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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덕책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1. 23. 07:00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도덕책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응, 쓸게' 하고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보통은 뭘 쓸까 결정하고 나서 받아들이는 겁니다만, 이번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데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쓰면서 생각해보자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도덕에 관해 써야만 하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도덕에 관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데서부터 쓰기 시작하려 합니다.

     

    어째서 '무엇을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일까. 그것은 '도덕'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입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애초에 도덕이란 말이지…'와 같은 설교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거지요.

     

    왜냐면 '도덕'이란 지극히 평범히, 누구나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누구라도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됩니다.

     

    도덕이라는 단어를 나도 씁니다. 마치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새삼스레 '도덕 책을 써 줬으면 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대체 도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떠한 것을 말하려 하는 건가, 잘 모릅니다.

     

    보통 평범하게 쓰는 말인데도, 새삼스레 '그것은 본래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말을 들어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도덕이라는 것이 그만큼 감당이 안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취급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 '만만찮은 말'에 대해, 이제부터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앞으로 제가 쓰는 것은, 사전에 준비해둔 이야기가 아닙니다. 쓰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정돈되어 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읽고 나서 '과연 그렇군' 하는 개운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처럼 오래 살아본 인간이 갑작스레 '도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마당에 그걸 쉬이 설명 못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곧잘 쓰이면서도 사실은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아무도 모르는 말이 있습니다. '있습니다' 이기는커녕, 살펴보면 그런 말들 뿐입니다.

     

    하지만 의미에 대해 모두가 합의해놓지 않으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느님'이란, 그것이 실제로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면 누구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내가 봤다'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만 논외로 하죠). 애초에 '하느님'이라는 것은 '인간 지성을 초월한 것, 인간의 감각이나 지력을 가지고서는 감지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라는 것은 어쩌구저쩌구 이러쿵저러쿵한 것이지' 하고 인간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쓰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곤란해집니다(<하느님>이라는 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법이지요' 라는 공론조차 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뜻은 잘 모르지만, 씁니다. 뜻은 잘 모르지만 우리들은 교회나 절에 갈 수 있습니다. 거기 가서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충 알고만 있으면 됐지, 정확한 의미를 정의할 수 없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충이라고는 해도 아이들이 생각하는 '하느님'과 어른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의미는 아마 상당히 다를 겁니다. 여러가지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든가,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것을 경험하게 되면 어른들은 '하느님'에 대해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채로 어렸을 적에 했던 것보다 더 깊은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취할 만한 '하느님은 분명히 있다'는 깊은 확신이라든가,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는가' 하는 불평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방향이 있습니다만 그때 쓰인 말에는 경험이라는 보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실감이 담겨있습니다.

     

    의미는 정의내리기 힘들지만 여러가지 경험을 쌓아가는 와중에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이해해두기로 했다. 나는 이러한 의미로 쓰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통째로 공유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도출해낸 '단어의 의미'에는 나름대로의 무게감이나 확고함이 있습니다. 의미를 잘 모르는 채로 쓰는 말이라는 것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도덕도 그것과 비슷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어쨌든 자기 나름의 '대체로 이러한 의미일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단어의 깊이나 심오함, 접근성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물론 도덕에도 사전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갖고 있는 일본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나 규준'.

     

    과연, 그런 거군요. 하지만 여기에도 써있네요. '한 사람 한 사람'이란 말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킴으로 해서 '모두 다함께'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다 함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그 '행위의 규준'을 정하는 것이므로 어디 다른 누군가가 우리들을 대신해 정해주는 게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대신해 정해주는 일반적인 '행위의 규준'이라면 그것은 '모두가 지키는' 것이라야만 하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키는' 것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쓰는 것은, 결정하는 것도 자신, 지키는 것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도덕에 들어맞는다.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이다'라고 자신이 판단하고 실천합니다. 타인에게 판단을 맡기는 일도, 타인에게 강요당하는 것도 안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도덕적이므로 이렇게 하시오' 라고 명령한다면, (설령 그 명령이 상당히 올바른 듯 보여도) '그런 건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가 결정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 겁니다.

     

    '도덕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에서 거론한 '하느님'의 경우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에 의해 상당히 차이가 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사람에 따라 경박한 도덕과 중후한 도덕이 있습니다. 밑천이 금방 드러나는 도덕과 속깊은 도덕이 있습니다. 싸늘한 도덕과 따뜻한 도덕이 있습니다. 가벼운 도덕과 무게감 있는 도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도덕과 틀린 도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올바른 도덕'인 것입니다. 그저 거기에는 정도의 차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차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달성한 성숙의 차이입니다.

     

    성숙한 사람의 도덕은 깊고 중후하며 따사롭고 무게감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의 도덕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성숙한 인간이 되어서, 성숙한 도덕을 좇아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게 이해하기 쉬우실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지하철이 만원이라 앉을 좌석이 없습니다. 거기에 한 손에 아기를 안고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여성이 탔습니다.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해줬으면 좋을텐데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고등학생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서 자리를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아저씨 한 명이 그 고등학생 중 한 명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하게. 자네는 젊으니까 말이네'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럴 때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그랬더니 자리를 양보하라는 말을 들은 고등학생이 아저씨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당신은 지금 나한테 <일어서라>고 하는데, 어째서 내가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는 거죠' 하고 모나게 굽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아무리 고등학생이라도 지칠 때가 있고, 혹은 겉으로는 표나지 않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도 있겠죠. 당신은 내 건강상태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이 차량에 있는 다른 모든 착석자들 가운데 하필이면 내 앉을 권리를 포기하게끔 명령하는 당신에게는 어떠한 합리적 근거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해 왔습니다. 뭐, 보통 고등학생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만, 편의상 그렇다고 해 봅시다.

     

    확실히 아저씨로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난처합니다. 지하철 안에서 누가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같은 건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일어나 있어도 상관 없는' 건강 상태인지 따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이러한 경우에는 평균적으로 가장 체력이 있을 듯한 고등학생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적 판단에 좇아 발언한 것뿐입니다.

     

    그에 대해 고등학생이 '그건 당신이 멋대로 만들어낸 주관적인 룰에 지나지 않으니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만한, 일반성 있는 룰에 따라 판정해주십쇼' 라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자 그럼 어느 쪽이 말이 될까요.

     

    분명히 양쪽 모두 말하는 바는 옳습니다. 아저씨도 옳고, 고등학생도 옳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올바름'이 서로 대립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문제('애 딸린 여성에게 누가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 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저씨와 고등학생 사이의 알력 때문에 객실은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도 자신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나 도리어 난처해졌습니다. 누군가가 '일단 제가 일어설 테니 그만들 하시지요' 하고 아저씨와 고등학생을 향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보지만, 머리에 피가 쏠린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아저씨가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이에 고등학생이 '도덕적'으로 응함으로써 사태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때보다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런 겁니다. 모처럼 사람들이 각자의 '도덕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방금 전 썼던 대로 도덕의 규준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도덕의 규준을 자신 한 사람에게만 한정적으로 적용하는 한 이런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길에 떨어진 빈 깡통을 줍는다든가, 문 앞에서 다른 사람과 동시에 마주치게 되었을 때 '아, 먼저 가세요' 하고 길을 양보해준다든가, 일찍 일어나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운다든가 하는 일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 사람이 '이렇게 하자'고 마음먹고서는 누구의 허가도 동의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보탬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에게 강제하려고 하면 잘 안 풀립니다. 모르는 남에게 '어이 당신, 거기 쓰레기 주워.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말야'라고 명령받으면 몹시 화가 나지요.

     

    '도덕적인 행위'는 자기 혼자서 묵묵히 하면 '사회 질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같은 행위라도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강제하려 하면 오히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상당히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하철 안에서는 아직 아저씨와 고등학생의 기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인물이 추가로 등장합니다.

     

    이제까지의 싸움을 죽 지켜본 한 사람의 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 저 다음에 내려서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것입니다. 이야, 살았습니다. 모두 마음을 놓았습니다. 여성도 솔직하게 '아 그런가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빈 자리로 가 아이를 무릎에 앉힙니다. 고등학생은 다시 선잠에 빠지고 설교하던 아저씨는 살짝 무안함을 느끼지만 어찌됐든 '아이를 업은 여성에게 좌석을 제공한다'는 본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만족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양보했던 신사는 사실 '다음 역에서 내릴'일은 없었고 훨씬 다음까지 갈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아저씨의 약간 고압적인 태도와 고등학생의 깐깐한 반론 탓에 지하철 분위기가 약간 서먹서먹해졌기에 순간적으로 긴장 완화를 위해 '다음에 내립니다' 하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려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다음 역에서 내려 다음 열차에 타게 된 것입니다.

     

    이 신사의 행동도 역시 너무나 도덕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도덕은 앞서의 아저씨와 고등학생의 도덕과는 조금 수준이 다르게 보입니다. 좋고 나쁘다기보다는 살짝 감각이 다릅니다. 미묘하게 깊고, 미묘하게 자상합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신사가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속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다음에 내립니다' 하고 자리를 양보한 신사가 역 벤치에 앉아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습을 만약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이 보았다면 '어, 이 사람은 자기 입장을 제쳐두고서 빈 자리를 양보한 뒤 자기 시간을 조금이나마 희생했구나' 하고 눈치채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저씨도 고등학생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양보받은 어머니도 상당히 면목 없는 기분이 듭니다. 모두 살짝 기분이 가라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리를 양보한 신사는 '자신의 배려를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승객들에 섞여 함께 개찰구로 빠져나가는 섬세한 연기까지 펼쳤습니다. 그리고 열차가 역을 떠나자 '아이구 이것 참' 하며 벤치로 돌아가 다음 열차를 기다린 것입니다.

     

     

    도덕적인 행동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 배려를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일 겁니다.

     

    보통은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모두에게 어필하고서 될 수 있는 한 '칭찬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고 싶겠죠. 하지만, '좋은 일'을 했어도, 잠자코, 가만히 떠나는 일도 때로는 필요한 겁니다. '때로는' 입니다만, 되도록이면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그렇게 하는 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이를테면, 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만, 이러한 문제는 구체적인 사례를 상상하지 않으면 굉장히 감을 잡기 어렵거든요).

     

    어떤 사람이 마을 변두리의 시냇가 옆 길을 걷고 있는데, 제방에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거기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을 주워와 그 구멍을 틀어막으니 물은 멎었습니다. 그 덕에 한참 뒤 홍수가 났을 때에도 그 제방은 무너지지 않았고 마을은 수몰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틀어막았던 돌이 제방의 붕괴를 막은 것을 모르고, 마을 사람들도 그 사람이 마을을 구한 사실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영단어가 있습니다. '언성 히어로(unsung hero)'라는 겁니다. '그 공적이 노래로 불려지지도 칭송받지도 못하는 영웅'이라는 의미입니다. 엄청난 공적을 올렸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 자신조차 엄청난 공적을 올렸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실제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배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많은 마을이, 많은 문명이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시는 누구도 읊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모두가 그 공적을 알고서 모두에게 '칭송받는 영웅'보다 '누구도(본인조차) 그 공적을 모르는 영웅'이 참된 영웅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 함은 '언성 히어로'들은 아마 자신들의 영웅적 행위를 무심코, 특히 '이런 걸 하면 이러이러한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라는 예측도 않은 채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를 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눈이 온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눈을 치운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대강 눈을 다 치우고 난 뒤 집에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일어나 통근과 통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걷고 있는 길만 눈이 얼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일찍 일어나 눈을 치우지 않았다면 그 가운데 누군가는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골절상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감사해한다든가 그것을 칭송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눈을 치운 사람은 이 세상에 일어날지도 몰랐던 사고의 리스크를 조금이나마 줄여준 것입니다.

     

    이 사람도 또한 '언성 히어로'입니다.

     

    '언성 히어로'란 어떤 사람인가, 이로써 조금 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이 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쓸데없는 책임을 진다든가 쓸데없는 일을 떠맡지 않으면 안될 때, 자기가 합니다. 그런 식으로 평소부터 생각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높은 확률로 '그 공적을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이 됩니다.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걸 누가 할 것인가.

     

    보통은 그런 식으로 물음을 제기합니다. 물론 그 물음을 제기하는 자는 올바릅니다.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자는 도덕으로 말하자면 '얕다'는 겁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틀렸다'는 게 아니예요. 그저 '얕다' '일천하다' '가볍다'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30명 중에 1명, 아니 50명 중에 1명 정도 비율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길에 떨어진 빈 깡통을 줍는다든가, 자리를 양보한다든가, 눈을 치우든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도 하지 않으니 내가 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잖습니까. 그러면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이 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지 않겠어요?'

     

    이런 사람은 만원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같이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 다른 사람을 먼저 타게 하고, 그리고, 아마 평소와도 같은 어조로 '난파선에서 탈출하기 위한 구명 보트의 마지막 자리'를 앞에 두었을 때도 '아, 먼저 가세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구명 보트 최후의 자리'를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란, 머리로 생각해 결론이 나올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는 결론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런 일은 '기회가 될 때마다 <아, 먼저 가세요>라고 말할 것'이 이미 확실한 습관이 되어 있어서 몸에 스며든 나머지 자동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마는 사람밖에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본인도 그렇게 말한 뒤 '아이고, 나 지금 구명 보트 자리를 양보했는데 이럼 나 죽는 거잖아...'라고 좀 놀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어쨌든 한 번 말한 걸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 말야' 하고 선선히 체념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일이지만요).

     

    <타이타닉>(1997)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군과 케이트 윈슬렛 씨가 주인공으로 나온 로맨스 재난 영화입니다. 그밖에도 타이타닉의 침몰을 그린 영화가 몇 개 있습니다. 생존자가 상당수 있으므로 침몰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해 상당히 신빙성 높은 증언이 남아있어서 이를 기초로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저도 몇 개 봤습니다만 그 영화들 모두 침몰 직전에 '먼저 가세요' 하며 구명 보트 자리를 양보한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밖에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직무를 저버리지 않고 할 일을 하는 사람들(<타이타닉>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인상적이었죠)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적잖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가세요'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마는 사람들이 말이죠.

     

     

    그럼, 슬슬 '마무리'를 지어보려 합니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누군가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소임이다'라는 사고방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것은 별로 합리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집단 가운데 몇 명이나마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인간은 공동체를 이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만큼은 단언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몇 사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꼭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누가 해야할지 모른다면 모두가 토론해서 결정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경우에 따라서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왜냐면 지극히 간단한 것, 이를테면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등의 일에 대해 그것을 누가 할 것인지 '모두' 모아놓고서 '이 쓰레기는 누가 주울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잖아요. 모두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시간을 조정하고 회의실을 마련하며 '누가 쓰레기를 주울 것인가'를 주제로 회의를 열 정도면, 그 사이에 눈치챈 '자신이' 슥 주워 쓰레기통에 휙 던지면 됩니다.

     

    혹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 아까 언급했던 '타이타닉 호 구명 보트의 마지막 자리' 를 누가 양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쳐도 '모두 모여 토론' 같은 거 할 짬이 없습니다. 즉각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는 평소와 같은 분위기로, 엘리베이터 입구를 양보하는 것과 같은 말투로, '먼저 가세요' 하고 제깍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원래 구할 수 있었던 생명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어떻게 하면 '먼저 가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는가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습관이 몸에 배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딱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해피한 인생을 보내면 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참으로 즐거웠다. 좋은 일만 잔뜩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혜택받은 인생을 보냈잖은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느 때나 자연스레 '아, 먼저 가시죠'를 말하게 되는 거라고 봅니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므로, 더이상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살짝 과욕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먼저 가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레 입에 붙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 나는 불행하다, 지금껏 계속 불행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남에게 간단히 양보할 여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쓸데없이 '눈 치우는 일'을 해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가 없지요.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행복해질 찬스를 좇을 뿐이니까요.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기 좋은 곳, 기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먼저 가세요'라고 곧장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먼저 가세요'를 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행복해지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그래요, 도덕책을 여기까지 줄줄 썼는데, 마지막에 이른 결론이 제가 말한 거지만 쿵 하고 납득이 가네요.

     

    여러분은 '내 인생에는 좋은 일이 엄청나게 많았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혜택받은 인생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사십시오. 그것이 도덕에 관해 드리는 제 유일한 어드바이스입니다.

     

    여러분의 다행을 기원합니다.

     

    (2021-11-18 09:0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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