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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철학의 쓸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2. 14. 07:00
알고 지내는 젊은 여성한테서 편지가 왔다. 정신병원에서 주간보호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한다.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일단 퇴원해 사회에 적응하며 통원하는 사람들’의 말동무를 해 준다는 듯하다. 그 사람들이 그녀에게 묻는 질문이 퍽 철학적이라고 한다.
그녀는 대학 시절 철학을 조금 접하여 프랑스 현대 사상을 졸업 논문 주제로 고른 이로서, 철학에 대해 약간은 이해하고 있지만 어려운 질문에는 쩔쩔매는 모양이다.
‘철학은 포스트모던 이래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현재 가장 참신한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에 관한 책을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듣는데, 무엇이 좋을까요’ 하고 그녀는 다시금 물어온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답장을 보낼 겸 해서 이 물음에 관해 좀 생각해보고자 한다.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들이 철학이나 종교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는 일은 필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대략 ‘자신이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정신의 존재양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들은 모두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마음의 병을 앓고있다. 우리들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무엇을 위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가’에 대해 누구 하나 확정적인 대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도, 죽고 나서의 일도, 애초에 우리들이 지금 살아있는 지구나 태양계, 은하가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정말로 알지 못한다.
‘우선 빅뱅이 있었고, 그 후 우주는 팽창을 거듭해 왔다구’ 하는 식의 뺀질거리는 설명으로 눙치려는 일은 그만두자.
‘그럼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어?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 거야?’ 하는 아이들의 소박한 질문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마음을 앓고 있는 자는, 이 유아적인 질문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물음을 실로 정직하게 품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필자 자신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떤 종류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이 있었다. 그때는 심장의 ‘콩, 콩’ 하는 고동과 고동 사이의 ‘멈춤’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랐다. ‘콩’할 때는 확실히 필자가 살아있다. 하지만 ‘콩’이 끝난 후의 ‘콩’이 도래할 때까지의 사이, 필자는 ‘설마 아까 <두근>했던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서, 이 짦은 멈춤을 공포 가운데 보냈다. 하루종일 ‘콩’과 ‘콩’ 사이에서 벌벌 떠는, 번듯한 정신 질환자이다. 어른들은 도무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하는 게 어린 마음에 참으로 수수께끼였다.
자라고 나서 알게 된 건, ‘어른’은 이러한 해답 없는 질문을 솜씨 좋게 회피하기 위한 기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기법’이 철학이다.
철학이란 인간 존재의 근거를 묻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답 없는 질문(우주의 기원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간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가, 죽고 나서 우리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등등) 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인 것이다. 철학은 무엇인가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잘 할 수 없는 질문’을 다루기 위한 기법이다.
선가의 공안(公案)은 그 기법의 대표적인 것이다. ‘부모 미생 이전의 나’(양친이 태어나기 전의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공안은 참으로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이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애초에 해답 내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공안의 목표는 ‘해답 없는 질문’에는 어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지(知)의 훈련이며, 대개 질문을 소기의 짜임새와는 다른 짜임새로 ‘비껴가는’ 기법의 습득이다.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했던 것도 물음은 다르지만 ‘효과’는 같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묻는다. ‘어째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어째서 <우주의 끝>같은 것을 본 적도 없는 아이가 <우주의 끝>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사용해 어른들은 광기를 능숙히 회피한다.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느냐 하면, 선가와 데카르트 모두 ‘사고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대단히 지적인 태도이기도 하며, 숭고한 행위이다’라는 (실은 전혀 근거 없는) 전제를 뻔뻔한 얼굴로 채용해버리기 때문이다.
철학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이래저래 고민해보는 것이 지적 성실의 표징이자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라는 ‘거짓말’이다.
여러분이 알려주신 대로, 인간이란 ‘하지 말라’는 것에는 반항하는 주제에, ‘참 좋은 일이니 차근차근 해보라’는 것에는 갑자기 의욕을 잃고 마는 난감한 생물인 것이다.
톰 소여가 아주머니에게 부탁받은 울타리칠을 빼먹기 위해 꾀를 한 가지 고안해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 볼까. 톰의 친구인 개구쟁이가 찾아온다. 톰은 페인트칠이 하기 싫어 어쩔 줄을 몰랐지만, 싱글벙글하며 기쁜 듯 작업을 해보인다. 사과를 볼이 미어지게 먹으며 멍하니 페인트칠 작업을 지켜보던 친구는, 톰이 그렇게 즐거워보일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페인트칠이 하고 싶어진다. 거기서 ‘얘, 나 좀 하게 시켜줘’ 하고 톰에게 부탁한다. 여기서부터가 흥정의 포인트다. 톰은 완강히 거절한다. ‘싫어. 이렇게 재밌는데 남에게 준다니, 못 주고 말고.’ 이렇게 안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는 더 하고 싶어져서 미칠 것 같다. 필사적으로 간청해 드디어 ‘울타리에 전부 페인트를 칠하고 나서 자신이 먹던 사과를 주겠다’는 데까지 조건을 걸게 된다. 톰은 떨떠름하게(내심은 흡족하게) 붓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 ‘마음에 병이 있는’ 우리들에게 지어낸 ‘거짓말’도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세상의 보통 부모들은 아이가 ‘우주의 끝에는 뭐가 있어?’ 라든가 ‘죽고 나서는 어떻게 돼?’ 하고 끈질기게 물어오면, ‘시끄럽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숙제나 하라’ 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래서는 정말로 역효과만 난다.
이러한 난감한 물음에는 ‘이 무슨 위대한 철학적 질문이더냐. 그런 걸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지적인 행위야. 자, 숙제는 집어치우고, 여기 있는 <방법 서설>과 <존재와 시간>을 확실히 읽고 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렴’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게 옳은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은 순간 아이는 의욕을 잃고, 코기토니 존재론적 불안이니 하는 것과 연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회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철학에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평범’에 이르는 왕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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