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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문학이란 무엇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2. 26. 12:02
대학원에서 '비교문화 특강'이라는 걸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여세를 몰아 학부의 전공과목 강의도 '비교 문학'으로 정해버렸다.
'비교문학'이란 건 처음 담당하는 수업이다. 첫 담당일 뿐만 아니라, 필자 자신이 대학이나 대학원 다닐 때 그런 명칭의 수업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비교문학 학회에도 입회하지 않았고, 애초에 비교문학 책조차 읽어본 적이 없다.
참으로 대담하다.
아니, 대담하다기보다는 무모하다.
필자는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지루하다.) 하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가르친다. 공부하면서 벼락치기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벼락치기와도 같은 교수법은 상당히 스릴이 있다.
보통은 강의 코앞까지 그날 분의 노트를 필사적으로 만든다. 좀 일찍부터 준비하는 게 좋으련만, 훨씬 전에 그러면 오히려 좋지 않다. 강의에 열중하다 보면 자기가 노트에 적어놓은 메모나 기호, 대충 그린 도식 등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트를 만들 때는 '오오, 그랬던 건가. 모든 의문은 풀렸다구, 으하하' 하며 적어놓았음에도, 좀 지나고 나면 대체 무슨 사고회로를 통해 그런 걸 생각해 냈는가를 본인조차 재현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원칙상으로는 직전에 '불'을 때고, 사고회로가 그 주제로 '구동해 낸' 것을 잘 살펴서 교육 현장에 내보이는 것이다.
잘될 때는 이게 잘되는데, 강의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즉흥의 절정을 맞는 때도 있다. 반대로 강의 15분 전에 '엔진 점화를 해볼까나' 하고 노트를 펼치는 순간 전화가 온다든가, 학생이 난입해 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교단 위에서 '새하얘진' 채로 머쓱해지는 수밖에 없다. 본인도 비참해지지만, 학생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비교문학' 얘기로 돌아가 보면 당연히, 첫 시간에는 '비교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래디컬한 주제를 논해야만 한다.
이 판국에 '비교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책을 찾아보려는 그대, 아직 수행을 덜 이루었다 아니 말할 수 없다. 필자는 그런 How To 책에는 원칙적으로 기대지 않는다. 괴로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조금 어려운 사회과학 저서를 읽어나가는데 거기에는 여기저기 '변증법'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변호'하여 '증명'한다는 것이므로, 설득술 같은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했지만, 그랬더니 전후 문맥에 들어맞지를 않는다. 난처해져서 동아리 3학년이었던 이토오 선배에게 거두절미하고 물어보았다.
'선배, <변증법>이란 무슨 뜻인가요?'
이토오 선배는 빙긋 웃었다. '응, 이를테면 우치다 군이 캐치볼을 하고 있는데, 근처 집의 유리창을 깨버린 거야.'
당시 필자는 좀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2분 정도 속절없이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이토오 선배의 교훈이란 '자고로 목마른 자는 스스로 우물을 파야 하는 법'이었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한 입 갖고선' 가르쳐줄 수 없다, 하는 것을 필자는 그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 이후로 필자는 '~이란 무엇인가?' 하는 제목의 책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비교문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하는 책도 읽지 않는다.
어느 학술 '에 관한 고찰'이란, 그 학술이 제공하는 프레임워크의 '내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고하고, 이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약속'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는 지시에 '예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는 게 아니다. 그러한 프레임워크가 어떤 지적 '욕망'이나 '결핍감'에 호응하여 탄생하였는가, 그 기원은 무엇인가, 그 기능과 효과는 얼마만 한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째서 상이한 문화권에 속한 문학 텍스트를 비교 조합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곧장 알 수 있다. 아마 그건, 언어가 우리들의 사고나 경험을 규정한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리라. 맞다.
하지만, 어째서 '문학'인가?
'비교언어학'이나 '비교사회학'으로는 왜 충분치 못한 것일까? '비교경제학'이나 '비교물리학', '비교생물학' 같은 학술 분야에 관해서는 어째서 거의 언급이 없는 걸까?
문자로 쓰여 있는 한, 어떠한 텍스트라고 할지라도 각기 다른 언어로, 각자의 언어 문화권이 품고 있는 사회제도나 사고 양식의 특성이 반영될 수 있을 터이다. 왜 그걸 비교하면 안 되는 걸까? 어째서 문학이어야만 하는가?
그러한 질문을 생각해 보는 일은 재미있다.
아래는 강의를 위해 필자가 여느 때와 같이 '직전'에 써재낀 노트이다.
<비교문학 강의의 목적>
1. 우리들이 사물을 느끼는 방법이나 사고방식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2. 우리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본질적으로 '아날로그'적인 연속체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각자의 모국어에 따라 '디지털'로 분절합니다. 실제로는 '분절'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세상을 마치 사전에 '분절'이 된 세상처럼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분절'을 가미하는 것은 우리들이 구사하는 언어입니다.
3. 비교문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각자의 국어 공동체가 '동일한 세상'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경험하는가 하는 질문을, 주로 각자의 국어가 가진 특수성에 기반하여 해명하려 하는 시도입니다. (라고 제가 멋대로 정의해버렸습니다.) 그 작업은 문학 텍스트를 소재로 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4. 하지만, 왜 문학일까요? 만약 언어적인 세계 분절의 특수성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언어로 표현되는 온갖 것들이 이 작업에 해당될 터입니다.
이를테면 헌법 조문도, 치약 사용설명서도, 수학 교과서도 모두 언어적 텍스트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을 비교문학의 소재로 다루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하자면 '그러한 텍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의미나 가치를 논하고 있으므로, 특정 국어의 특수성을 탐색할 수 있을 실마리가 되지 않는다'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대개 너무 간단한 설명이 다 그렇듯이, 이 설명도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문학적 텍스트가 비교의 대상으로서 부적절한 것은, 그것들이 '번역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 아무에게나 통하는 공통의 의미나 가치'를 논한다고 일컬어지는 텍스트는, 그렇지 않은 의미나 가치의 '억압과 은폐'를 기반으로 성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헌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자연권'이라든가 '기본적 인권'이라든가 '공공의 복리'라든가 하는 식으로 틀림없이 만국 공통의 개념을 구사하여 쓰여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법률' '권리' '우측' '옳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개념은 일본어 어휘에서 각자 다른 의미의 말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이 네 가지 개념을 모두 같은 단어 droit로 나타냅니다. 그렇다 함은, '법'이라는 기본 개념 하나를 들어보아도, 프랑스인과 일본인에게는 그 개념의 깊이와 폭이 정말로 별개의 것이 됩니다.
'법'이나 '권리'라는 기본어에서조차 메우기 힘든 '어긋남'이 두 언어 사이에서 발견될 때, 법률이 '동일한 현실을 논한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법률적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서로 동일한 세상의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6. 다음으로 '치약 광고'에 쓰이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본에서는 '오하구로'라는 화장 기법이 근대화 초기까지 존재했습니다. 기혼 여성은 '가네'라는 것을 치아에 발랐는데, 이 활짝 웃는 '새까만 이'가, 마치 끝 모를 심연과도 같이 보이게끔 입을 벌린 것입니다.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걸 보며 남몰래 흥분했던 것 같군요.)
'하얀 이'를 미의 지표로 삼는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오하구로'를 아름답게 느꼈던 미적 감수성을 한번 부정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역사적 성립을 꾀하고 있습니다. '치약 사용설명서'가 너무나 당연히도 언급하지 않는 것, 즉 '하얀 이가 아름답다'는 전제는, '검은 이가 아름답다'는 별세계 경험의 무시와 부인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하는 것입니다.
7.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학 교과서'에는 그런 억압이 전혀 없으리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있는 겁니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학 교과서 즉 소위 만국 공통의 계산 법칙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진화를 거쳐온 '에도 수학和算'이라고 불리는 추론과 검증 체계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하고 있습니다.
저는 귀중한 전통문화이므로 일본 학교에서는 에도 시대 수학을 가르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수학을 싫어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음악이 그런 것처럼, 미술이 그런 것처럼, 일본 고유의 수학적 사고라는 것도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집단 차원에서 망각한 건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학교 수학이 모종의 '연극적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아차린다면, 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동기가 싹 사라질 것이라고 문부성은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거겠죠.)
8. 잠깐, 비문학적 텍스트가 '국어의 특수성이 불러일으키는 세계관의 인지부조화에 대한 해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그 텍스트들에 쓰인 언어가 '보편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세계관에 대한 인지부조화' 그 자체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부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것을 소재로 탐구하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9. 이러한 비문학적 텍스트에 비하면 문학은 '번역 불가능'하며, 특수한 집단의 특수한 가치관이나 미의식, 이념에 흠뻑 적셔진 '이너서클의 언어'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문학은 애초에 동일한 모국어 공동체의 내부에서조차 상당히 '독자 선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음악에 관한 팽대한 양의 고유명사가 나옵니다. 그것들은 그의 소설을 장식하는 단순한 소도구가 아니라 그 세상을 이루는 골격의 일부이므로, 거기에 언급된 있는 음악을 들어본 적 없거나, 그 뮤지션과 관련된 신화와 같은 정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텍스트를 충분히 향수할 가능성으로부터 조직적으로 배제됩니다.
하지만 문학 텍스트의 이러한 독자 선택성, 독자 한정성에서 도리어 우리들은 '번역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10. 그렇다 함은, 독자 선택적이라 함은, '소수의 선택받은 독자'를 '주류'로부터 유리시키려는 몸짓인데, 이 몸짓을 통해 독자 선택적인 텍스트는 항상 '주류는 누구인가?'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것인가?'라는 식의 반성적 언급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항상 자신들을 포섭하고 있는 사회집단의 '상식', '통속성', '범용성', '권력 구조' 그리고 '체제적 이념'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체제를 비판하려는 계기를 내포하지 않은 텍스트는 결코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체제 비판의 계기를 내포하지 않은 텍스트는 그 텍스트의 독자에게 '우리는 선택받은 독자다'라는 쾌감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1. 문학 텍스트의 조건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주장과는 반대로) 텍스트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독자에게 으레 가져다주곤 하는 '우리야말로 선택받은 독자이며, 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과는 별종이다'라는 정체성화의 '효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모든 텍스트에 대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자를 '보편적인 존재'로 전제하는 텍스트(법률 조문이나 치약 설명서, 수학 교과서 등)는 문학이 아닙니다. 역으로, 독자에게 자신이 '독자獨自적인 존재, 선택받은 존재'임을 확인(착오)시켜 주는 텍스트가 문학인 것입니다.
문학이란, 독자에게 행간을 통해 '당신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서 고립을 면치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며, 때로는 박해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텍스트는 그런 예외적인 존재인 당신을 위해서 쓰인 것이다'라는 위로와 피택, 공감의 메시지를 나타내는 텍스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텍스트는 '구약성서'라고 일컬어지는 일이 가능한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독자성으로 인한 수난, 신에 의한 피택과 구원'이라는 설화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성립 방식, 특히 그 사회의 언어에 의해 우리들의 경험이나 사고의 양식이 얼마만큼 규정되고 있는가를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형적 이야기 형식에 호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지극히 효과적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가령 우리들이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차르 칙령집이나 러시아 정부의 '경제 백서'를 읽는 것보다는, <죄와 벌> 읽기를 택하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칙령집'은 '러시아 사회는 무엇을 허용하는가?'를 주제적으로 논하고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텍스트는 '러시아 사회는 무엇을 배제하는가?'를 주제적으로 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러시아 사회가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무시하며, 무엇을 경시하고, 무엇에 이름을 붙이며, 무엇을 억압하는가를, 즉 '러시아 사회는 무엇이 아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별적 시스템의 내부에 살고 있는 한, 무엇을 어느 다른 하나와 '비교'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설령 독자가 현실적으로는 사회 지도층의 중핵이고, 범용함과 통속성의 이상적 체현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성립 방식을 알아내고자 스스로 문학이 필요할 수 있다는 명제는 제법 그럴싸합니다.
일본의 대다수 중년 이상 세대는 시바 료타로를 애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시바 료타로의 입장이 긍정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시바는 매우 치열하게 현대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상식적'이고 '범용한' 많은 독자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시바의 텍스트가 독자에게 '나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 소수파이자 수난자이다'와 같은 개운한 환상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무라카미 류는 그가 쓴 에세이에서 일본 사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독자가 그를 지지합니다. <피지컬 인텐시티>는 축구 분야의 일본론이지만, 이 책은 일본의 기성 세대, 일본의 언론, 일본의 상식에 대한 세상없는 통렬한 매도가 분기탱천해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책의 맨 뒷장을 보고 저는 굉장히 놀랐는데, 그 공격적인 텍스트가 <주간 호우세키>에 실렸던 칼럼이었던 까닭이었습니다.
<호우세키>나 <문예춘추> 같은 주간지는, 정직하게 말하면 일본문화가 갖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의 이념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어리석음과 질투, 증오로 범벅이 된 황색언론의 애독자들이 무라카미 류를 읽고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을 상상한다는 건 제게 있어 악몽과도 같습니다.
저는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성세대들에게 '당신들은 속물에 불과하므로, 시바 료타로나 무라카미 류를 읽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속물들은 자신이 속물이기 때문에 통속성과 범용함을 누구보다도 증오하며, 주류는 자신이 주류이기 때문에 '자기는 비주류다'라고 잡아뗀다는 평범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 요전번에 이시하라 신타로가 도쿄도지사 선거에 당선됐던 것도(1999년 - 옮긴이), 그 적절한 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전후 일본 사회의 추락, 관료제와 국정의 부패를 엄격히 비판함으로써, 자민당 지지층(두말할 것 없이 그러한 사회를 창출, 유지하며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는 '문학의 승리'라고 봐도 좋겠죠. 달리 말하면, '이놈의 일본 사회는 어떻게 생겨놓은 건지 당최 모르겠다'는 절실한 심정의 표명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우리들의 동시대 작가이자 세계적으로 저명한 작가들인 미시마 유키오나 오에 겐자부로, 나카가미 겐지와 무라카미 류는 강한 비판 정신으로 말미암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학은 일본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간, '무리'로부터 떨어져나온 인간 '만을'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문학가들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편, 현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의 작품이 '현대 일본 사회의 가치관이나 미적 감수성의 최대공약수'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이 (외국인 독자에게 있어서도)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은, 거기에 '무엇이' 주인공들을 '배제'하고, '무리'에서 떨어트리는가, 하는 게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5. 무라카미 류는 아시아 각 나라에서 그의 작품이 상당수 번역된 사실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국, 홍콩 및 중화권에서 나의 작품은 해적판을 포함해 60권 이상이 번역되어 있다. 대관절 뭐가 재밌는데? 하고 한국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서둘러 근대화를 추진한 나라에 사는, 인간들의 정신적 미래를 다룬 점.>"
(출처: "Physical Intensity"에서)
16. 같은 책에서 무라카미 류는 핀란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논하는 가운데 문학에 접근하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 보고 나서 모든 영화는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로 핀란드의 실상을 알게 되었어요. 달리 뉴스나 여행 프로만 봐서는 모릅니다. 네오리얼리즘으로 이탈리아를 알게 되었고, 누벨바그로 프랑스를 배웠습니다. 고다르의 영화는 프랑스인의 <정신>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난 뒤 프랑스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는가 하면 바로 그 인식이 틀리지 않았단 겁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의미에서는 소설도 동일합니다. 저는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도스토옙스키로 배웠고, 태평양전쟁을 하야시 후미코와 오오카 쇼헤이의 작품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본질을 잘라내어 기록으로 남겨두는 작업을 행하고 있는 작품은, 지금 일본에 거의 없습니다."
17. '흐-응.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즉, 무라카미 류도 그다지 똑똑한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라고 중얼거리며 화장실에 앉아, '볼일 볼 때 보는 책'인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따분한 독서>를 넘기다 보니 거기에도 비슷한 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 또한 메이지 시대에 대해서, 또는 메이지 시기에 살았던 작가들에 대해서 공감과 관심이 희박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생기발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90년도 훨씬 이전에 살았던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묘한 일이 아닌가. (...) 이를테면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을 읽을 때 경악했던 것은 그 대화가 낡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심지어, 과연 현대 소설 가운데 <명암>만큼 독자를 자극하지 않고는 못 배길 대화가 등장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 <명암>이 재미있는 점은, '불변'이기 때문이 아니다. 소세키가 우리들의 '이웃'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웃'은 우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일단 놀라게 되는데, 90년 동안 우리들은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다시금 놀라게 되는 것은, 사실 '이웃'과 우리들은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선명한 의지와 의견을 가졌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의 윤곽은 흐릿해져 있다. 왜 그런가를 지금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들의 윤곽이 흐릿해져 있는 것은, 무라카미가 한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 시대의 텍스트가 "시대의 본질을 잘라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희박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의식적인 작가인 한, 지은이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규명하기' 위해서, 배제의 경험을 묘사해 나가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세속적 명성을 얻은 뒤에도 '배제된 입장'에 서는 것이 문학자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나 다카하시가 한탄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선택받은 독자'를 위해 '이너서클의 어법'으로 계속 쓰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인 겁니다.
18.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너서클의 어휘로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의 연장선상에서, 자기 작품을 '<친밀한> 서클 안에서만 통하는 부호성을 띤 어휘로 쓰인 문장'으로 비판했던 도미오카 다에코에 반론하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상쾌하고 풍요로운, 그리고 자유로운 말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 작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자신의 바람대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겨우 닿는 세계가 아닌, 나같이 부족한 자는 스스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밖에는 도착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그 미력한 육체와 타협해 나가며 조금이라도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겁니다.' (<문학을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은 걸까>)
19. 저는 다카하시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문학 텍스트는 다카하시가 옳게 말했듯이 '나같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는 나 자신조차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 고유의 육체를 통하는 것밖에는 그 길에 이를 수 없는' '자유로운 언어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문학의 생리입니다. 그것은 곧장 '보편'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고, 필연적으로 '이너서클'을 통과시켜야만 합니다. 자신이 지금 읊고 있는 언어가 하릴없이 '이너서클'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픔과 수치를 느끼며 경험하는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문학은 '이너서클'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너서클'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 이너서클의 언어를 가지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경험을 우선 말하고자 하는 야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20. 이상과 같은 고찰로부터 우리들은 '비교문학'이라는 학문의 특수한 성질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비교문학이란 '어느 공동체가 집단 차원에서 억압했던 것'을 '자료'로 하여, 그로부터 '한 국어 공동체가 지니는 고유한 세계 경험 방식'을 추출하는 학술적 작업이다라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한, 비교문학은 '자기의 사고 프로세스 그 자체에 대한 소급적인 반성'으로서의 철학이나, '그만큼 이미 성적 경향을 띤 존재인 자기의 욕망 구조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정신분석이나, '자기중심주의적인 자아의 확대 욕망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페미니즘 정치철학이나 포스트 식민지주의의 정치학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들과 생산적인 대화나 논쟁을 행하는 학지가 될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1. 이런 글을 2년 전에 썼다. 그러고 나서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렸는데, 가토 슈이치의 <일본 문화의 복잡성>에 대해 찾아보다가 뜻밖의 문장과 마주쳤다.
"나는 알베르 카뮈 씨 생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였다. 무엇을 얘기했는지는 거의 잊어버렸는데, 소설에 대해서는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 <어째서 소설을 쓰느냐? 소설만이 번역할 수 있는 텍스트 형식이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그 의견에 찬성한다." <일본어I> (가토 슈이치 저작집 7, p.207)
알베르 카뮈 씨는 항상 사물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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