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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의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 21. 09:10
마이니치신문에 연두 장편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인터뷰어는 요시이 리키 기자였습니다.
- ‘선택과 집중’은 한정된 사람과 돈의 사용방법을 음미하여, 보다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나 부문에 많이 몰아주는 게 효과적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본지에서는 1993년 5월 거대 섬유 회사 사장을 인터뷰한 기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래로 약 30년 간, 1400 건을 넘는 기사에서 이것이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를 ‘내친다’니 어떤 말씀이십니까.
‘파이’가 컸을 적에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의 연구비 또한 많이 나왔습니다. 저같은 인문학 연구자에게 나오는 연구비는 자연과학계의 그것에 비하면 극히 적으므로,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예산이 나왔습니다. 분배 비중 같은 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상향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파이’가 줄어들기 시작한 순간 사람들이 ‘파이 분배 방도’를 집요하게 논하게 되었습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때입니다. 분배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제도의 무임승차자를 색출해낸다, 자원은 사회적 생산성과 유용성을 고려해 차등 배분해야 한다는 식의 ‘추잡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 하지만 일견 합리적으로도 보이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생산성과 유용성에 기반한 지원의 차등 분배에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어떤 연구에 장래적인 가능성이 있는가는 사실 예측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째서 이 연구가 유망한가’를 설명하기 위한 서류 작성이나 프리젠테이션에 소비되는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파이의 제 몫’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 교육을 위한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산 규모가 큰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국책’ 사업 선정 여부에 쫓긴 나머지 정말 중요한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되는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 확실히 문과 연구자들도 그렇게 얘기하고는 했습니다. 연구보다도 성과를 과대포장하는 서류작성에 들어가는 시간이 더 할애된다고 한숨짓습니다.
하지만 낭비를 근절하고자 성공하는 프로젝트에만 자원을 집중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1등 하는 마권만 사는 행위’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다.
여느 분야나 마찬가지인데, 어떤 연구가 무위로 돌아가는지, 무엇이 ‘대성’하는지는 사전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낭비를 없앤다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작금의 연구자들은 자기 연구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엄청난 양의 작업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어떠한 가치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 그렇군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파이가 축소되어 있습니다. 분배할 수 있는 돈도 점점 적어지고 있는데요.
어쨌든 자그마한 자금이나마 남김 없이 골고루 나눠주는 게 ‘쓸모 있는 연구’에만 자원을 집중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들이는 것보다 결과적으로는 훨씬 비용 대비 효과가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택과 집중’이란 건, 한마디로 파이가 줄어들었을 때에는 누가 낭비를 자행하고 있는지를 색출해내고서는 누구의 몫을 줄일 것인가를 정하자는 겁니다.
심사나 평가라는 건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창출해내지 않는 전형적인 ‘불쉿 잡’입니다.
지금 일본의 국력이 점점 쇠잔해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몫을 어떻게 감쇠시킬 것인가에만 열중한 나머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있기 때문입니다.
학술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정치나 경제도 사정은 같습니다. ‘승자 독식’이라는 게임을 30년 동안 해오다 보니 모든 영역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하는 사람’만이 출세하고, ‘누구도 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은 홀대받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만한 혁신이 나오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에게야말로 꼭 지원을 해야 하는 데도 그것을 제도적으로 게을리 해 왔습니다.
따라서 과학 기술상의 혁신이나 새로운 국제적 식견이 일본에서 생겨나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 일본 사회는 그런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택과 집중’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가에 대해 언론이 현상을 정확히 보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말씀대로입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놈의 바보 같은 평가와 심사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쓸모 없는 일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귀국한 친구한테서 들은 얘기인데요, 미국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자연과학계 유학생의 60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열심히 공부한다고 합니다.
- 무슨 말씀이실까요.
미국 대학이나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따 일본으로 귀국해도 여성 연구자에게는 능력에 걸맞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취직자리를 찾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수한 여성 연구자가 미국으로 점점 유출되고 있습니다. 우수한 사람이 도망치게 되는 시스템을 일본 사회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연구환경 역시 일본보다 대만 같은 데가 잘되어 있습니다. 조건만 좋으면 해외 연구 기관으로 옮아가겠다는 연구자가 앞으로도 늘어나겠지요.
어찌하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여성 연구자를 일본에 끌어들일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제발 일본으로 돌아와주십시오. 극진히 모시겠습니다’라는 신호를 일본은 대학도 기업도 발하지 않습니다.
- 그럼 해외에서 일본으로 우수한 인재가 유입되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만큼 연구 환경이 열화되어 있는 국면에서는 해외에서 뛰어난 연구자가 도래할 리 없습니다.
미국이 세계 학술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에서 인재가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과학기술이나 예술계의 혁신을 맡고 있습니다.
- 미국의 CNN이 2019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이 이민자 출신이라고 합니다. 한편 일본은 이민에 부정적인데, 21년 12월 21일 무사시노 시에서 재류 외국인에게도 주민 투표권을 주려던 조례안이 부결된 일이 해외에서도 뉴스거리가 될 정도입니다.
맞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의미에서 ‘인재 쟁탈전’이 일어납니다. 생산 가능 인구가 앞으로 급감하는 건 중국이나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력을 확보하고, 시장 규모를 유지하려면 해외에서 사람을 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학술적 혁신을 담당할 수 있는 재사를 해외로부터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 자신의 인권을 확보해줄 나라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있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일 제도를 정비해 두면,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중에서 탁월한 혁신가가 나와서 일본의 장래를 견인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본은 치안도 좋고, 사회적 인프라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고, 자연도 아름답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외국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라는 평가를 얻어두면, 설령 급여가 다소 적더라도 해외에서 우수한 인재가 찾아와 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무사시노 시의 조례안이 부결된 후에 여야당의 정치가들이 ‘안심했다’ ‘시민의 양식을 보여준 결과’라는 등의 발언을 해버렸습니다. 이는 외국 사람에게 ‘일본은 당신네들을 환대할 맘이 없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과 같습니다.
- 그런 정치가들에게 찬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 정치가의 속셈은 자기 자신의 선거만을 생각하자면 이왕 유권자를 곧장 만족시킬 말을 해두는 게 유리하다는 거겠지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선거에 이기면 국력이야 약해지든 말든 상관 없다’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생산가능 연령대가 급감하고 있는 국면을 맞고 있는 일본은 해외로부터 인력의 안정적 수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치가는 인정하지도 않고, 언론 또한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런 총체적 난국 가운데 ‘일본은 외국인을 혐오한다’고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보이는 정치 감각 부족에 경악하게 됩니다.
- 안팎으로 ‘못살게 구는 나라’가 되어간다는 인상입니다.
저번 가을의 중의원 선거에서 ‘의원과 공무원의 삭감’이라는 ‘고육지책 개혁’을 주장하며 행정비용의 삭감을 호소한 일본유신의 회가 간사이 지방에서 약진했습니다.
행정 비용의 삭감은 단적으로 말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그것은 머잖아 시민에게 제공되는 행정 서비스의 질적 저하로 귀결됩니다. 자신이 ‘피해를 입는’ 측에 있는데도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연초부터 경치는 인터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언론은 그저 안이하게 ‘그럼 해결책은 뭡니까’ 하는 식으로 끝내게 마련인데요, 아무튼 해결책은 스스로 마련해야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우선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어리석은 정책을 멈출 것이 요구됩니다. 평가와 심사라는 불쉿 잡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들이는 일을 그만둡시다. 그럴 짬이 있으면 발 밑의 빈 캔을 하나라도 더 줍는 게 낫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사람도 집안도 어두울 때는 아직 망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에는 아마 아직은 괜찮습니다.
(2022-01-04 08:0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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