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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0 뇌사와 장기이식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2. 2. 07:00

    애드거 앨런 포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장편 중에 <발데마르 씨 병증의 진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다 읽고 난 뒤에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드는 이상한 맛의 공포소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라는 사람도 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최면술사인 '나'는 '임종을 맞은 인간에게 최면술을 걸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극도의 폐결핵에 잠식당해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발데마르 씨가 기특하게도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임종의 때에 최면술을 시술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시술이 성공하고 빈사의 남자는 임종의 자리에서 잠에 들어, 잠이 든 채로 숨을 거둔다.


    
그랬을 터이나 수 분 뒤, 발데마르 씨는 '잠'에서 깨고 만다.


    
'깊은 동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흐릿한 소리에 그는 '아까까지 나는 잠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죽어있다'고 신음한다. 최면술의 잠 탓에, 그는 죽음의 순간을 면하고 만 것이다.


    
발데마르 씨는 그 뒤 7개월 죽어 있으면서도 죽지 않은 가사 상태에 빠진다. '나'는 드디어 그에게 건 최면술을 풀기로 결심한다.


    
최면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이 지옥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려퍼지는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빨리 잠들게 해 주게, 그렇지 않으면 빨리 눈뜨게 해 주게.' 그리고 최면술이 풀린 순간, 발데마르 씨의 신체는 '끔찍한 부패물이자 액체에 가까운 덩어리'로 화해 무너져내린다.


     

    생과 사의 중간 상태, 죽어가고 있는데도 살아 있는, 혹은 살아 있는데도 죽어가는 상태라는 것은 포가 즐겨 쓴 호러 시추에이션이다. <너무 이른 매장>이라는 단편에서 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살아있는 가운데 매장되고 만다—이것이야말로 의심 없이 이제까지 인간에게 내려져 왔던 극도의 고통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것임에 틀림없다.' 살아있으면서 관짝에 들어간 여성의 공포를 묘사한 <어셔 가문의 몰락>이 포의 대표작인 것은 학생 여러분이 알려주신 대로다.


     

    '살아있지도 않지만 죽지도 않는다'는 '회색 지대'는 우리들 공포의 태고적인 기원이다.


    
석기시대 묘지를 발굴하면, 둘둘 묶여 있다거나, 위에서부터 거대한 돌을 타고 움직이지 않는 듯하게 매장되어 있는 사체가 발견된다. 한번 죽은 것이 다시 살아있는 자의 세계에 돌아와 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고대인은 아주 무서워한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드라큘라 백작도 좀비도 모두 묘지에서 다시 살아난 것들이다.


    
하지만 똑같은 회색지대 경험 가운데 '매장했던 죽은 이가 살아난다'와 '살아있으면서 매장되어 있는' 것 중 어느 게 보다 무서운가 하면, 역시 에드거 앨런 포가 말한 바와 같이, 후자가 압도적으로 무서운 것이다.




     

    죽은 이가 되살아나서 '뇌를 파먹겠다' 하며 사람을 쫓아다니는 것도 확실히 무섭다. 무섭기는 해도 이 또한 고질라나 킹콩과 마찬가지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면 살 기회가 있을 게다.



    하지만 눈을 떴는데 매장되어 있는 경우에는 도망칠 수 없다. 힘껏 관짝을 안쪽에서 밀어본다든가 소리를 있는 힘껏 질러본다든가가 고작이다.

     

    일본의 경우는 화장이 주를 이루므로 오븐(이라고 하던가, 아무튼)의 쇠문이 찰칵 하고 닫힌 순간에 눈이 떠지게 되면 이게 생각만으로도 기가 죽는다.


     


    이크, 징그러운 얘기를 줄창 썼는데, 이는 딱히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뇌사'라는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태도를 이 '공포'와 동전의 양면으로써 고찰해보자는 것이다.



    '장기 이식 법안'이 머잖아 국회에 상정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뇌가 불가역적으로 기능을 상실'한 사람을 사망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추세인 듯하다.



    '뇌사'로 판정되고 난 뒤에도 심장은 뛰고, 인공호흡기에 의해 호흡이 행해지며, 피부는 핑크색인 채로 온기도 있는데도 그 사람은 이제 '사체'가 된다. '죽음'의 기준이 지금보다 한결 가까워진 것이다. 이제까지의 심장사를 기준으로 하면 '살아있을' 터인 신체가 '사체'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뇌사 지지자의 많은 수는(법안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를 '장기이식'의 수급 문제와 인명 구조라는 문맥에서 의논하려 한다. 뇌사 판정에 의해 '펄떡이는' 장기가 이식 가능하게 되면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추진파의 주된 논거이다. 그것만 들으면 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엄격한 반론이 있다.



    본인의 동의 없이 장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문제. 생사의 판정을 전면적으로 의사에게 맡기는 것에 대한 저항. 장기의 절제, 이식이라는 신체의 도구적 취급방식 그 자체에 대한 심리적인 반발.



    양쪽의 주장에는 각자의 정당성이 있고, 선뜻 어느쪽에 설 그런 문제가 아니다.



    과연 여론조사에서도 '뇌사를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40%에 가깝다. 필자는 이러한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물어봤다. 다들 제멋대로들 말해서 영양가가 없다. 단호히 뇌사판정에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 각자의 우려를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찬성・반대의 기치를 선명케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여기서 만약 현행 ‘사망’ 판정이 변경되어 뇌사 판정이 채용된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 법한가를 생각이 닿는 대로 상상해 보았다. 무책임한 상상이지만, 한두 개 정도는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지극히 현실성 높은 악몽은, 국제적 ‘장기’ 밀매업자 동맹의 성립이다. 장기이식이 보편화된다는 측면에서 당연히 이는 예측 가능하다.

    이미 필리핀이나 인도에서는 장기 매매가 비합법적,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장기의 매각은 극빈자에게 있어서 매우 빠른 현금수입의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 이식 기술 덕분에 ‘인간의 신체’가 지금에 와서는 귀중한 재원이 되었다. 현재 인간의 신체로부터 심장, 간장, 신장을 적출할 수 있는 한편, 뼈, 신경, 연골, 각막, 중이, 피부, 혈액 등 거의 모든 부위를 채취할 수 있다.

    미국의 조직(tissue) 은행(신체조직을 사체로부터 채취 처리해 알선하는 기업이 이미 미국에 존재한다)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인간 한 명의 신체 가격은 25만 달러에 상당한다.

    ‘대체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보다 죽고 나서 꽤 높은 가격이 붙는다’는 모양이다.

    원가 450달러로 ‘떼온’ 심장이 5,500 달러로 ‘팔린다’는 것이므로, 직업적인 범죄 조직이 이 장사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건강한 장기를 쫓아 ‘인간 사냥’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옛적의 ‘노예 사냥’과 동일한 로직이다. 치안이 안좋은 지역, 인권의식이 낮은 지역, 행정 당국이 주민의 정확한 인구나 그 동태를 파악하지 않는 지역은 ‘인간 사냥’의 사냥터가 된다. 잡혀온 인간들은 앞바다에 기다리고 있는 노예선에 태워져서, ‘장기 창고’같은 곳까지 보내지고, 거기서 ‘주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피자처럼 신속하게 배달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공상이라 할 수도 없는 게, 의료 미스테리 전문가인 로빈 쿡은 <바이털 사인즈>에서 ‘태아 밀매업자’를 주제로 해서 똑같이 무서운 이야기를 썼다.

    또 한 가지 공상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뇌사자의 사체, 즉 ‘살아있는 사체’(biomort)는 ‘사람’인가 ‘물건’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뇌사판정을 추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현행 사망 기준으로는 장기이식이 ‘상해죄’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뇌사판정이 나면, 심장이 뛰고 있어도, 숨을 쉬고 있어도 그것은 ‘사체’이기 때문에 칼을 대도 형사법 위반이 되지 아니한다.

    그렇다 함은, 이를테면 임종 자리에서 남편의 뇌사가 선고된 뒤 갑자기 옆에서 병구완하던 아내가 ‘지난 날의 원통함을 깨닫게 해주마!’ 라고 부르짖으며 남편에게 올라탄 뒤 목을 졸라 심장을 멈추게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칼로 찌른다든지 하면 사체손괴죄가 될지도 모르겠다만)

    혹은 뇌사자를 옮기는 도중에 간호사가 들것을 뒤집어엎고 말아, ‘생사체’의 호흡이 멈추고, (즉 ‘사체’가 ‘죽고’ 만다) 장기 이식에 사용되지 못하게 되는 등의 일도 가능성으로서는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업무상 과실 치사’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그저 도자기를 깨뜨린 것과 같은 ‘기물 손괴’에 해당하는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뇌사와 관련해 가장 두려운 것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죽은 것처럼 장기를 취하게 된다’는 상상이다. 이는 에드거 앨런 포가 집착해왔던 ‘살아있으면서 매장당하는 공포’에 필적한다.

    뇌사에는 혼수, 호흡, 동공반사, 뇌파 등 여러가지 판정 기준이 있는데, 여하한 정밀 기계도 고장나는 경우가 있고, 어떠한 명의라고 할지라도 오진을 한다. 약간의 착오로 살아있는데도 ‘뇌사입니다’ 라는 선언이 내려지는 일이야말로 절대로 없다고는 말 못한다. (누군가가 뇌파 측정기에 연결된 코드에 발이 걸려 접속을 끊어버리게 되는 일도 생각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뇌사판정이 내려지고, 장기이식을 위해 외과의사가 바리바리 심장이나 콩팥을 한참 적출하고 있는데 ‘눈이 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아프다거나 고통스럽기보다도, 애통하다.

    뇌사 특위에서 ‘뇌사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온 우메하라 다케시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에서 폭주족 젊은이의 심장을 제공받은 50세 가량의 여성이 있었다. 누구의 장기를 이식받았는지는 극비 사항인지라, 물론 그녀도 기증자가 누구였는지 몰랐는데, 갑자기 오토바이가 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갑자기 참지 못하고 가까이에 있는 오토바이를 빌려 씽씽 달렸다는 것이다. (뭐, 이런 건 ‘도시전설’ 같은 종류로, 그다지 신빙성은 없지만 그러한 도시전설을 지탱하는 멘털리티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뇌사와 장기이식이 연상시키는 공포담이나 농담은 상당히 음험하다. 이를 문외한의 이유 없는 망상으로 치부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인류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공포’란 ‘접촉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본능적인 센서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섭다’라는 감각 덕분에 인간은 차츰차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말라는 게 우리들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다.


    (시간이 다소간 지난 뒤 같은 테마를 한 번 더 논했다.)


    이미 장기이식과 뇌사 문제에 관해 한 번 논했다. 그때 필자는 인간의 장기를 채취 가능한 부품으로 여기는 신체관에 대한 심리적 저항에 대해 썼다.

    법안이 머지 않아 성립하는 이상 이제와서 이러쿵저러쿵 해도 별 수 없지만, 만약 법안 성립을 계기로 뇌사자로부터의 장기 이식이 차후 급속하게 일상화되면, 그때에 생겨나게 될 ‘문화적인’ 문제에 대해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닐 것이다.

    장기 이식 문제에서 사람들이 거의 논하지 않는 문제 중 하나는, 서구 사회와 일본 사회 사이의 ‘사체’관의 거리감이다.

    예를 한가지 들겠다. 진주만에는 일본국의 공습에 의해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가 가라앉아 있고, 그 위에 기념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그다지 알려져 있는 않은 사실인데, 애리조나 선내에는 그때 침몰한 전사자들의 유해가 그대로 남아있다. 유해 발굴이 위험한 작업이므로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유족은 전사자가 각광받는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으며, 유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는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들은 유발이나 유품에조차 고인의 혼백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더구나 유해의 행방도 알고 있으면서 방치해둔다는 것은 상상 밖의 것이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현장에 급행해 유품 찾기에 혈안이 되는 나라 사람은 일본인 뿐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스 철학, 크리스트 교 이래의 심신 이원론 전통 가운데 있는 서구인에게 있어서 생명=영=정신 활동을 잃은 유해는, 그저 ‘물건’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썼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전부 그만둔다면, 아마 그 순간에 나는 존재하는 것을 전부 포기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정신을 잃고, 사물과 현상을 생각하는 것을 멈춘 육체는 ‘기계’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서구인의 기본적인 신체관이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그들의 사회에서는 유체의 내장을 발라낸다든가, 칼을 대고 봉합한다든가, 채색하는 등의 장의사 비즈니스가 경사스럽게 번창하는 것이다.

    조지 A. 로메로 영화에서 친숙한, 묘지에서 부활한 좀비들이 인간을 습격할 때에 ‘뇌수를 파먹겠다’고 말하며, 머리를 노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장의사가 사체 처리 때 유체로부터 내장 뿐만 아니라 뇌까지 발라버리고 말기 때문인 것이다.

    발라낸 뇌를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설마 곧장 ‘폐기물’로 내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다지 정중한 취급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장기 이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사회인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서구와 일본에서는, 사체에 대한 문화적 풍토가 다르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장기 이식은 서구에서는 일상적이고, 그래서 일본도 그것을 모방해 척척 장기 이식을 해야만 한다는 로직은 일견 알기 쉽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구와 일본 사이의 신체관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에 대해 꽤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스적, 크리스트 교 적인 심신 이원론을 함양한 서구 사회의 신체관을 좇으려거든, 장기는 호환 가능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쁜 장기는 적출하고, 좋은 장기는 어딘가에서 잘라붙인다는 것은, 망가진 자전거 부품을 신품으로 교환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에는,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신체나 장기를 그런 것으로 여기는 관념이 없다.

    우리들은 익숙한 도구에조차 ‘손때’가 묻는다고 하고, 거기에 사용자의 혼백이 남게 됨을 인정하며, 오랜 기간 쓰여진 냄비나 솥조차 ‘인격’이 붙기에 이르러, 심야 ‘백혼 야행’이라고 해서 대도회를 행진한다는 환상을 품는 특수한 민족 문화 가운데에 있다.

    하물며 누군가가 ‘오랫동안 쓴’ 장기에 혼백이 깃들지 않을 쏘냐, 라는 게 일본인의 평균적인 심리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장기 이식을 취재한 SF를 두 작품 떠올려보고 싶다.

    하나는, 쓰쓰이 야스타카의 (옛날 옛적 작품인) <나의 피는 타인의 피> (영화화된 바 있다). 지금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이 또한 영화화되었다) 세나 히데아키의 <패러사이트 이브>가 있다. 둘 다 장기 이식이 일본적인 문화 풍토에서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작품에 공통되는 내러티브는, 이식된 장기(쓰쓰이의 경우 혈액)과 함께, 장기 제공자의 ‘인격’이 장기 수용자의 신체에 스며들어간다는 것이다. 쓰쓰이의 경우 마피아 두목의 피를 옮겨받은 남자가 폭력적인 인격 변이를 일으킨다는 이야기. 세나의 경우, 신장 이식을 받은 소녀인데, 죽었을 터인 ‘사체’가 자신의 일부를 되찾고자 돌아온다는 호러(였다는 느낌이 든다. 아닐지도 모른다.)

    여하튼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작품에 공통되는 바인,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간주되던 신체의 단편에조차 그 주인의 ‘인격’이 깃들어 있다는 ‘심신 일원’적 사태는, 우리들의 문화적 풍토에서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좀비 영화를 보고 자란 서구 SF 작가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아이디어라는 것도 된다.)

    앞으로 장기 이식을 경험하는 일본인은 자신의 신체와 이러한 문화적 맥락과의 ‘비틀림’ 속에서 분절을 경험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신체는 외과적 처치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의 정신에는 이 신체적 변용을 어려움 없이 벗어나는 심리적 기준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타자의 장기를 접속해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이란 어떠한 것인가, 또한 어떠한 심리적 케어에 의하면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의사들은 그러한 물음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회의적이다.

    우리나라와 서구의 ‘사체’관 사이의 위화감을 뼈에 사무치도록 맛보고 싶은 사람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베이비 오브 마콘>을 보면 된다. 이 영화는 유럽의 교회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성 유체(성인의 사체 일부이다)가 어떻게 채취되는가를 대단히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단히 리얼하기에 영화관에서 필자 뒷자리에 앉은 젊은 커플 중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분간 고기는 못 먹겠어’라고 중얼거렸다.)

    이 영화는 우리집 근처 비디오 대여점에서 ‘호러’ 코너로 분류되어 있다. 그리너웨이가 본다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필자는 비디오 대여점 아르바이트생의 견식을 지지한다. 피아의 문화를 가르는 심연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어둡고, 또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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