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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타키 에이이치 씨를 추모하며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 13. 22:11

    오타키 에이이치 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항상 살아있어 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실감’이라는 말로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충분히 전할 수 없다. 그래서 추도문 원고 청탁을 받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오타키 씨에 대한 글을 자주 써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글을 오타키 씨가 읽어준다’는 전제 하에 쓰여진 것이다. 오타키 씨에 대해 내가 썼던 글은 전부 오타키 씨를 상정 독자로 하여 쓰여졌다. 오타키 씨에 대해 잘 모르시는 독자층을 대상으로 오타키 씨를 소개하는 문장을 쓸 때도 ‘오타키 씨는 이 글을 읽어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얼빠진 글은 쓰지 않는다’는 긴장감이 항상 있었다.

     

    나는 자신에 대해 쓰여진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 딱히 의도하여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 자체를 안 쓰는 것뿐이지만, 오타키 씨는 자신에 대해 쓰여진 글을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 예전에 ‘신춘 방담’ 라디오에서 야마시타 다쓰로 씨도 언급했었는데, 오타키 씨는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1분 이내 정도로 메일을 보내는 사람인 것이다. 그때 야마시타 씨가 ‘대체 언제 주무시나요?’ 하고 질린 듯이 탄식하였지만, 사실이 그렇다. 오타키 에이이치 씨는 우리들 “나이아가라(뮤지션 오타키 에이이치의 팬클럽 이름 - 옮긴이)”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디에나 있는 눈동자’였던 것이다.

     

    무슨 허풍을 그렇게 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렇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개인적 경험을 꼽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굳게 믿게 된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오타키 씨는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 앞에서 ‘신’이 사라진다는 게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그것을 ‘상실감’이라든가 ‘허탈감’으로 부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지금 나는 오타키 씨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쓰는 ‘오타키 씨에 관해 내가 쓴 글이자, 오타키 씨가 이제 더 이상 결코 읽어주지 않는 문장’인 것이다.

     

    오타키 씨는 ‘이곳 저곳을 잘 살피는 사람’이었다. 우선 우리들 ‘나이아가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항상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들은 근거도 없이 굳게 믿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병이 오타키 씨를 저세상으로 납치해 가버렸다.

     

    우리들은 ‘어디에나 있는 눈동자’를 잃었다. 몇 가지 영역(우선 미국 팝 음악과 일본 영화, 그리고 물론 그 밖의 다른 많은 영역)에 대해 현대 일본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감식안’을 잃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세상의 시비를 판단하면 좋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일본 국내에 수천 명 규모로 존재한다.

     

    내가 오타키 에이이치 씨의 음악을 처음 듣게 된 것은 1976년 봄이었다. 노자와 온천에 학생들끼리 스키 여행을 갔을 때 마작이나 쳐 볼까 하는데, 한 사람이 스테레오를 꺼내와서 ‘마작에는 오타키 에이이치가 제맛이지’라고 선언하고서 <즐거운 밤샘>을 틀었다. 이게 내 처음 ‘오타키 에이이치 경험’이었다. 그 전에도 심야 방송 라디오에서 핫피엔도는 몇 번이나 들었을 터이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앨범에 핫피엔도가 세션으로 참가한 카세트 테이프를 형이 갖고 있어서 차 안에서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는 <나이아가라 문>과 같은 충격을 받지 못했다. 아마 음악 그 자체보다도 나는 그가 가진 비평성의 날카로움과 깊음에 반응한 것이라고 본다.

     

    <나이아가라 문>에 수록된 넘버는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서 오타키 씨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었을 적에, 그야말로 들이붓듯이 들었던 미국 팝 음악을 내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카피가 아닐 뿐더러 패러디도 아니다. 팽대한 음악적 기억이 오타키 에이이치라는 개인의 신체를 통과해 스며나온 무언가였다.

     

    혹은 ‘우타마쿠라歌枕’라는 문학적 현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옛 시인들은 명승지나 뜻깊은 장소를 지나갈 때, 거기서 한 수 읊는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장소에서 읊어진 시가 축적된다. 그래서 가장 나중에 온 시인은 거기에서 그때까지 읽힌 모든 선행 작품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시를 읊게 된다. 자신의 독창적인 일절을 ‘우타마쿠라’에 두고서, 다음에 오는 시인에게 맡긴다. 그렇게 해서 선행 세대에 대한 경의와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까마득할 정도로 긴 시의 역사라는 연쇄 한가운데에서, 선행자로부터 받은 것에 자신의 재능을 더해 후계자에게 넘긴다. 음악이란 그러한 ‘패스 워크’라는 자각을 오타키 씨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1976년의 시점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오타키 씨의 음악에 이 정도까지 강하게 이끌렸는가에 대한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하였다. 아무튼 좀 더 듣고 싶었다. 우선 스키장에서 돌아오고 난 뒤 바로 <나이아가라 문>을 샀다. 나중에는 신보가 나오는 즉시 음반점으로 달려갔고, 집에서 닳아 떨어질 정도로 들었다. 라디오간토에서 오타키 씨가 DJ로 있던 프로그램 ‘Go! Go! Niagara’를 방송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매주 심야 라디오 앞에서 꼼짝 않고 빠져들었다.

     

    당시 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오타키 씨가 트는 음악도, 거기에서 언급되는 아티스트 이름도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위한 방송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왠지 깊은 확신이 있었다. 오타키 씨는 나(와 함께 수 명의 ‘선택받은 리스너’)를 위해 이 방송을 하고 있다는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오타키 씨로부터 ‘이 음악을 사랑하고, 이 음악에 관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리스너가 되도록 하시오’라는 분명한 교화적 메시지를 나는 받아들였다.

     

    야마시타 다쓰로 씨와의 ‘신춘 방담’, NHK FM에서의 DJ ‘일본 팝 전기’, ‘미국 팝 전기’. ‘스피치 벌룬’ 등의 간헐적으로 행해지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놓고 운전을 하며 사반 세기 동안 끊임없이 들어왔다. 들었던 시간을 합치면 아마 수천 시간에 달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시간 수로 치면, 과거 사람과 동시대 사람을 포함해, 오타키 씨를 뛰어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에 들어온 말은 눈으로 읽는 문자와는 달라서, 신체에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계기가 되면 오타키 씨가 라디오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말투’로 자신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이나 논리의 성립 방식, 어떤 종류의 해학이 갖고 있는 형식에는 40년 간 계속 들어온 오타키 에이이치 씨의 ‘보이스’가 켜켜이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어지간히 혈육화되고 만 거라서, 나로서는 어디부터가 자신의 것이고 어디부터가 오타키 씨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가 없다).

     

    오타키 씨로부터 받은 영향의 거의 대부분은 라디오 음성을 빌린 것이다. 내게 있어서 오타키 씨는 음악가 이전에 DJ인 것이다(유작이 된 ‘미국 팝 전기’에서, ‘로큰롤 시대는 스타 DJ의 시대이기도 하였습니다’ 라고 말했던 오타키 씨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감상적으로 들렸던 것은, 오타키 씨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역사적 혁명을 끝내고 무대에서 사라져가는 DJ’에 겹쳐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2005년 여름이었다. 그 전해에 ‘유레카’에서 ‘핫피엔도 특집’이 기획되었다. 그때 멤버 4명 각 개인마다 롱 인터뷰를 하기로 했었고, 나를 오타키 씨의 인터뷰어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떨릴 정도로 기쁜 제안이었지만 오타키 씨 측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그래서 롱 인터뷰 대신에 ‘오타키 에이이치의 계보학’이라는 장문의 오타키 에이이치론을 기고하게 되었다. 그 글에서 나는 라디오 방송에 등장한 오타키 씨가 말한 것(누구도 활자화하지 않았으므로 방송과 동시에 사라질 터였을 음성)을 인용하여, 오타키 씨의 음악 이론을 개괄해 보았다.

     

    CD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대부분 라디오에서 들었던 오타키 씨의 언행만을 소재로 삼아 써내려간 내 스타일이 아마 오타키 씨 마음 속 어딘가에 꽂혔던 바가 있었는지, 다음에 같은 담당편집자가 ‘문예’에서 오타키 에이이치 특집을 기획하며 한 번 더 롱 인터뷰 상대로 나를 내세웠는데, 그때는 오타키 씨도 OK 하였다. 그게 20058월 일이었다. 나 이상으로 열광적인 나이아가라인 이시카와 시게키 군과 둘이 산상 호텔에서 오타키 씨를 만나 8시간 반에 걸쳐 말씀을 들었다. 이시카와 군에게 있어서도 내게 있어서도 생애 가장 행복한 8시간 반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타키 씨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내 친구인 히라카와 가쓰미 군이 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 녹음에 매년 한 번씩 초청하여 이시카와 군과 셋이서 오타키 씨를 중심으로 마음껏 떠들어대는 방송 기획을 오타키 씨가 쾌히 승락해준 것이다. 그것이 6년동안 지속되었다. 6년 째인 2012년 말엽에는 오타키 씨의 훗사 스튜디오를 방문해 거기서 녹음하였다.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오타키 씨의 스튜디오는 나이아가라에게 있어서는 ‘성지’와 같다. 거기서 오타키 씨의 놀랄 만한 컬렉션을 앞에 두고서는(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모두가 아연실색하였다. ‘아연실색’ 말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컬렉션이었다. 히라카와 군이 ‘오타키 씨, 이렇게나 많은 정보를 모아서 어쩔 셈이십니까’ 하고 수사적인 질문을 던졌더니, 오타키 씨는 ‘CIA를 이기려고요’라며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은 거의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정보 기관을 뛰어넘을 정도의 ‘세계에서 가장 상세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오타키 씨에게는 있었고, 그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작년 말 7번째 녹음을 위해 일정 조율 메일을 히라카와 군이 보냈을 때 오타키 씨는 ‘작년으로 끝낼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튜디오로 모신 겁니다’ 라는 답장이 왔다.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 끝이 온다’는 말이 써 있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오타키 씨 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타키 씨와 정기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된 게 실망스럽기보다는, 뭔가 기쁠 정도였다. 위에서 쓴 바와 같이, 오타키 씨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는 옆에 없어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오타키 씨와 일생동안 주고받았던 메일을 세어 보니 20통이었다. 겨우 20통이라. 하지만, 오타키 씨는 언제나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타키 씨는 내가 트위터나 블로그에 쓴 내용을 계속 읽고 있었고, ‘일본에서 이러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타키 씨밖에 없겠지...’ 라고 생각하는 주제를 언급하면, 정말로 몇 분 안 되어 메일이 왔다. 그래서 나이아가라에게 있어 최대의 명예는 ‘일본에서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타키 씨밖에 없다’는 것을 자력으로 발견하여, 오타키 씨로부터 메일 승인을 받는 것이다. 나는 두 번 그 영예를 안게 되었다.

     

    한 가지는 2년 전. 닐 영의 "Till the morning comes"를 내가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카스카베 하치로의 ‘오토미 씨’에 나오는 ‘죽는 줄 알았어 오토미 씨’라는 프레이즈와 똑같이 들렸다. 과연 닐 영이 카스카베 하치로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었을까를 당시 블로그에 썼었다(그렇게 생각한 건 1970년 일이었지만, 그것이 말로 터지기 위해서는 33년이라는 시간을 머뭇거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오타키 씨한테서 바로 메일이 왔는데, 아서 라이맨 밴드가 연주하는 Otomi san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보니까 정말로 일본어가 섞인 ‘오토미 씨’가 주구장창 연주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타키 씨는 어째서 반 세기도 훨씬 예전에 활동했던 미국의 인기 없는 밴드가 연주하는 티브이 동영상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오타키 씨도 한때 ‘닐 영의 그 곡이 설마...’라고 생각하여 1945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록 가수가 아홉 살 때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오토미 씨’를 어디선가 들었을 가능성에 대해 망라적인 조사를 행했던 게 아닐까. 오타키 씨가 ‘망라적’으로 알아보았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망라적’이라는 의미다.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는 말이다. 그리고 이 프레이즈를 닐 영이 접할 수 있으려면 티브이에서 아서 라이맨 밴드의 연주를 보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쩌면...’ 하는 글을 올렸을 때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닐 영이 이 티브이 방송을 봤었다, 는 증언이 실제로 나온다면, 우치다 설에도 신빙성이 있을지도... (웃음)’ 하는 메일을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타키 씨가 여기서 ‘우치다 설’이라고 쓴 것은, 오타키 씨가 한 번 가설을 세우고 난 뒤 내버려둔 팽대한 ‘오타키 설’ 중 하나에 내가 접근했다는 사실에 대한 ‘칭찬’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일을 하며 BGM으로 데이브 클라크 파이브를 틀어놓았는데 그중 ‘와일드 위켄드’ 인트로 부분을 들은 기억이 있다. 고개를 들고 한번 더 들어보니 오타키 씨가 작곡한 ‘끄덕임 행진곡’ 도입부에서 비트 기요시가 부른 약간 달콤한 음정의 독창 부분과 쏙 빼닮은 프레이즈였다. 두 개의 음원을 유튜브에서 찾아 트위터에 첨부했는데, 오타키 씨가 곧장 메일을 보냈다. ‘이 두 음악을 비교한 것은 우치다 씨가 지구상 최초입니다.’

     

    , 오타키 씨는 ‘와일드 위켄드’를 자신만의 ‘우타마쿠라’로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괜한 것을 알려드려서 좀 미안하다고 썼더니, 또다시 바로 답장이 왔다.

     

    ‘미안해할 게 아니라, 정말로 훌륭하고도 ‘참신한’ 해석인 거예요! 그 곡은 본래 The Rivingtons라는 그룹의 ‘papa-wom-mow-mow’를 참조한 것입니다. 팝을 잘 아는 나이아가라에게는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만드는 동안 멜로디가 완전 똑같아 버리면 좀 그러니까 ‘변주’한 거지요. 그것이 설마 DC5의 “와일드 위켄드”와 똑같을 줄이야! 이제껏 한 번도 몰랐어요. 확실히 똑같네요! 아이고 참말로. DC5를 몇만 번이나 들었기 때문에 약간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비트 키요시”가 “마이크 스미스”라니!!! 이건 우치다 씨 말고는 누구도 제창할 수 없는 “초 해석”입니다.’

     

    오타키 씨한테서 받은 메일 가운데 이 정도로 기뻤던 건 없었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오타키 씨와 같은 ‘우타마쿠라’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명복을 빕니다.

     

    (2014년 ‘동경인’)

     

    (2021-12-30 09:2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
    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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