을 하며, 잘 자고 잘 먹으면 차차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는 상태가 되는데 바로 이때가 ‘머리가 좋은’ 때입니다. 주변 상황과는 관계 없습니다. 승패나 우열과는 상관 없습니다.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그 방법은 각자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학생 여러분을 보며 안타까운 건,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저는 1970년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해 국립 대학의 수업료는 연간 1만 2천 엔이었습니다. 월 천 엔입니다. 입학금이 4천 엔이었으므로, 입학금과 한 학기 수업료인 1만 엔으로 대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화폐가치가 꽤 다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했던 학원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 엔이었습니다. 2시간 일하면 한 달치 등록금을 냅니다. 1만 엔 정도는 고등학생이라면 갖고 있었습니다. 세뱃돈을 저축해두면 그정도는 됩니다. 그래서 진학할 적에,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부모님이 반대해도 ‘학비는 제가 내는 거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원치 않은 입학’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국공립 대학에 간다면 가고 싶은 대학을 자기가 고르게 됩니다. 근데 말이죠, 이건 진짜인데요, 일본 대학의 학술적인 영향력이 그때 최고였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부모님이나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고 말하고서 대학에 간 것이므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섭니다. 자기가 한 대학 선택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매일 싱글벙글 기쁜 표정으로 통학하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그런 학교 가서 뭣에 써먹으려고?’라는 식으로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 되갚음할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도 부모님에 의해 무리하게 대학이 정해지면 부모님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집니다. 불쾌한 듯 학교를 다니고, 공부도 똑바로 안하며, 대학에 사년 간 다녔음에도 ‘돈낭비 했다’고 부모님이 여기게끔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입니다. 근데 부모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녀가 일부러 불행해져서 증명한다는 건 참으로 아까운 인생살이입니다.
학생 제군의 인생에는 그럴 짬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앙갚음하는 인생이라니,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할 여유가 제군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자신의 잠재능력을 꽃피울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머리를 활동적으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위로 눈을 돌려서 어떻게 이웃한 사람이 좀 더 기분이 좋아질까, 좀 더 활동적으로 될 수 있을까, 좀 더 창조적으로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다지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가장 간단히 할 수 있는 건 친절해지는 겁니다. ‘옆 사람에게 친절하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간단하지요. 하지만, 간단함에도, 되게 쓸모가 있는 겁니다. 불안해하면 ‘괜찮아’라며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너에게는 재능이 있으니까’ 하고 격려해줍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집단적인 퍼포먼스가 향상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최악의 시대는 아닌거예요. 서로 격려해주고 협력하며 살아나가면 되니까요. 비관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일본 사회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올바른 삶의 방식’의 정답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살아가고 싶어지게끔 세상을 살아가면 됩니다. 남 흉내를 낸다든가, 남의 명령을 받는다든가, 세평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주위 친구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지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 세대 전체의 능력이 올라갑니다. 그것이 제군에게 주어진 세대적 미션입니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1-12 16:4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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