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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헌법 이야기 (좀 깁니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1. 11. 07:02

    인제 나오는 소프트뱅크 신서 <나는 전후 민주주의에 찬성이로소이다>에 헌법에 대해 과거에 블로그에 올렸던 문장을 다시금 몇 꼭지 실었다. 아래 글은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서적화를 하려다 보니 대폭 가필을 하였는데, 본래의 갑절이 되었다. 오늘은 11월 3일. 제 75회 일본국헌법 제정일이다. 지금 다시 헌법을 생각한다.

     

     

    필자가 헌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극히 심플하다. 그것은 바로 현대 일본국헌법은 '공백 단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백 단어를 꼭 채워넣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본국헌법이 내세운 여러가지 이상은 단순한 개념일 뿐이다. '그림의 떡'이다. 이 공허한 개념을 일본 국민인 우리들이 '육화'시켜, 생명을 불어넣는 그러한 작업이 필수적이다.

     

    헌법은 쓰여진 것 자체로 완성된 게 아니다. 헌법을 완성시키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국민의 집단적 노력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국헌법은 아직 '육화'되지 않았다, 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또 하나 장기적인 국민의 숙제가 있다. 그것은 국가 주권의 회복이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며 국가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국가 주권의 회복이 우리들의 긴급한 국가적 목표다. 이는 아마도 100년이 걸릴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일본 국민이 받아들여야 할 무거운 십자가이다.

     

    그리고 국가 주권의 회복이라는 국민적 사업을 한걸음씩이라도 나아가게끔 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일본 국민이 완전한 국가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해야만 한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다. 안전보장 하며, 에너지 하며, 식량 하며, 중요한 국가전략에 대해서 우리는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우선 국민적으로 인지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정권을 포함해 일본의 사회지도층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은 이미 완전한 국가 주권을 갖고 있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거나, 믿는 척을 하고 있다. 이미 국가 주권을 갖고 있다면,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입장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이 위독한 병에서 깨어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필자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우려스러울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릴 것이 틀림없다.

     

     

    서두에 '헌법은 공백 단어이다'라는 사고방식에 대해 조금 설명드리고자 한다.

     

    여기저기 헌법 관련 강연을 하러 불려간다. 물론 불러주는 쪽은 모두 호헌파(주로 평화헌법 즉 '전쟁 포기'를 명시하고 있는 현행헌법 지지자- 옮긴이)다. 호헌파 집회에 가면 좌중의 연령층이 높다. 평균 연령이 아마 70세 정도 될 것이다. 젊은이를 거의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역 앞 같은 데서 선전물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그렇다. 지역의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노구를 이끄는' 느낌으로 홍보활동이나 집회를 마련하는 등의 힘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젊은이가 오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노인들만 있는 걸까. 어째서 일본 호헌파의 활동은 젊은이에게 호소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어찌됐든 젊은이들은 오히려 개헌파들의 주장에 어떤 종류의 리얼리티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개헌파의 말에 생생함을 느낀다. 그리고 호헌파의 주장은 '공허한' 것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본다. 허나, 어쨰서 호헌파의 주장에는 리얼리티가 없는 걸까.

     

     

    필자는 1950년생이다. 그런 필자에게 있어 일본국헌법은 리얼한 것이다. 그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필자에게 헌법은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과 같은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었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자연에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헌법을 지킵시다'라는 말은, 필자 세대에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맑은 공기를 지킵시다' 혹은 '바다를 깨끗이 유지합시다'와 같이 거의 변치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주장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호헌파 사람들이 60대, 70대가 많은 것도 당연하다. 이 세대는 헌법에 자연과도 같은 리얼리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헌법에 그 정도까지의 리얼리티를 느끼지 못한다. 똑같은 문구인데도 불구하고 경험과 연령에 의해 그 문구가 가진 리얼리티에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어째서 생겨나는 것인가?

     

    이 차이는 '전시 세대 사람들을 주위에서 직접 접할수 있었는지의 여부'처럼 선행 세대와의 관계 문제에서 생겨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 세대에게 있어서 전쟁 경험자란 부모이기도 했고, 교사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헌법관(觀)이 우리들의 헌법관을 결정지었다. 전시 세대의 헌법 이해가 전후 세대 일본인의 헌법에 관한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규정했다. 이게 필자의 가설이다.

     

    필자 자신은 전시 세대였던 부모나 교사들로부터 '아무튼 일본국헌법은 멋진 것이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리고 '이 헌법은 멋진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어떤 종류의 진지함이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는 듯한 생생함이 있었다. 이렇게 바람직한 헌법 아래에서 자랄 수 있는 너희들은 정말로 행복한 거라는, 그런 깊은 확신을 담아 그들은 말했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꼬마였을 적에, 천황제를 비판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 가운데에도 있었다.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똑부러지게 단언하는 선생님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상당히 있었다. '천돌이天ちゃん'라는 모독적인 어휘를 구사하며 천황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비판하는 어른은 필자의 어린 시절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필자 세대 사람들 중에는 이름에 '헌憲'자가 들어간 남자가 많이 있다. 지금은 거의 없으리라고 보는데, 1946년 헌법 공포 이후 약 10년 정도는 '헌식'이라든가 '헌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 이 시대만의 특징적인 명명법이었다고 본다. 그만큼 부모 세대가 헌법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개헌론'이라는 것을 필자가 나이를 어지간히 먹을 때까지 접해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자민당은 강령으로써 창당 때부터 자주헌법 제정을 내걸기는 했지만, 헌법 개정이 국가적인 급선무라는 여론이 언론을 휘몰아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였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친 필자의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은,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시대였다. 그런 시기에 헌법이 화제가 될 리가 없다.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이러이러하게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타도하고 혁명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헌법의 옳고 그름이 정치적 주제가 될 리가 없다. '헌법을 사수할 것인가, 개정할 것인가'의 문제야말로 시급한 정치적 논건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을 필자는 그 당시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즉, 필자 세대 입장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헌법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고 학생 때는 헌법 따위 안중에 없었던 것, 그러니까 헌법이 정치적 주제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어느 시기부터 서서히 막이 오르듯 개헌론이 정치적 이슈로 등장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헌법을 사수할 것인가 개정할 것인가' 라는 게 하나의 문제의식으로서 존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필자는 '자연물로서의 헌법'을 의심치 않고 성장한 세대이므로, 물론 '선천적 호헌파'이다. 그런데 다시금 호헌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음미해 보니, 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개헌론에는 특유의 생생함과 격함이 있었다. 헌법에 대한 심상찮은 증오를 느꼈다. 이래서는 헌법 문제에 중립적인 사람들이 개헌론에 끌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선천적 호헌파'인 필자는 왜 호헌론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금방 답이 나왔다.

     

    일본국헌법을 관통하는 이념은 멋진 것이지만, 이는 일본인이 스스로 인권을 희구해 투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전쟁에 지고 나서 미국에 점령당했을 때 연합군 총사령부가 '이런 헌법이 잘 맞을거야'라고 판단하여, 점령지에 하사한 것이다. 일본인이 싸워 이겨서 얻은 게 아니다. 져버린 덕에 굴러들어온 것이다. 애초에 남에게 선사받은 것이니 뭐 끼고 돌 필요가 있겠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필자라고 해도 일본인이 일본국헌법을 시민 혁명으로 획득한 게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엄청 큰일날 일'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전시 세대 사람들이 헌법 제정 과정에 관해 거의 완전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결코 주제삼지 않는 것에 대해 '그게 아니라 이게 문제다'라는 말은 하지 않고, 생각도 안 한다. 어른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연합군 총사령부 사이에 어떠한 협상이 있었으며, 어떠한 문구를 수정해 현행 헌법이 제정되었는가에 대해 우리들 자녀 상대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전시 세대는 두 가지 제반 사정에 대해 침묵을 지켰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한 가지는 전쟁 중과 관련된 자신의 가해 경험에 대해서다. 전시의 공습이나 기총 소사 피해 경험에 관해서는 상당히 웅변적으로 말해주었지만, 가해자로서 중국 대륙이나 조선 반도, 대만, 동남아 태평양 방면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약탈했는가, 강간했는가, 고문했는가,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말해 주는 어른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전쟁 경험을 묘사한 문학의 결여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 본다. 예전에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가 알려줬는데, 패전 직후에는 눈에 띄는 문학적 달성이 거의 없다. 전쟁에서 귀환한 남자들이 전쟁과 군대에 대해 쓰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는 요시다 미츠루 <전함 야마토의 최후>고, 이게 46년에 쓰여졌다. 오오카 쇼헤이의 <후료키俘虜記>가 48년. 50년대가 되면 노마 히로시의 <진공지대>,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오니시 노리토 <신성 희극> 등의 <전쟁 문학> 대표작이 차례차례 나오게 되는데, 가해 경험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작품을 필자 세대는 소년 시절에 접해보지 못했다.

     

    필자는 그저, 전시 세대 사람들의 침묵을 윤리적으로 단죄하기에는 약간 망설임이 앞선다. 그들의 침묵이 선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끔찍한 시기였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정말로 끔찍한 일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였고 죽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구태여 지금 와서 전쟁 당시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는 없다. 애들에게 그런 걸 고백하고 나서 미움이나 경멸을 사게 되면 전쟁에서 겪었던 괴로움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아마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자세하게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어린이들에게 뭣하러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일찌감치 보여주겠는가. 단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전후 태생 아이들은 전쟁 범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으니, 순진무구한 채로 자라주면 좋겠다. 전쟁의 추악한 부분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만 봉인해놓고 조용히 무덤까지 갖고 가면 된다. 그것이 전후 태생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선행 세대의 '증여물'이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 경험 세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전쟁의 죄악도 부정함도, 자신들 세대가 전부 떠안고 나면 그 유죄성을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할 필요가 없으니까.

     

    1945년 8월 15일 이래로 태어난 아이들은 새로운 헌법 아래서 시민적 권리를 차고 넘치게 향수하는, 전쟁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죄받은 존재로 살아갔으면 한다. 그 순진무구한 세대에게 일본의 희망을 맡기자.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닌 이상 전시 세대 자신들의 가해체험에 대한 그 조직적인 침묵과, 헌법에 보내는 무조건적 신뢰가 설명이 안된다.

     

     

    이를테면 필자의 부친이 그러한 인간이었으므로, 필자는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지성적이며 경우 바른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전쟁 당시 그렇게 끔찍스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1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중국 대륙에 수십 년 있었는데, 전쟁 당시에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가족에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이징의 추위가 대단했다든가, 집에 레코드판이 수천 장 있었다든가 하는 전쟁과 관련이 없는 개인적 회상조차 어느 시기 이후에는 뚝 그쳤다. 전쟁 당시에 있었던 사건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게 이 세대 사람들에게는 암묵적인 동의사항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은폐한다든가 혹은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동기는 전후 세대를 이노센트한 상태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었다고 필자는 본다. 그러한 부정으로부터 격리된, 정결한, 전후 민주주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자격이 있는 시민으로 자녀들을 기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회복이다. 이 아이들이 일본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거다. 그러한 희망을 맡게 되었다는 감각이 필자에게는 있다. 필자의 동년배 사람들은 다분히 동의해줄 것이다.

     

    필자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이 그 무렵 35세 정도였다. 물론 전쟁 경험자다. 필자는 그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서 항상 따랐다. 어느날 '선생님은 전쟁 나갔다 왔어요?' 하고 물어보니, 조금 긴장해서 '그려'하고 대꾸했다. 그래서 필자가 거듭 되풀이해 '선생님은 사람을 죽여본 적 있나요?' 하고 물으니까,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어봐서는 안 될 걸 물었다는 게 아이 눈에도 보였다. 그때 선생님의 새파래진 안색이 지금도 기억난다. 어른들에게는 불민하게 전쟁에 대해 물어서는 안된다는 벽 같은 것을 느꼈다.

     

     

    전쟁 경험에 대한 세대적인 침묵과 쌍벽을 이루는 헌법 제정 과정에 관한 침묵도 있다. 이 또한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들어본 일이 없다. 학교 교사도, 부모들도, 주위 어른들도 어떠한 제정 과정으로 이런 헌법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얘기를 우리들에게 해준 적이 없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 자리 곁에 있어본 기억도 없다. 헌법 제정은 부모나 교사 연령대에게 있어서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졌던 일이다. 1945년부터 46년에 걸쳐 어른들은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대체로 알고 있을 터였다. 헌법 제정 과정과 관련한 여러가지 '속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그것을 전해주지 않았다.

     

    개헌파가 훨씬 뒤에 '강요당한 헌법'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필자는 사실 놀랐다. 어린이 시절에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헌법을 일본인이 썼는지, 미국인이 썼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설이 헌법 제정 시점부터 난무했음을 알게 된 것은, 부끄럽지만 훨씬 나이가 차고 나서부터이다.

     

    처음 결혼했던 여성의 부친은 히라노 사부로라는 사람인데 그 당시에는 기후(岐阜) 현 지사였고, 그 전에는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었다. 그 장인이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겼는데, 술에 취하면 필자를 불러 일본국헌법 제정 비사를 말해주었다. 일본국헌법 제정 과정에 모두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얘기를 필자가 개인적으로 듣게 된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25세 이후의 얘기다. 장인은 시데하라 기주로*의 비서 비슷한 일을 했었으므로 시데하라 기주로가 임종 때 말한 것을 뒤에 국회 헌법 조사회에서 증언한다. 일본국헌법 제 9조 2항**을 발상해내서 맥아더에게 진언한 것이 시데하라 씨였다고 장인은 주장한다. 일본국헌법 제 9조 2항은 일본인이 스스로 생각해낸 거다.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 옮긴이 주: 1920년대 외교관 역임, 총리 재임 1945~1946년, 현행 일본 헌법 제정년도 1946년.)

    (** 옮긴이 주: 제 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 그리고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밖의 무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을 부인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째서 이러한 사실이 좀 더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는지를 이상하게 여겼다.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 이런저런 설이 있다. <라쇼몽>적 상황인 거다. 하지만 헌법이라는 것은 국가의 근간을 결정하는 요소다. 그 제정 과정에 관한 여러 잡음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다. 역사적 사실로서 확정지을 필요가 있다.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정하고, 그 이상의 진위 여부를 논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일본에서는 헌법 제정 과정에 관해 '이것만큼은 국민이 사실관계를 다투지 않는다' 하는 식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실시간으로 헌법 제정 과정을 보아왔을 게 뻔한 그 당시 세대 사람들이 옛날 일에 대해 증언해주기를 집단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침묵한 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1910년대 초~1920년대 말 사이에 태어난 세대다. 전쟁을 현장에서 경험한 이 사람들은 전쟁이 수습된 뒤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당연히 앞으로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 일본의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진심으로 걱정했을 것이다. 국가의 모습을 결정짓는 헌법에 대해서는 그 제정 과정에 대해서도 매일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서 살피며 그것에 관해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럼 헌법은 어떠어떠한 식으로 제정되었다는 <이야기>를 국민적 합의로 채용토록 하자'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일본국헌법에는 전문(前文)앞에 <상유上諭>라는 게 달려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줄곧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국헌법은 <짐>이 <공포>하고 있다. 천황 폐하가 "추밀원 고문의 자문"과 "제국헌법 73조에 의한 제국의회의 의결을 거쳐" 일본국헌법을 공포하고 있다. 분명히 <옥새>가 찍혀져 있다. 하지만 필자 세대가 헌법을 배울 때에는 그 상유上諭가 삭제되어 있었다. 어떠한 법리에 기초해 이 헌법이 제정되었는가 하는 '프레임'은 제외되고 텍스트만이 주어졌다.

     

    헌법의 개개 조항에 대한 시시비비 논쟁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 헌법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어떠한 의논을 거쳐 제정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합의가 없으면 헌법의 개별적 조항에 대한 의논을 시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그러한 합의사항이 없다. 헌법 제정의 역사적 과정은 집단적인 묵계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헌법에는 시안이 있었다든가, 맥아더 3원칙(제한적 군주제, 전쟁 포기, 봉건제 폐지 - 옮긴이)이 있었다든가, 연합군 총사령부 민생국이 11일 동안 초안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여러가지 설이 있고, 그에 대해서 조목조목 틀렸다는 반론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역사적 사실'로서 국민적으로 공유된 것이 없다.

     

    헌법은 우리나라의 최고 법규이다. 그 최고 법규의 제정 과정이 어떠했는가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그나 카르타에도, 인권 선언에도, 독립선언문 등에도 객관적인 사실로서 어떠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 무엇을 실현시키려고 했는가, 누가 기초했는가, 어떠한 의논이 있었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포되었는가 하는 사항이 공개되어 있다. 그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국헌법은 그렇지 않다. 제정 과정이 은폐된 채로 우리들 전후 세대에게 헌법은 주어졌다. 그것을 어떤 의심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엄연한 자연물처럼 받아들여온 게 이제 70이 채 못 된 우리들 세대 인간인 것이다. 개헌파 사람들에게 '이런 건 강요당한 헌법이다', '이런 건 연합군 총사령부가 써준 거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된다. 자연물이라고 받아들여 온 것이 실은 '무대 장치'나 다름없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이런 무대 장치가 자연물처럼 보였던 것은 선행세대의 작위였다. 전시 세대의 간원이었다. '무대 장치'인 일본국헌법을 마치 자연물처럼 절대적인 리얼리티를 가진 것으로 우리들에게 제시한 것은 그들이다. 그러한 전시 세대의 애틋함을 필자는 가련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로서는 그들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이제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도 장인도 돌아가셨다.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상상력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

     

     

    호헌론을 비판하는 일은 간단하다. 이따위 것은 그저 공백 단어 아닌가, '그림에 그린 떡' 아닌가, 국민이 갖고 있는 주권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 '평화를 애호하는 전 국민의 공정과 신의' 따위 누가 믿겠는가, 국제사회가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소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같은 명백한 거짓말을 잘도 떠든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렇기는 하다.

     

    헌법 전문(前文)에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하며 이 헌법을 확정한다"고 쓰여져 있지만, 애초에 '일본 국민'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이다. 헌법이 공포된 1946년 11월 3일 단계에서는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일본 국민'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포 전날인 11월 2일까지 열도에 존재했던 것은 대일본제국이고, 거기에 살고 있었던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이었지, '일본국 국민'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헌법 제정의 주어로 제시되어 있다. '이 주어상의 <일본 국민>이란 건 누구지?' 라고 쏘아붙이면 답할 길이 막막하다.

     

    일본국헌법을 제정했던 국민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일본국 국민'이 제정한 헌법이라는 사실이 바로 일본국헌법의 근원적인 취약함이다.

     

     

    이렇게 말해놓고서 금방 전언 철회(前言撤回)하는 것도 좀 뭣한데, 사실 세상의 선언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그런 것'인 셈이다. 선언에 들어가 있는 내용은 대개 비현실적인 것이고, 선언하고 있는 당해 주체 자체가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가 하는데에는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1776년 공포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노예제도가 한참이나 존속되었다. 노예 해방 선언 발령은 1862년인데, 독립 선언으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고부터다. 물론 노예해방 선언을 통해 인종 차별이 사라진 게 아니다. 공민권법이 제정된 것은 1964년이다. 독립선언으로부터 200년. 그리고 물론 지금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종차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에 쓰여져 있는 것과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실상은 서로 다르므로 현실에 맞춰 독립선언을 고쳐 쓰자'고 주장하는 미국인은 없다.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내건 선언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경우, 선언을 우선한다. 그것이 세계표준인 거다.

     

    일본은 아니다. 선언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현실에 맞춰 선언을 바꿔 쓰자고 당당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정권을 잡고 있다.

     

    전 세계 어디든 나라의 이상적인 모습을 정해놓은 문장이란 기초된 시점 상에서는 '그림에 그린 떡'이다. 선언을 기초한 주체가 '우리는' 하고 일인칭 복수로 쓰여져 있는 경우에도, 그 '우리' 전원과 합의해 그들의 승인을 얻은 게 아니다. 자신도 또한 선언의 기초 주체의 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진 '우리'를 앞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선언이라는 것은 발령된다. 그것이 선언의 수행적 성격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고 본다. 일본국헌법 제정 당시에는 '일본 국민'인 자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내걸렸던 이념이 선한 것이라는 점이 세간의 상식이 되는 한편, '헌법을 기초해 주게' 하고 누군가에게 부탁받게 된다손 칠 때 시원스레 이와 같은 헌법을 기초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배출된다면, 그때 '일본 국민'은 공백 단어가 아닌, 비로소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된다.

     

    이 헌법을 자력으로 써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국민이 될 수 있도록 자기 개조해가는 것, 그것이 헌법 제정 이후의 실천적 과제가 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 일본 국민이 '우리는 아직 <일본 국민>이 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자력으로 이 헌법을 기초할만한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고 자각하는 일이 필요했다.

     

    호헌론의 약점은 거기에 있다.

     

    호헌파는 그러한 과제를 제시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 국민은 존재한다' '우리들은 헌법 제정의 주체다'라는 지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로써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었다고 본다.

     

    분명히 헌법 전문에는 '일본 국민'이 집결하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중지를 모아 이 헌법을 제정했다고 쓰여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없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해도 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쨌건 중지를 모아 이러한 헌법을 자력으로 기초할 수 있을 만한 국민 주체로서 자기형성하는 것을 미래의 목표로 내거는 일은 가능했을 것이고, 반드시 해야만 했다. '일본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헌법 제정의 주체가 아니다'라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로써 일을 그르친 것이었다고 본다.

     

    일본 국민이 헌법을 제정한 게 아니라는 주지의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한 탓에, 그 이후 호헌론과 개헌론의 '비틀림'이 생겨났다.

     

    우리들은 헌법 제정의 주체가 아니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았었을 뻔했던 것이다. 분명히 일본국헌법은 당시 일본 국민의 중지를 모아 기초한 것이 아니지만, 가령 다시 한 번 헌법 제정 찬스가 주어졌을 때, 자발적으로 이와 동일한 헌법을 자력으로 기초할 수 있는 일본 국민으로서 자기형성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것을 수행적인 목표로서 내거는 일은 가능했을 터이다. 그래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시 세대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것과 비슷한 것을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 의견이 되지 못했다. 아마 그런 곤란한 국민적 과제를 끌어안을 만한 기력과 체력이 그때는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참혹하게 패배했다.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했다. 자력으로 패전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 책임의 추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했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내일 먹을 양식조차 구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일본 국민'을 향해 자기 도야의 노력을 하자는 말이 긴급한 국민적 과제로 내걸린다는 일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보다는 우선 비바람을 피하고, 주린 배를 채우며, 죽은 이를 애도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일을 우선하게 된다.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났다. 헌법은 일본의 풍토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후 태생 아이들은 헌법을 '자연물'과 같이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민주주의 사회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것을 보고 전시 세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뒷날은 이 아이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이 아이들은 '날 때부터 국민 주체'인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네 맘대로 헌법을 제정해 보렴' 해보면, 분명 주저 없이 지금과 같은 헌법을 기초해낼 것이다. 그러면 이제 와서 '일본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헌법제정의 주체가 아니다' 같은 뼈아픈 사실을 커밍아웃할 필요는 없다. 잠자코 있어도 '일본 국민'은 자라난다. 그럼 다행이다. 수 십년이 지나면 열도 주민의 대부분이 '헌법 제정 주체'라고 할 만한 일본 국민이 될 것이다, 라고 아마 생각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전시 세대의 제헌 과정에 관한 집단적인 침묵은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그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들은 전후 민주주의로부터 막대한 권한 위임을 향유할 만큼 향유한 끝에, 선선히 헌법의 숨겨진 본질을 잊어버렸으며, 설상가상으로 전후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매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본 전시 세대의 상심은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헌법의 적자'이고, 전후 민주주의가 제공해 준 '열매'를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었지만 헌법의 정신을 혈육화할 의무가 있다고는 배우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미 '혈육화 완료'라고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우리들은 개헌파들이 저 좋을 대로 파 놓은 함정에 걸리고 말았다.

     

     

    개헌파의 어드밴티지는 그 점에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 일본 국민은 관여하고 있지 않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의 작품이다. 미국이 일본을 약체화시키기 위해 짜낸 전략적인 술수다 하는 게 개헌론의 기초가 되는 로직인데, 여기에 일부 진실이 담겨져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 제정 과정에 '초 헌법적 주체'인 연합군 총사령부가 깊이 관여하고 있고 이것이 헌법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게 개헌파의 주장이다. 한편, 호헌파는 연합군 총사령부의 관여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 국민이 제정했다'는 이야기에만 집착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헌법을 제정하는 자는 '헌법 조문 내부적으로 주권자라고 인정받는 주체'가 아니다. 역사상 대부분의 경우 헌법을 제정하는 자는 전쟁이나 혁명, 반란을 통해 이전 정치 체제를 전복한 정치적 강자다. 그것은 대일본제국 헌법도 마찬가지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의거한 주권자는 천황이다. "대일본제국은 만세 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제 1조에 쓰여져 있다. 그리고 그 조항을 기초했던 주체도 천황 자신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일본제국 헌법의 '칙어'***에 등장하는 '짐'은 "짐이 황종으로부터 계승한 권력에 의거해 현재 그리고 장래의 신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불멸의 대전을 선포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 옮긴이 주: 본문에는 '상유'라고 되어있고 이는 '헌법 발포 칙어'의 오류인 듯 보이나 대강 상호 유사함.)

     

    하지만 딱히 헌법 제정의 '권력'이 역대 천황에게 인정되어 왔던 적은 없다. 칙유같은 것은 많이 냈지만 '헌법'은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인 것이기 때문에 헌법 제정 권리가 있다는 개념을 메이지 천황이 '황종'으로부터 '계승'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메이지 헌법을 썼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 등의 개국 공신들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타도되고, 유신 이후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정치가들이 그 '초 헌법적 실력'에 의거해 이 헌법을 제정했던 것이다. 소행은 연합군 총사령부와 다를 바 없다.

     

    헌법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런 것'이다. 압도적인 정치적 실력을 가진 초 헌법적 주체가 그것을 제정한다. 그것이 누가 됐든 어떠한 역사적 경위로 그러한 특권을 휘두르게 되었는가 하는 '전모'에 대해서는 헌법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쓰여 있지 않아도 알 사람은 안다.

     

    메이지 시대 사람들 역시 실제로 헌법을 기초한 주체는 정치가들이라는 것을 양지하고 있었을 터이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근대 국가로서의 '체면'을 세우는 한편 국제 사회에 정회원으로 가담하면서 향후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필요로 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삿초(薩長;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지역 - 옮긴이) 출신 엘리트들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 항구화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일본국헌법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압도적인 정치적 실력을 가진 초 헌법적 주체에 의해 제정되었다. 그것이 누구이며 어떠한 역사적 경위로 그러한 특권을 휘두르기에 이르렀는가 하는 '전모'는 헌법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문제는 일본국 헌법의 경우 제헌 과정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국민의 많은 수가 헌법을 '변변찮은 것'으로 생각해서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제정 과정에 대한 '속사정'은 보다 폭넓게 유통되었으리라. 하지만 전시 세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사한 헌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정 과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헌법의 정합성을 훼손하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쟁 경험자들은 선의로 그랬을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그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전후 일본 사회를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결별한 것으로서, 전쟁 이전과 잇닿는 회로를 차단시킨 '무균 상태'의 것으로서 출발하고자 했다. 그래서 전쟁 때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때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함구했고, 헌법 제정 과정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일본에는 주권자인 '일본 국민' 위에 군림하며 일본 국민에게 주권자라는 지위를 '하사'한 초 헌법적 주체인 미국이 있고 그것은 자신들이 전쟁을 해서 졌기 때문이라는 통절한 현실을 밝혀야만 했다. 자녀들에게 들려주기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전쟁 경험과 관련해서 유난히 가해 경험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헌법 제정 과정에서 일본은 국가 주권을 잃고 헌법 제정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전시 세대의 이러한 이중의 '침묵'이 전후 일본에 해결하기 힘든 '꼬임'을 불러일으켰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과 관련해 전시 세대를 책망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필자와 같은 전후 세대가 전쟁과 관계 없는, 그러니까 전시에 인간이 추악해지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애써 역설하지 않으면서 또한 패전의 굴욕과도 관련이 없는 자로 기르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침묵에는 독특한 무게감이 있었다. 실재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그 얘기는 하지 말기로 하지' 와 같은 낮은 목소리로 저지당하고 난 뒤에는 결코 묻지 않게 되는 박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역사수정주의같은 것이 나올 계제가 못되었다. 가령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같은 말을 하는 인간이 있어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이 버젓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존재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증언할 것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같은 망언을 응징할 수는 있었다.

     

    역사수정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한 맥락은 전 세계 어디든 비슷하다. 전쟁 경험 계층이 차츰 고령화되면서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 슬슬 기어나온다. 실상을 알고 있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수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도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사람도 자국의 전쟁 경험에 관한 기억이 극히 선택적이다. 레지스탕스는 침이 마르도록 언급하지만 비시 정권이나 그 부역 행위를 입에 담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비시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이래로 그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다. 그 시기를 살아왔던 사람들이 아직 명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몸소 비시에 가담했던 사람도 있었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각자의 개인적인 갈등이나 후회를 안고서 전후 프랑스를 살아가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지고 드는 데에 저항감을 느꼈다.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프랑스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썼다. 독일 점령 하에서 프랑스 사람이 어떻게 나치에 가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책이다. 레비는 전후에 태어난 유대인이라서 전쟁 당시 프랑스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다. 완전히 '결백한' 입장에서 비시파와 부역자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출판 당시에는 대 논쟁이 벌어졌다.

     

    상당히 많은 수의 전시 세대 사람들이 레비의 앙똘레랑스에 대해 혐오감을 내비쳤다. 레몽 아롱도 레비를 비판하며 '겨우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소금을 뿌리는 인정머리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썼다. 필자는 그것을 읽고서 아롱의 말은 지성적이지는 않지만 동시에 '어른의 말'이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아롱의 말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이 말할 때 나오는 독특한 박력이 있었다. 아롱 자신이 유대인이고 자유 프랑스군에서 싸웠으므로 비시나 부역자들을 두둔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가 일찍이 적대했던 대상에 대해 '굳이 끄집어내지 않아도 이미 다 끝난 일이잖은가' 하는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80년대부터 한동안 비시 프랑스에 관해 이제까지 표출되지 못하였던 역사적 자료가 속속 등장해 몇 권이나 책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비시 당사자들은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켰다. 비밀의 많은 부분을 그들은 묘지까지 갖고 가버렸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침묵하고자 하는 게 인정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결과적으로 비시 시대에 프랑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가 은폐되는 한편 역사수정주의자가 등장할 발판을 마련해버렸다. 전쟁 경험자의 많은 수가 죽은 뒤에,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아우슈비츠에는 가스실이 없었다'는 말을 꺼냈다. 그 저변의 사정은 실은 일본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알베르 카뮈의 망설임(逡巡; 우물쭈물함 - 옮긴이)도 그 적절한 예다. 카뮈는 지하 출판으로 낸 <전투>의 주필로 레지스탕스 투쟁을 이끌었다. 나치 점령 하 프랑스의 지성적, 윤리적인 존엄을 지켰다는 점에서 카뮈의 공헌은 탁월했다. 그래서 전후 부역자의 처분이 시작되었을 때 카뮈도 당연히 그것을 지지했다. 그의 동료들이 레지스탕스 투쟁 과정에서 몇 명이나 죽었고, 카뮈 자신도 게슈타포에 체포되면 즉결처분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뮈는 부역자를 용서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념형 부역자였던 로베르 브라작의 사면 탄원 서명을 요청받았을 때, 카뮈는 고민 끝에 응했다. 브라작의 비행은 분명 용서키 어렵다. 하지만 나치와 비시는 패망했다. 지금 그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들은 이제 카뮈를 죽이려 들지 못한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게 보복하기 위해 권력의 손을 빌리는 일에 자신은 찬동할 수 없다. 카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로직은 그리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역자 처분을 지지하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허나, 카뮈는 거기서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어째서 '섬뜩'했는가를 논리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꺼림칙한 건 꺼림칙한 거다'라는 게 카뮈의 입장이었다.

     

    신체적인 위화감에 기반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게 사람에게 허용되는지의 여부에 관한 논쟁은 나중에 <반항적 인간>의 주제가 되는데, 알베르 카뮈와 레몽 아롱은 서로 우연찮게 '과도한 정의로움은 인간성을 해친다'는 이해받기 힘든 주장을 한 것이다.

     

    레지스탕스는 초기에 그야말로 한 줌의 프랑스 사람만 참가했다. 지하 활동이라는 성격상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는가에 관한 상세한 문서는 남아있지 않으나, 1942년 시점에 레지스탕스 활동가는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파리 해방 때는 수십 만 명으로 불어났다. 44년 6월에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전쟁의 귀추가 정해지자, 그때까지 비시 정부 관변에 들러붙어 있던 내셔널리스트들이 갑자기 우르르 레지스탕스 대열로 뛰어든 탓이다. 그런 '냄비' 레지스탕스들이 전후에 거들먹거리며 '나는 조국을 위해 독일과 싸웠다'고 말했다. 그것을 카뮈는 씁쓸한 필치로 회상한다. 가장 열심히 싸운 자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도 않고, 말 없이 죽었으며, 더러는 생활인으로 복귀했다고 말이다.

     

    <페스트>에는 카뮈의 그 진절머리가 쓰여져 있다. 의사 리유와 그의 친구 타루는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 '보건대'라는 것을 조직한다. 이 보건대는 명백히 레지스탕스를 빗댄 것이다.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이 임무를 시민의 당연한 의무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수행한다. 소영웅주의의 만용이 없는 것이다. 보건대 구성원 중 한 명인 그랑은 페스트 재난이 종식되고 나서 다시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급 공무원의 일상 생활로 돌아가고, 페스트와 보건대 이야기도 입에 담지 않는다. 카뮈는 이 범용한 인물을 통해 레지스탕스 투사의 이상적인 모습을 선보인 것 같다.

     

    프랑스에서의 역사 왜곡 시도는 1944년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비시의 나치 부역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독일의 패색이 농후해지자 뒤늦게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애국자'로 전후를 맞이한 '경력 세탁'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정면으로 똑부러지게 비판하는 일을 카뮈는 자제했다. 그 자신이 쌓은 지하 활동 공적에 대한 현시를 자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절도로, 타인의 공적 사칭을 나무라는 일도 자제했다. 타인을 '사이비 레지스탕스'라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직한 레지스탕스'라는 것을 굳이 드러내며 피아 차별화를 꾀해야만 한다. 그것은 카뮈의 윤리관과는 거의 부합하지 않는 행위였다. 나치스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비시 정부에 관련된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비열한 짓을 했는가를 일부러 공공연히 말하는 일을 전후에는 삼갔다. 카뮈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각 나라마다 그 후에 역사수정주의가 설쳐대게 된 데에는 첫째로 이 '어른들'의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들이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고, 타인의 비행을 탓하지 않음으로 해서 역사수정주의의 융성에 어느정도 기여했다.

     

    어른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전부 상세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공개할 필요는 없다. 자랑할만한 일은 자존심이라는 형식으로 마음 속에 간직하면 되고,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는 혼자서 깊이 뉘우치면 된다. 새삼스레 들춰내어 굴욕감을 선사할 필요는 없다. '어른'들은 승패의 귀추가 정해진 뒤 패자에게 못살게 굴지 않는다. 부역자들을 동포로서 다시금 맞아주려고 했다.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되나, 실제로는 '어른'들의 이 아량이 역사수정주의의 온상을 만들어냈다. 필자에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비슷한 일이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전시 세대인 '어른들'이 우리들 전후 세대에 베푼 배려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헌법은 자신들이 제정한 게 아니다. 일본 국민이라는 말이 공백 단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헌법은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잠자코 수용하는게 좋다. 그것을 '일본 국민이 제정했다'는 이야기로 포장해놓으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후 세대 아이들에게 '부모들이나 선생들이 이 헌법을 제정한 것이다'라는 엄청난 오해를 심어놓은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오해를 굳이 불식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 생생한 소망이 헌법의 견고성을 담보해 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죽어 사라지는 순간, 우리들의 수중에는 보증인을 잃은 계약서 쪼가리로서의 일본국헌법만이 남았다.

     

     

    개헌파의 강성과 호헌파의 위축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은 이러한 연유였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이 꽤나 전경화되지 않았던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무수한 가해 사실과 비인간적 사실에 대해 밝히는 일,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해 그 전모를 밝히는 일에 태만했던 '부작위'가 역사수정주의자와 개헌파가 지금 이렇게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인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은 것'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현실이 바뀌었다. 역사학자는 '일어난 일' '현실화된 일'을 조직하여 그 인과관계에 관한 가설을 세워 역사적 사건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본업이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역사적 사실과 현상의 '원인'으로 논하는 일은 보통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전시 세대가 전쟁 책임을 엄히 추궁하고 그들의 가해 사실을 고백하며, 더욱이 헌법이 승자에게 '하사'받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 '일본 국민 따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만들어나가는 것이다'라고 선언했을 경우, 전후 일본 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전시 새대 사람들은 그 사업의 무게감에 상당히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전후 세대는 그러한 부모 세대에 대해 혐오나 경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결국 전시 세대는 인간이 그다지 고역을 길게 버티지 못한다는 상식적인 인간 이해를 기반으로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호헌파는 이러한 상식과 억제의 산물이다. 그래서 비상식과 격정에 약하다.

     

    호헌 운동을 1950년대나 60년대와 같이 추진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호헌 운동의 주체는 전시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리얼한 맨몸뚱이를 가졌다. '공백 단어로서의 헌법'에 자신들의 소망과 아이들의 미래를 맡긴다는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니다. 우리들은 '자연물로서의 헌법'을 아무 생각 없이 풍족하게 향유하고, 거기에 경의를 표하는 일도 없이 그저 이용하는데에 그친 끝에, 어느날 '네놈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인공물이다'라는 말을 듣고서 졸도해 버리는 '애 어른'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들이 추진해야 할 호헌 운동이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어쨌든 '호헌 운동의 열세'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헌법은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어떠한 선언, 헌법, 법률이든 그 리얼리티는 최종적으로 맨몸뚱이의 인간이 그 실존을 걸고서 담보할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한다. 헌법 조문이 아무리 정합적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강령적으로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헌법이라는 것이 자립할 수 없다. 올바르다는 것만으로는 자존할 수 없다. 끊임없이 그 문언에 자신의 육신으로 '담보 제공'하는 주체의 관여가 없으면 어떠한 헌법도 선언도 사문(死文)에 지나지 않는다.

     

    사문을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은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이다. 그러한 '바이털한 것'으로 부단히 에너지를 보급해주지 않으면 헌법은 살아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호헌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호헌파는 헌법은 그 자체로 공백 단어라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에 실질을 부여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희생으로 헌법에 생명을 불어넣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헌법은 언젠가 고사한다. 필자는 그런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호헌 운동에 리얼리티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이 헌법이 본질적으로는 공백 단어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 세대는 이 헌법이 공백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들은 이 헌법이 공백 단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희생으로 이 헌법의 리얼리티를 채무 보증해줬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테다. 하지만 필자는 인정한다. 역사수정주의자나 개헌파가 그만큼 힘을 갖게 될 때까지 필자는 멍하니 수수방관했었다. 헌법은 좀 더 견고한 것이라고 나이브하게 믿었다. 하지만 개헌으로 일본이 다시 전쟁 가능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패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전시 세대의 상식과 억제가 시작된 지점으로 시계침을 되돌려, 호헌 운동을 처음부터 다듬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전시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들이 희생해 헌법의 '연대 보증'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호헌에 대한 필자의 기본적인 스탠스다.

     

    (2021-11-03 07:5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内田樹)
    1950
    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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