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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내가 보고 싶은 설날 특집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2. 20. 07:00
연말 신문에 연말연시 TV 편성표 종합판이 크게 실려 있었는데, 보고 싶은 방송이 거의 없었다. 결국 보고싶은 설날 프로는 NHK 특선 <아라비아의 로렌스> 뿐. 벌써 다섯 번째 본 영화인데도, 신기루 저편에서 오마 샤리프의 그림자가 어슬어슬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푸념은 그만 두고, 필자가 보지 않은 설날 특집 방송은 대체로 버라이어티물이었다. 이에 대해 적잖이 생각한 바를 술회하고자 한다.
버라이어티 방송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필자는 모르지만, 재담가가 골프를 친다든가, 가수가 요리를 만든다든가, 야구감독 부인이 인생상담을 한다든가, 배우가 퀴즈를 푼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면 요컨대 ‘본업 이외의 재능을 보여드린다’는 게 본질이 아닐까 한다.
언뜻 들은 바로는 본래 엄격한 전통 예능인 노가쿠 세계에서도 가끔 서로 익숙지 않은 역할을 맡아 바꾸는 식으로 좌흥을 북돋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가끔 바꾼 역할을 쓸데없이 잘하는 사람이 등장해 본래 그 역할을 가진 사람이 식은땀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한다.) 이러한 의외성이 재미가 있다는 점은 필자도 알겠다.
이해가 안 가는 점은, 평소에 본업을 안 하고 있는 ‘탤런트’들이 ‘본업 이외의 재능’을 하는 버라이어티에 의외성이 있겠는가, 뭐가 재밌겠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인기 있는 탤런트인 ‘비트 다케시’,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의 본업은 각각 ‘재담가’ ‘라쿠고 가’ ‘만담가’였을 터이나, 그들의 본업에서 행해지는 기예를 볼 기회는 엊저녁에 사라졌다.
여러 버라이어티 프로에서 사회를 맡고 있는 경우는 대개 본업이 재담가이다. 하지만 그들이 재담이나 콩트 연기 하는 것을 우리들은 두번 다시 볼 수 없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본업에 종사하지 않고 여기(余技)로 먹고 산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필자는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였지만 어느새 ‘본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헤헤 라고 할라치면 어쩔 수 없다. 그대들한테도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니 필자 역시 멋없는 소리는 안한다.
하지만 한마디만 하겠다. 그럼 가끔이라도 좋으니 ‘기예’를 보여주지 않겠나. 즉, 지금 본업이 된 ‘막간을 이용한 재능’이 아니라, 제군들이 이 업계에 입문했을 적에 밟아왔던 ‘옛날 재능’을 보여주지 않겠나.
품평은 하지 않겠다. 그저 연말연시만이라도 좋으니 제군의 ‘여기’로 웃을 수 있게 해다오. 일 년에 한 번만 해 주면 안되겠나.
하지만 설령 민방에서 프라임 타임에 파격적 개런티로 ‘재담가 출신을 모아 여는 재담 대회’를 기획한다손 쳐도, 그들의 대부분은 출연을 거부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째서일까.
그들의 ‘여기’가 ‘본업’에 비하면 거의 재밌지 않은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도 모처럼 본격적으로 했는데 ‘재능이 없구만’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야구선수가 음정이 엇갈린 노래를 부른다든가, 배우가 서툰 골프를 친다든가 하는 모습을 지독한 웃음거리로 만든 사회자 연예인들이 어째서 자신들은 가끔씩 서툰 ‘만담’이나 ‘라쿠고’를 보여주며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꺼려하는지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그저 익살이니까. 다른 사람의 서툰 재능을 조소로 삼을 때는 항상 ‘해학’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서툰 재능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말로 익살을 모르는 연예인들이다.
버라이어티 방송에 대한 쓴소리가 나온 김에, 누구도 절대 출연하지 않을 방송 기획을 하나 더 제시한다.
‘토너먼트 밴드 대전’.
잘나가는 그룹이나 밴드를 모아놓고 음악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모두에게 처음 접하는 신곡의 악보(데모 테이프 없이 악보만)를 나눠주고, 밴드 멤버에게 1시간만 연습시간을 준다. (멤버 이외 다른 사람은 출입 금지) 1시간이 지나면, 한 팀정도 스튜디오로 부르고 심사원 앞에서 라이브를 시켜보는 것이다.
이게 또 재밌다는 말이다.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밴드 연주는 엉망이다. 똑같은 프레이즈를 치기에 악기 연주 테크닉 차이가 역력하다. 한편으로는 연주는 그저 그렇지만 설득력 있는 음악표현을 하는 그룹도 있다. 동일한 곡인데도 해석이 달라서 록을 절규하는 밴드도 있으면 발라드를 물씬 풍기는 그룹도 있다. 밴드 각각의 실력과 개성이란, 이렇게 같은 조건 하에 같은 곡을 연주시켜보면 확실히 구별된다.
이렇게 승리의 영광을 얻은 밴드는 ‘일본 제일의 토너먼트 밴드’ 칭호를 수여하는 것이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사잔 올스타즈가 1회 우승자다. KINKI KIDS는 그럭저럭 할 것이나 SMAP은 내부 불화로 해산. 의외로 BG4는 2등일까나.
각 방송사 관계자들꼐서는 진지하게 검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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