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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출가를 권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1. 5. 07:01
좀 된 일인데, 천태종의 말사 주지가 부족한 탓에 ‘동자승’을 공개 모집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었다.
(일본 불교의 - 옮긴이) 승려는 대부분의 경우 세습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가업 잇기를 꺼리는 젊은이도 많다. 자연히 무주 말사가 늘고, 스님들은 한 사람이 여러 절과 단가를 살피는 격무로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널리 후계자를 구하며, 종단의 유지에 힘쓰고 있다는 사연이다.
읽으면서 앞으로 ‘중’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사이교라든가 요시다 겐코라든가 구마타니 나오자네라든가 하는 옛적부터, 인생의 신산함을 맛본 중년 남자가 불현듯 속세를 버리고 출가해 중이 된 패턴은 적지 않다. 속세의 악덕에 경을 치고 난 뒤 머리를 깎고 전국을 유랑하며 노래를 읊는다든가, 온종일 시시콜콜한 것들을 써내려 나간다든가, 죽은 미소년의 넋을 위로하며 피리를 분다든가, 선선히 만년의 절개를 지킨다든가 하는 것은, 남자로서 대단히 올바르고도 정결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불현듯’ 집을 나와 증발해버린 아버지들은 지금도 있다. ‘도야마치ドヤ街’라는 곳에 가면, 과거를 버린 남자들이 대거 모여있기도 하고, 신주쿠 근처의 지하통로에는 골판지로 몸을 가린 현시대의 탈속자들이 허다하게 존재한다.
40 넘은 남자 치고, 온갖 것을 다 버린 채 유랑에 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해본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감히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나 일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집을 나온 뒤 장기간에 걸친 방랑 생활을 ‘지탱할’만한 생활상의, 그리고 정신상의 뒷받침을 확보할 수 없어서다.
물론 눈에 뒤덮인 항구에서 방랑자들의 바텐더가 되어서, 중년 초입의 마담이 ‘류지 씨는 옛날 얘기를 하나도 안 하시는군요’ 라고 속삭이자,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오늘은 눈이 올 것 같군요’ 하고 가만히 연초 연기를 내뿜는다는 초이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혹은 광막한 홋카이도의 목장에서 과묵하게 소를 치는데, 중년 초입의 여목장주의 아들이 ‘아저씨, 계속 있어주실 거죠’ 하며 따르니,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떨떠름히 중얼거리는, 그럴 가능성이 절대 없다고는 말 못 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타카타 겐조적 시추에이션을 얻을 수 있으려면, 어떤 계기가 되어 매그넘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쏠 수 있다든가, 야쿠자의 옆구리에 능숙하게 훅을 먹일 수 있다든가, 고집 센 순종마를 솜씨 좋게 질주케 한다든지 하는 나름대로의 숨겨진 기예가 필요함으로, 애초에 ‘보통 아저씨’에게 기대할 바가 아니다.
그 점에서, ‘출가’는 바람직하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전문직’이 하는 일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을 읽고, 진언을 읊고, 만트라를 외고, 호마(護摩)를 멸하며, 장례식을 올리고, 계명을 지어주며, ‘법력’을 몸에 익히면, 악령을 공양하고, 전세의 영을 투시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뭐든 할 수 있다. 잘만 하면 대오각성도 꿈은 아니다.
그 기본이 되는 것은 제행무상, 모든 것은 공(空) 이라는 체념이므로, 절로 사계의 변화, 화조풍월의 풍취, 대략 덧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차츰차츰 몸에 스며들 것이 틀림없다. 시를 읊고, 수필을 쓰고, 풍류를 농하며(술은 안되려나?), 고상하고 우아한 소양을 갖춘 훌륭한, 고바야시 히데오도 울고 갈 미적 생활자가 된다.
일본 아저씨들의 방랑이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집과 일을 버리고 나선 곳이 파칭코의 종업원 숙사라든가 건축현장의 함바라든가 하는, 자신이 버렸을 터인 현실의 연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절’은 바람직하다.
간결하고, 청결하며, 속취가 없다. 장삼을 걸치고, 말라 비틀어진 낙엽을 쓸며, 죽을 먹고, 근행을 이어나가면 위궤양도 당뇨도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는 인생 선택지로서의 ‘출가’에 대해 충실히 기획 집행해줄 것을, 부디 모든 불교 각 종파 관계자에게 부탁드리는 바다.
사찰이 문호를 열어젖히는 체제가 갖춰지면, 일본 아저씨들의 상당수는 지금까지의 삶을 고쳐먹고 출가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더욱이 불문의 교세는 높아질 것이며, 팽대한 수를 가진 ‘아저씨 중’의 활동이 기축이 되어, 일본의 정신문화는 절도와 깊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말의 트렌드는 ‘출가’다. 필자는 진지하게 예언한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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