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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코야 세미나 2학기 오리엔테이션 '코로나 이후의 세계'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1. 29. 07:00
여러분 안녕하세요. 2개월 만에 데라코야 세미나 2학기를 개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후반기의 테마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입니다만,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수많은 강연을 하고, 원고도 많이 썼습니다. 일을 상당히 많이 부탁받아서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줄곧 똑같은 제목으로 말한다든가 쓰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이지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의 세상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그 양상 중 한가지겠습니다.
2020년 초에 세계적인 팬데믹이 일어났습니다만, 당시에 '코로나는 그저 감기에 불과하다, 감염증같은 걸로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지도 않을 뿐더러, 세상도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 강자입니다. 건강하고 활동적인 분들입니다. 감기에 걸릴 인간은 걸리고, 죽는 인간은 죽는다. 아등바등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의 세계' 따위의 프레임으로 현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코로나 같은 걸로 세상이 바뀔 리가 없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다,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감염증이 커다란 사회 변동을 일으킬 경우 그로 인해 '좋지 못한 일'이 자신의 신상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세상이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절실합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키도 도장을 연 제 입장에서 수련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과 관련해 코로나로 인한 장기간에 걸친 제한과 중지가 불가피했습니다. 수련할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심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도 했거니와, 물론 재정상 큰 폭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 팬데믹이 그리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나갈 것인가 앞으로 궁리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마무리지어지고 난 뒤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분야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생겨나리라 보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세미나 2학기입니다만, 여러분 각자의 관점, 문제의식, 관심 영역과 관련해서, 이 팬데믹 차후의 일본과 세계가 입을 불가역적인 변화, 지각변동적인 변화란 무엇인가를 각자가 관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찾아내자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세미나 참가자 전원이 공유해두어야만 할 전제가 될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로, 인수공통감염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마무리된 뒤에도 반복해서 발생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전문가가 예언한 대로입니다.
야생동물에 기생하고 있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고 변이되며 전 세계에 확산되어 가는 것이 인수공통감염증, 혹은 동물원성 감염증입니다. 이제까지는 주된 발생지가 아프리카였습니다. 이전까지 인간이 밀고들어간 적 없는 야생의 영역이 개발되고, 거기에 인간이 진출함으로써 야생동물과 접촉하여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생했습니다. 인수공통감염증은 21세기 초입만 따져봐도 4번 일어났습니다. 2002년 SARS,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MERS,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감염케 한 동물은 낙타, 돼지, 새, 박쥐 등등. 약 5년에 한 번이라는 주기로 팬데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구 추세가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선진국과는 다르게 아프리카의 인구는 앞으로도 증가해나갈 것이므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 기회는 향후 계속 늘어나게 될 판입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서의 인구 증가와 개발이 계속되는 한, 인수공통감염증의 아웃브레이크는 구조적으로 막지 못합니다.
한편, 아시아에서 위험한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이 미얀마입니다. 동아시아 최대의 열대우림을 갖고 있는 이 나라는 다종다양한 야생동물의 서식지입니다만, 남획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미얀마는 야생동물 밀렵과 밀수의 중심지 중 하나입니다. 현재 미얀마는 통치기구와 경찰이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열대우림에서 야생동물이 밀렵되거나 밀수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미얀마 발 감염증의 출현 리스크가 큽니다. 인수공통감염증이 신종 코로나로 끝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제 5파가 맹위를 떨친 뒤 감염자 수가 격감했습니다만, 그 이유를 모릅니다. 의사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는데, 누구도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이러스의 동향은 지극히 알기 어렵고, 앞으로 어떻게 변이할지도 전망할 수 없습니다. 일단 신규 감염자가 줄고, 일상 회복이 이루어져도 얼마 안 있어 또 어딘가에서 다른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증이 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사회제도는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팬데믹에 적응한다는 형식으로 사회의 프레임을 재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문제와 씨름할 적의 가장 첫째 되는 전제조건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경제 시스템에 관한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파동으로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다국적기업이 이끈 글로벌 자본주의가 정치나 경제의 작동방식을 바꾸고, 마침내 생태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다국적기업은 어느 국민국가에도 귀속하지 않으며, 어느 국민에 대해서도 '동포'라는 감각을 품지 않고,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체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업의 오만방자한 활동을 막지 않으면 이제 지구 환경은 버티지 못하고, 빈부 격차도 확대되며, 우리들의 생활 기반 그 자체가 파괴되고 맙니다. 어떻게든 글로벌 자본주의의 활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국제 사회에서도 그 찬동의 뜻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SDGs가 그렇습니다. 이는 유엔이 제안했는데 빈곤을 퇴치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지킨다는 등의 목표를 내건 대응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UN은 국민국가의 연합체이므로 이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국민국가로부터의 이의 신청'이라는 식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봅니다.
UN 뿐만이 아니고, 지금 전 세계의 청년이 중심이 되어 다국적기업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기후변화를 억제하려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의 저자로 맑스주의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이토 고헤이 씨 같은 신진 경제학자도 나왔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를 이대로 가만 놔두면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겠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에 대한 억제로서 작동했습니다. 물류가 멈추고, 기업의 경제활동이 정체되며 비행기도 뜨지 못한 나머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고, 여러 나라의 대기오염이 완화되었고 해양이 정화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사람이나 상품의 크로스보더적 활동이 억제됨으로써 환경 부담이 경감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코로나는 자연이 문명 사회에 '적당히 좀 하라'고 따끔하게 질타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억제와 국민국가의 재구축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국민국가의 연합체인 UN(United Nations; UN은 일본어로 '국련' 곧 국가 연합 - 옮긴이)이 주도해 SDGs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 억제'정책을 제언하였으므로, 국민국가는 본질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와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성립된 새로운 세계 패러다임입니다. 한 지역에 동일한 인종, 동일한 종교, 동일한 언어, 동일한 생활문화를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동질성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편,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게 '국민국가'라는 개념의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러한 것이 태초부터 존재했던 게 아닙니다. 그 이전은 제국의 시대로, 거대한 제국 안에 인종, 종교, 언어가 다른 다민족이 공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경부터 변화가 일어났는데, '제국'을 정치단위로 생각하는 것보다, 동질성 높은 '국민국가'라는 것을 기본적인 정치 단위로 간주하는 게, 당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사건을 설명한다든가, 미래를 예측한다든가 할 때에 적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민국가'를 정치단위로 두는 사고방식이 채용되었습니다.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정비된 연유로 채용된 아이디어이므로, 역사적 조건이 바뀌면 유통기한이 지나면서 다루기 불편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글로벌 기업은 복수의 국민국가에 걸쳐 활동합니다. 가장 인건비가 싼 곳에서 사람을 뽑고, 가장 공해 규제가 느슨한 곳에 공장을 지으며, 가장 세금이 싼 곳에 본사 기능을 옮깁니다. 어떠한 국민국가에도 귀속되지 않고, 어떠한 국민국가의 '국익'도 배려하지 않습니다. 어느 국민국가의 구성원도 신경써야 할 '동포'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업체입니다.
일본 기업인 이상, 일본 국내에서 조업해 고용을 창출하고, 일본의 국고에 세금을 납부하며, 일본의 동포들에게 싼 값에 질 높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본의 생태계나 전통문화를 지켜내야만 한다... 는 게 전통적인 '국민 국가 내부적 기업'의 명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에게는 이제 더는 그러한 '구속'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속' 없는 기업이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합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영리기업이 글로벌화를 목표로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업의 형태가 지배적이게 되면 국민국가는 더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글로벌 기업과 국민국가가 '상성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EU는 역내의 국경선을 사실상 폐지하고, 사람이나 상품의 출입을 자유화하며,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했습니다. 그 결과, 복수의 국민국가가 마치 하나의 '제국' 같이 기능하는 게 이론상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U의 판도는 일찍이 신성 로마 제국의 그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국민국가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고 여겨져 왔는데,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다고 여겨졌던 국민국가의 국경선이 다시금 '역학적(疫學的)인 벽'으로 부활했습니다.
국경선은 환상이 아닌, 리얼한 벽이었습니다. 유럽 사람이 그것을 실감했던 계기가 의료분야입니다. 2020년 초에 이탈리아에서 유럽 최초로 의료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즉각 EU 동맹국인 프랑스나 독일에 의료 지원을 요청했지요. 그렇지만 프랑스와 독일 모두 의료품 수출을 끊었습니다. 자국민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배려한 것입니다. 어떠한 상품이나 서비스도 자유로이 국경선을 넘어 왕래할 수 있었을 터였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7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전사자 수를 뛰어넘는 숫자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기술을 보유한 미국에서 의료붕괴가 일어났던 것은, 감염확대 초기에 마스크나 방호복, 검사 키트 같은 기초적인 의료품을 비축해두지 않았던 탓입니다.
미국은 의료분야도 경영자 마인드가 철저하므로 불필요한 재고를 쌓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큼, 시장에서 조달한다'는 저스트 인(Just In) 생산 시스템이 이상적이라고 간주됩니다. 그래서 마스크나 방호복 같은, 특단의 기술도 필요 없고, 원단과 재봉틀만 있으면 만드는 심플한 의료품은 국내생산 따위 하지 않습니다.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 개발도상국에 아웃소싱했습니다.
그 탓에, 감염이 확대되자 그것들을 '즉각 필요'로 할 때에 국내에 비축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문을 넣고자 해도 전 세계 나라들이 앞다투고 있으므로 입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불요불급한 재고를 떠안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경영자의 행태다'라는 기업 경영자의 상식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해외에 아웃소싱해서는 안된다'라는 국민국가의 상식보다 우선한 결과입니다.
'리스크 헤지'란, '홀짝 도박'에서 홀수와 짝수 모두에 거는 것입니다. 대비해 둔 절반은 허사가 됩니다. 하지만 주사위의 어떤 눈이 나와도 상관 없습니다. 이 '허사'를 경제학 용어로 '슬랙(slack)'이라고 말합니다. 만일의 때를 대비해 '융통' '완화' '여유로이' 하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슬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비즈니스맨은 슬랙을 그저 '낭비'로밖에는 보지 않습니다. 감염증 대비를 위한 의료품도, 감염증 전용 병동도, 감염증 전문의조차도 감염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원의 낭비'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비즈니스 마인드로 의료 시스템을 설계하고자 할 때, 언제 닥칠지 모를 감염증을 위해 전략적 비축을 해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렇게 미국의 의료붕괴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국민국가의 상식과 자본주의의 상식 사이에 커다란 '엇갈림'이 있다는 것을 전경화시켰습니다. 그것이 코로나가 가져다 준 중요한 교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경선의 '이쪽'은 의료체제가 정비되어 있었던 덕에 코로나를 앓아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국경선의 '저쪽'은 의료붕괴가 일어난 탓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같은 병에 걸려도 국경선의 이쪽과 저쪽에서 생과 사가 엇갈린 것입니다. 국경선이 이만큼 결정적인 경계선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라졌을 터였던 국경선이 '역학적인 벽'으로서 다시금 재건되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내셔널리즘이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는 것과 이치가 통합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그에 대항하는 내셔널리즘의 각성이 세계 각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브렉시트를 선택한 영국, '미국 제일주의'로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트럼프 대통령 시절의 미국 뿐만 아닌 유럽에서도, 배외주의적인 정당이 프랑스, 독일,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배외주의적 언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정치가가 늘어났습니다. 이는 코로나 이전부터 세계적인 경향이었습니다만, 코로나가 국경선의 분단 기능을 강화한 이상, 내셔널리즘은 더욱 항진할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전경화된 것이, '교육의 아웃소싱'입니다. 코로나 2년 째에 들어서고 나서 이것이 뼈에 사무친 사람도 많을 것이라 봅니다. 저는 이제까지 교육현장에서 90년대 이래 '교육은 해외에 아웃소싱할 수 있다 / 아웃소싱해야만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1991년에 대학 설치 기준 간소화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저출생과 맞물려 대학의 도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문부성은 어느 대학을 살리고, 어느 대학을 퇴장시킬까를 결정하는 데 '시장 위탁'이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메이지 이래 일본의 학교 행정은 '어떻게 하여 양질의 교육 기관을 만들어낼 것인가. 어떻게 하여 국민에게 할 수 있는 한 많은 취학 기회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목표를 지향해 왔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하지만 인구 감소가 시작되고, 교육 기관을 도태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문부성은 '학교를 늘리는 방도'는 몇 개나 낼 수 있지만, '학교를 줄이는 로직'에는 손쓸 수단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장에 하청'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학교가 살아남을지, 어디가 사라질지를 '소비자'가 정해야만 한다는 비즈니스 논리에 매달린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일본 행정은 '국내에 세계 수준의 고등교육을 유지한다'는 동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애초에 시장에서 상품 서비스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양질의 상품이어도 살 사람이 없다면 시장에서 퇴출되고, 아무리 쓰레기같은 상품이라도 시장이 환영하면 살아남습니다. '시장은 틀리지 않는다'는 룰을 따르려고만 들면, 학교는 '시장이 호감을 표하는 교육 상품'의 제공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교육에 시장원리가 도입된 당연한 귀결로서, '교육의 글로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영어로 수업하고, 외국인 교원을 고용하며, 해외 협력 학교에 유학생을 보내고,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등의 일을 열심을 다해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꿔 말해서, 전 세계 어디서든 선호하는 학교에서 선호하는 학습 기회를 '구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이 됩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시장에서 조달하면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국내에 수준과 종류가 천차만별인 학교를 마련해둘 필요는 더이상 없다 하는 말이 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서구에 그런 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학력이 높고 경제력 있는 자녀들은 하버드, 옥스퍼드, 스탠퍼드, 베이징 대학 등 어디든 가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21세기 들어서 늘어났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그게 지배적인 여론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일본 국내에 세계 수준의 교육 기관을 일부러 높은 비용을 들여서까지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웃소싱 가능한 것은 아웃소싱하면 되니까요.
그 결과, 실제로 상위계층은 자녀들을 중등교육 단계부터 유럽의 보딩 스쿨이나 미국의 프렙 스쿨에 보내는 게 유행했습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서구의 수준 높은 교육을 실제로 받게 한 사람들이 일본의 교육 제도를 설계했으므로, 국내 교육 수준은 당연히 저하됩니다. 일본의 교육 제도는 '못쓴다'는 판단을 내린 바로 그 이유로 해외에 유학시켰으니, 그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교육이 '포기할 만한 이유가 많은 최악의 것이다'라는 현실을 창출해내는 게 가장 확실합니다. 그래서 엘리트 교육은 해외에 하청하면 된다고 제멋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국내 학교는 그저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마다 않고 지시 한 번으로 해외에 부임할 수 있는 예스맨 사원'을 대량 생산하는 일에 특화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이제 일본의 사회지도층에게 일본 대학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고자 하는 동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초기에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을 때,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했던 것은 일본의 대학에서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를 구사해 세계 표준 내용의 수업을 하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한 세대만에 그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로 인해 일본의 근대화가 달성되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학술 논문을 일본어로 써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일본어로 세계 수준의 학술 정보를 발신 및 수신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구 이외의 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교육의 아웃소싱'은 그 메이지 이래의 전통을 부정합니다. 일본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모국어로 고등교육을 행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서는 학술적인 이노베이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노베이션이라는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조어(neologism)를 모국어로밖에는 만들지 못합니다. 모국어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는 입에 담은 순간 모국어 화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미묘한 뉘앙스가 전해집니다. 처음 들은 말인데도 의미를 알 수 있어요. 그것이 모국어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모국어는 수천 년 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말해왔고, 써왔던 언어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본인의 기억 밑에 깊숙이 침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근저에서 솟아오르듯이 터지는 말은, 신조어여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외국어여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영어로 신조어를 생각해내어 말을 해도 '그런 말은 없다'는 말만 들을 뿐입니다.
몇 년 전쯤에 이케자와 나쓰키 씨의 부탁을 받아,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를 현대어로 번역했던 적이 있습니다. <쓰레즈레구사>같은 건,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조금 읽었다 뿐이지 전문을 통독해본 적도 없고, 고전 문학도 수험생 시절 이후로는 손대지 않아서 과연 할 수 있을까 불안했습니다만, 고대어 사전을 한 손에 들고 현대어 번역을 해나가다 보니 이게 대충 뭔지 알겠더라고요. 요시다 겐코는 800년도 훨씬 전의 사람입니다만 요시다 법사도 저도, 똑같은 일본어 화자입니다. 현대 일본어도 겐코 시대의 일본어도 '뿌리는 같다'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쓰여진 신조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더는 쓰이지 않게 된 고대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겐코 법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상당히 미묘한 뉘앙스를 포함해 어떻게든 알게 됩니다. 과연 '모국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국어 화자는 이렇게 모국어가 수천년 간 쌓아온 축적물에 전부 액세스 가능한 겁니다. 더는 쓰이지 않게 된 말도, 아직 쓰여지지 않은 말도, 거기에 아카이브되어 있습니다. 기실 거기에서 풍성한 것들을 끌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긴 해외 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 이유 중 하나로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아무리 잘하고 회화와 문장에 거침이 없어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영어 아카이브에의 액세스에 엄격한 제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화자가 영어로 '정말 참신한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은 지극히 힘듭니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만 25명이 있습니다만, 이만큼의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서구 이외에 일본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3명, 대만은 2명, 한국은 0명,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도 0명입니다. 지금은 어느 나라든 대학원 수준에서의 자연과학 논문은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모국어로 영어와 동등한 수준의 학술 정보 교환이 가능한 환경이 갖춰졌는지의 여부가 차이를 빚어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국어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교육을 행할 수 있는 환경 정비는 국력의 유지상 필수라는 것을 이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이 지금은 소수파입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으로 2년 가까이 유학생을 보낸다든가 맞이하는 일이 불가능했으므로, '교육의 아웃소싱'이 적잖이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학자든, 아티스트든, 과학자든, 혁신 기업가든,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일류의 인간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해답은 딱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배울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잠재능력을 있는 힘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한 구조를 갖추어 둔다면, 누구의 통제 없이도 세계 제 일선에서 활약하는 인간이 자연스레 배출됩니다. 딱히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업이 아닙니다.
아웃소싱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료와 교육 이외에도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 식량, 에너지 등이 그렇지요. 인간이 집단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 국가 안전 보장의 근간에 관련된 것 말입니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은 원칙적으로 '자급 자족'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실제로 완전한 자급 자족은 무리겠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노력만큼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은 분기점이라는 게 제 인식입니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많은 시스템들에 의문부호가 찍히는 한편,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인가, 나쁜 방향으로 바뀔 것인가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내셔널리즘은 어디에 경도되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내셔널리즘의 부활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억제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국민국가의 벽이 재구축되고, 세계가 분단되며, 모든 나라마다 '자국 우선주의'를 주장하게 되고, 국제 협력이 지장이 생긴다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전번에 나고야에서 강연을 했을 적에, 객석에서 '포스트모던 다음은 어떤 세상이 오는 것일까요?'라는 상당히 본질적인 질문이 나왔습니다. '포스트 포스트 모던 시대'란 무엇일까.
포스트 모던 시대는 근대를 구동시켜 왔던 낙관론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근대의 서사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진보 사관에 의해 영도되어 왔습니다. 다소의 곡절이 있어 왔긴 했지만 인류는 결국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평화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거대 담론'이 근대의 통주 저음(通奏低音)이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세상이 되고 나서 그 이야기는 부정당했습니다. 대신 등장한 게, '역사에 목표는 없다' '인류는 딱히 진보하지 않는다'는 상당히 니힐리스틱한 역사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관적인 편향성이 끼어든 세상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이야말로 '객관적 현실'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상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이 한 경험의 객관성을 과대평가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건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사상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가일층 폭주해 '객관적 현실'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제멋대로 '입맛에 맞는 현실' 가운데 안식을 찾으면 된다는 얘기가 되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때, '과거 대비 최다 인원이 참관했다'는 백악관 보도관의 거짓말에 대해, 대통령 고문은 그것이 '또 하나의 사실(alternative fact)'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좋을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거기에 진위의 차는 없다는 사고방식이 공적으로 언명된 것입니다.
내셔널리즘의 열화된 형식이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은 이렇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다른 세계관에 집착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세계상에 '틈입'해보려는 노력을 방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포스트모던 이후'에 오는 것은 전(前) 근대라는 말이 됩니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세화'됩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할 적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이겁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전근대로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목격됩니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가능케 했던 것은, '공생(커먼)'이라는 개념의 탄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인이 자신의 자기이익만을 추구하여 행동한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근대적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약육강식의 무법 사회에서는 항상 누군가에게 사유재산을 도둑맞고, 누군가에게 사적 권리를 빼앗길 리스크를 염려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적 권리의 제한을 받아들이고, 사유재산의 일부를 공공재에 위탁함으로써 '국가라는 공공'을 수립하고, 거기에 따름으로 해서 장기적, 안정적으로 자기이익을 확보한다, 하는 게 근대 시민 사회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홉스, 로크, 루소 모두 그러한 로직으로 근대 시민 사회에 있어서의 '공공' 개념의 필요성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 사회에서 관찰되고 있는 것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입니다. 정치가, 관료, 기업가 모두 공공재를 열심히 사유화하면서, 공권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을 지출하고, 사적 권리의 제한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공공성을 손수 세우려는 행동을 하는 인간은 일본의 지도층 중에서 한 명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끄럽게 '사유재산을 갹출하고 사적권리 제한을 받아들여라'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공공 기반을 다지고 기능케 하려는 인간은 '공인' 가운데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공공을 위해 호주머니를 털 수 있는 시민'이 등장함으로써 근대가 성립했다고 한다면, '사리사욕을 위해 공공재를 훔치고, 공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공직을 점하고, 통치 기구를 지배하며, 기업 활동하고 있는 사회는 곧장 '근대 이전'으로 퇴화하게 됩니다.
공공에 숨결을 불어넣고, 갈 데까지 가버린 글로벌 자본주의나 개인의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온건한 방향으로서의 '인간의 얼굴을 한 내셔널리즘'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셔널리즘은 국민국가라는 정치 환상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므로 내셔널리스트는 국경선 안쪽에 있는 '국민'들에 대해서는 그 모두를 '동포'로 수용, 지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내셔널리즘의 '약속'입니다. 일본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금방 '특별 대우'해주고 맙니다. 그러한 치우침이 내셔널리즘의 심리적 기초를 이룹니다. 그래서 우선 동포가 제대로 먹고살 수 있는지 신경쓰고, 동포가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염려한다... 는 게 내셔널리스트의 본래 모습일 터입니다. 그러한 내셔널리스트가 정치 지도자라면 상당히 괜찮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 '내셔널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일본인을 편애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일본인 모두에게 동포적인 친밀감을 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자기 이익에 부합하도록 분단하고, 자신의 지지자와 자기편, 자기 측근을 '편애'하며, 자신의 적, 반대자, 외부자는 일본인이라고 할 지라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렇다 함은, 그 사람들에게 '내셔널리스트'라는 호칭은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부족주의(트라이벌리즘)'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을 오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금의 넷 우익(극단적 언사를 일삼는 극우파 - 옮긴이)이라든가 '보수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우익, 보수,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 단지 '부족주의자'일 뿐입니다.
전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안정된 기반 위에 성립한 국가란 거의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상태이며,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거의 붕괴될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안고 있습니다. 나라 뿐만이 아니고, 소위 사회적인 분야도 사소한 입력 변화로, 크게 변질된다든가 와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관점을 달리한다면 '찬스'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까지 고정적이면서도 꿈떡 안 했던 시스템이 코로나로 인해 기우뚱 흔들렸습니다.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아차 하는 순간 전복될지도 모릅니다.
2학기에는, 코로나 전후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그 변화는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혹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등을 포함해 자유로이 발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흥미를 갖고 있고 잘 아는 분야, 다양한 분야도 그러합니다만, 좀 더 전문적인 이야기여도 상관없습니다. 저와 똑같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미래예측을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또한, 앞으로 미국이나 중국, EU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식으로 국가나 지역을 거론하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은 이상의 내용입니다. 질문이나 감상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현장 참가자부터 시작하죠. 이지치 교수님, 부탁드립니다.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 시립대학 문화인류학 교수; 주된 연구영역은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민족지 - 옮긴이)
(이지치 교수)
우치다 선생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 중에,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이 실은 트라이벌리즘이 아닌가 하는 부분에 대해 저도 굉장히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한국의 대외적인 관광 전략 얘기인데요, 서울시가 내세운 관광 캐치프레이즈가 'EoGiYeongCha'라고 해서, 고유어인데 옛날부터 즐겨 쓰이던 구호입니다. 의미는 일본어로 치면 '요이쇼' 라든가 '엥야꼬라' 정도죠. (한국어를 알 길 없는 전 세계인을 상대로 - 옮긴이) 한 도시를 상징하는 프레이즈에 그런 번역 불가능한 표현을 택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자신감이 표출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국 뿐만이 아니고, 요즘 경제력이 있는 나라들마다 내셔널리즘 혹은 그것이 도출해낸 배외주의가 확산되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한반도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고로 재일 코리언인 벗이 많은데요, 이 가운데 일본 국적을 가진 분들이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분만 나가는 게 아니고, 다른 나라 출신 분들이 연대하는 식으로요. 역사적 배경을 반드시 공유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너희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배외주의적으로 가다간 재미 없어진다구' 하는 생각 또한 공유되기 시작한 점도 있습니다. 옛 식민지 출신자로서 갖고 있던 정체성이 시험당하고, 물론 일본 사회도 시험당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배경에는, 일본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데요......
(우치다 선생)
음, 흥미 깊은 이야기로군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다카모토 씨.
(다카모토 씨)
제 주위에서도 지금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이익이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학교 교육 현장에서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들, 그 보호자 분들, 그리고 고용 불안정 등 여러 어려움을 안고 일하는 여성 등에게서 이제 버티기 힘들다, 비슷한 멘털리티가 절절하게 전해집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새로 출범한 기시다 정권이 '이제 코로나는 끝났다'는 식의 메시지만 내보내고 있는 가운데, 위에서 말씀드린 사람들 사이에 번아웃 증후군 비슷한 것이 나오는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상당히 듭니다.
한편으로는 줌 등 온라인 상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서 열심히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공개 대화의 실천 확대를 꾀하려 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대단히 좋은 징조로 보입니다.
세미나에서 발표하시는 분들은 부디 '이런 식의 희망도 있습니다' 라든가 '이런 밝은 면을 봐주십시오' 등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교육 현장에 있으신 분들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게 제 감상입니다.
(우치다 선생)
줌 참가자 분들은 없으신가요? 손들어 보실래요?
(와타나베 씨)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내셔널리즘을 본래와는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내셔널리즘보다 범위를 좁혀서, 좀 더 지역을 중시하는 애향주의, 패트리어티즘을 말하는 게 지방 분권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우치다 선생님처럼 내셔널리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좀 위화감이 느껴져서요.
(우치다 선생)
국민국가라는 것은 정치적인 의제(擬制), 즉 픽션이지요. 어쨌든 이런 불안정한 개념을 발판삼아 좀 고쳐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국민국가를 결속시키고, 국민에게 정치적인 에너지를 배급하는 장치가 내셔널리즘입니다. 하지만 다루기가 극히 어려워요. 금방 폭주해버리고, 방심했다가는 간단히 트라이벌리즘으로 열화되고 맙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그렇다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이 내셔널리즘이라는 다루기 까다로운 것을 조작하고 있음에 대한 경계심을, 양심의 가책을, 어떤 종류의 함축을 느끼면서, 주의를 기울여 이 장치를 구사하는 겁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내셔널리즘'이라고나 할까요(웃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인드를 숙성시켜서, '고개를 살짝 숙인 내셔널리스트'가 되어가는 것이 착지점으로서 건전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떠실까요.
(와타나베 씨)
저로서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계기로 일본 사회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분기점을 뛰어넘어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의 올림픽 행사라는 것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12월 정도에 발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치다 선생)
고맙습니다. 그럼, 6시 반이 되었으므로 앞으로 담당자를 맡을 분을 정해서 와주시기 바랍니다.
(2021-11-23 09:4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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