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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 전원 대학 입학 시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2. 8. 07:00

    어느 입시학원 자료에 의하면, 이르면 2008년 께 '대학 지원자수'와 '대학 정원'의 수가 같아진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때가 되면 '어디어디 대학이 아니면 안간다'고 칭얼대지만 않을 시, 수험생 전원이 경사스럽게도 대학생이 될 수 있다 하는 '전원 대학 입학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다.

     

    전원 대학 입학. 그것이 어떠한 사태를 의미하는가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필자가 중학생이었을 때, 도쿄 도내의 평범한 공립 중학교에서는 학급 50명 가운데 10명 가까운 인원이 중졸로 취직했다. 이때 당시 토요일에 학교 파하고 집에 와서 봤던 한 TV 코미디에는 자기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주변에 자랑하는 아저씨가 나왔다.

     

    그렇다 함은 확실히 60년대까지는 '고등학생'에게 '선량함'이라는 플러스 가치가 다소간 잔존했다는 말이 된다. 남루한 옷차림에 시를 읊는 '구제고교'(2차대전 이전 일본 고유의 학제로, 오늘날 도쿄대 등 국립대의 예과에 해당함 - 옮긴이)의 망령을 질질 끌고 다니던 고등학생은 60년대 전반의 <사자에상>에 아직 등장하고 있던 판국이었다. 그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전원 고등학교 입학'이 사친회의 성원 덕에 현실화된 1964년 경의 이야기다.

     

    지금 우리들은 '고등학생'이라는 단어로부터 '머리가 나쁘고, 시끄럽고, 예의를 모르며, 많이 먹고, 이기주의에, 패스트푸드점에서 담배를 피우며 편의점에서 만화잡지를 보는 사람'밖에는 연상해낼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고 침착하며 사색적인 고등학생 제군도 혹 있을지 모른다. 나카하라 주야의 시를 읊는다든지, 호반의 자작나무 그늘 아래에서 호리 다쓰오를 읽는다든지, 콜트레인을 들으며 장 주네를 읽는 등의 고등학생도 혹시 일본 전국에 750명 정도는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한테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든 '전원 고등학교 입학' 이후, '고등학생'이라는 말과 '사색적' 혹은 '서정적'같은 형용사가 거의 인연이 없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전원 대학 입학'은 이와 같은 효과를 대학생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이미 현재 평균적인 대학 1학년 학생의 학력 수준은(입시학원 관계자와 대학 관계자의 증언을 믿는다면) 30년 전 중학교 3학년 레벨까지 떨어져 있다. 이 가공할 만한 사실이 '편차치'라는 지표의 눈속임 탓에 전경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편차치'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동연령 집단에서 몇 번째 쯤에 있나 하는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이지, '학력'의 지표가 아니다. 동연령 집단 전체의 레벨이 저하된 경우, 편차치만으로는 학력 저하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다행히도 입시학원은 매년 똑같은 난이도의 모의고사 문제를 출제하고 있으므로 원점수 비교에 의해 각 학년도 학생의 학력을 비교할 수 있다. 그 결론이 '1년에 1점이라는 기세'로 원점수가 내려갔다는 사실이다. 10년이면 10점, 30년이면 30점. 작금의 대학생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우리들의 환각같은 게 아니고 실제로 대학생이 점점 바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무성영화 시절 작품에 <낙제는 했지만>(1930)이라는 코미디가 있다. 당대 하이칼라 대학생들의 생활거지를 묘사하고 있는 유쾌한 작품이다. 거기에는 사이토 다쓰오를 필두로 하는 바보 학생들이 벼락치기로 졸업 시험 공부를 하는 장면이 있다. 사이토는 암기하는 게 귀찮아서, 컨닝을 위해 와이셔츠 뒤에 독일어 원서의 주요 부분을 써넣는다. 70년 전에는, 가장 성적이 나쁜 대학생조차 두꺼운 전문서적을 대충 읽은 뒤 '포인트'를 찾아내 그것을 필기할 정도의 곡예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원 대학 입학'이 되면, 21세기 대학은 현재 고등학교와 레벨이 동등한 교육기관이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회의 운영을 위해서는, 일정 수의 지적 엘리트가 항상 필요하다. 대학이 '고등학교'가 되어버렸으므로, '대학'에 대응하는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한 것이다.

     

    새로운 기준에서의 '대학'에 해당하는 것은, 도쿄대를 필두로 하는 한 줌의 최상위권 대학과 서양의 대학 뿐일 것이다. 그밖의 대학에서는 '대학'으로서 최소한의 교육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대학에 남아 석사 학위를 취득할 것을 강하게 권할 것이다.

     

    즉 21세기 초엽에는, '한 줌의 최상위 학교+서양 대학+보통 대학 대학원'이 현재까지의 '대학'에 상당하는 것이 된다. 이 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정원의 총합이 대학 지원자 수의 몇 %를 점한다면, 대체로 1930년대 대학 진학율과 거의 비슷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학교)에 가는 게 간단해진 시대'란, '대학(에 상당하는 학교)을 나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시대'인 것이다. 대졸 학력이 무가치해지는 것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이 변화는 뜻밖에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거기에 대한 긴 이야기를 다음주에 게재키로 한다.

     

     

    '전원 대학 입학'으로 말미암아 일본 사회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이야기의 후속편이다.

     

    우선 분명히 해 둘 사항은, 18세 인구의 격감에 의해 21세기 초엽에 대학 여기저기에서 정원 미달(지원자 전원을 합격시켜도 아직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현상)이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정원 미달'을 일으킨 대학이란 것은, 말하자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사칙연산을 못하고, dangerous를 '당고라스'로 발음하며, '낫다'와 '낳다'를 혼동하는 대학생이라는 존재가 우왕좌왕 창궐하게 된다. (이미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밑바닥 학교'에서는 당연히 '강의 붕괴' '실습 붕괴'라는 사태가 생긴다. 강의중에 강의실을 걸어다니고, 술 마시고, 화장하며, 휴대폰 하고, 플레이스테이션 게임하며, 주의 주는 교사를 째려보는 대학생이라는 존재가 (이미 있지만) 각지의 '밑바닥 학교'에 발호하게 된다.

     

    이는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사태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6학년 단계에서 이미 산수 수업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초등학생이 과반수를 넘었다. 분수 계산법 정도만 가도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없게 되어놔서, 수업 듣기를 그만 둬버린다.

     

    수업 듣기를 그만 둬버린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식을 습득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기본적인 룰이 몸에 익지 않는 게 문제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란, '알고 있는 인간'이 설명하는 '방법'을 듣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수용해, 주어진 과제에 적용해 보며, 잘 안 될 때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지적받는 등의, 대화적・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행할 따름이다. 간단한 얘기지만, 이 커뮤니케이션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설명을 들을 때는 입을 다물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 '나중에 써먹을 수 있도록 (노트 등의 보조 수단을 사용해) 기억한다' '질문은 정확하고 간결하게 한다' '집중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다' 등의 기본적인 태도를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단계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일을 포기하고, '무언가를 배우는' 방법 자체를 몸에 익히지 않은 채 커버리고 만 아이들은, 장성한 뒤에도 '자신이 모르는 정보, 자신이 습득하지 못한 기술'을 잘 습득할 수가 없다. 대화적・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 얘기를 오랫동안 주의 깊게 들을 수 없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배울 때 필요하기 나름인 적절한 예의(표면적인 공손함이라는 연기)를 표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가르쳐 주는 상대에게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이해시키는 일을 못한다. 이 아이들이 '학급 붕괴'의 주인공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배우겠다 하는 '노정'을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양적으로 증대시키는 길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초등학생인 채로 유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아 프레임워크 가운데, TV나 음악, 패션, 컴퓨터 게임, 만화, 섹스, 스포츠에 관한 잡다한 정보를 한가득 채워넣는 일을 '정보 섭취'라고 착각한 채 성장한다. 그리고 '밑바닥 학교' 대학생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은 물론 대학에서도 무엇 하나 배울 수 없다. 그리고 무의미하게 보낸 십 수년의 학교과정을 마치고, 저임금 미숙련 노동에 취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졸 블루 칼라'가 대량 양산된다.

     

    그들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없다. 그들은 권력으로부터도, 이익 분배로부터도, 상위 문화로부터도, 정보로부터도 소외된다. 아마 그 의미조차 잘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들의 의사에 따라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걷어차고, 빈곤과 무지와 피차별을 나서서 택한 사람들이 이때 출현한다. 약자와 연대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격 도야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무능해서 중산층에서 탈락해 가는 집단이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때 아마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의 종언이 도래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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