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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론』서문 —우리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30. 22:40
이번에는 ‘후퇴’와 관련한 주제로, 제가 신뢰를 보내고 있는 저자 분들에게 기고를 부탁드렸고, 이 논집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기고 의뢰문을 아래에 싣습니다. 읽어보시고 나면, 이 논집의 간행 의도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쇼분샤의 안도 아키라 씨를 통해 저한테서 편지를 받으신 여러분은 ‘아아, 또 기고의뢰구나’ 하고 곧장 떠올리셨을 겁니다. 이번 기고의뢰는 ‘후퇴에 관하여’라는 주제입니다. 우선은 편집 취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나라 현립 대학 주최로 ‘후퇴학’을 둘러싼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습니다. 주최자측을 대표하여 대학의 호리타 신고로 선생의 ‘지금 후퇴적 지성의 필요성을 묻는다’라는 발제에 이어서 저와 미즈노 가즈오 선생이 강연한 뒤, 전체 토론 시간이 있었습니다. 토론의 상세한 내용을 여기에 옮길 수는 없지만, 향후 일본의 ‘후퇴’는 어떤 형태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대학인이 제기해주었다는 사실에 저는 대견함을 느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력이 쇠퇴하고, 수중에 있는 국민 자원이 줄어들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후퇴’는 시급한 논건이 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논하기 꺼려하는 것처럼 제 눈에는 비쳤기 때문입니다. ‘후퇴해가는 일본은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중지를 모아 논해보려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가지 지표가 일본의 국력 저하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국의 국력이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하나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 몽골 제국, 대영제국 모두 성쇠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놀랄 것도 없고, 화낼 것도 없으며,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로써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력이 저하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의논하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건 비정상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병에 걸렸으면 그 원인이나 증상, 치료법에 대해 생각해보면 됩니다. 하지만 병에 걸렸는데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 짓을 해봐야 병세가 악화될 뿐입니다. 지금 일본은 그 상황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일본 정부 내부에는 ‘국력 저하 현상을 모니터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며, 효과적인 정책을 기안하는 센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는 저출생을 해결하겠다, 경제성장을 어떻게 이루겠다, 군사력을 이렇게 증강시키겠다는 ‘앞만 바라보는’ 정책 의논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전체적 추세로서의 국력 쇠퇴의 현상 검토와 함께 미래를 ‘종합적, 조감적’으로 전망하는 부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후퇴’라고 말한 것은 구체적으로 이 국력 쇠퇴라는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이 빠져 허리둘레가 줄어들었으니 벨트를 조금 푸는 일, 추워졌으니 옷을 두껍게 입는 일, 그런 종류의 지극히 비정서적이고도 계량적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도적으로 기피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후퇴’를 논하는 본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일본의 국력은 그다지 쇠퇴하지 않았다. 일본의 시스템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으며, 수정이나 개량의 여지가 없다’ 는 사고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연고입니다.
시스템을 수정하고 개량하는 일은 시스템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실정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이제까지 완강히 고집해왔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계속 유지해옴으로써 정권을 장기간 잡아왔습니다. ‘결코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일’에 성공을 거듭하다 보니 거기에 취해있습니다. 그래서 고집하는 겁니다.
‘후퇴’를 둘러싼 의논은, 이제까지 채택되어 왔던 정책이 적절했는가의 여부를 면밀히 점검해보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어떤 정책이 성공했으며 어떤 정책이 실패했는가, 그것을 음미해보지 않고서는 의논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 지도층의 구성원들이 ‘세상없어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일인 겁니다.
두번째 이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그것은 위정자 자신들도 ‘일본은 앞으로 점점 쇠퇴해간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고, 그 원인도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이미 강구해놓고 있음에도, 그 프로세스를 국민에게 공개할 의사가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후퇴’ 문제는 이미 정부 내부에서는 철저하게 검토되고 있을 것이며, 정책 또한 결정이 나 있을 것입니다만, 그 사실 자체가 은폐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작금의 일본 위정자들의 지성이나 논리성을 저는 그다지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일본을 두고서 ‘국력이 증대되고 있다’는 치명적인 착오를 범할 정도의 지적 이상 상태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이 과거 30년 간의 실정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시급한 정치적 과제란 ‘줄어들고 있는 국민적 자원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라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후퇴 전략’을 이미 구상해놓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지혜조차 없다면 정권을 떠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공적인 장에서 화제로 올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민 자원의 상당히 언페어unfair적인 분배를 초래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도층이 이제까지 보여왔던 사고와 행동 패턴을 고려해 보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선택과 집중’을 더욱 공고히 하여 ‘강자에게 모든 자원을 몰아주고, 약자는 외면하는’ 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저는 그 이외의 해답을 도출할 지혜를 애써 짜내려는 식의 윤리성을 일본 지도층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승자 독식’이라는 ‘후퇴’ 전략을, 팬데믹, 인플레, 경제적 곤란으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 하에 공개해버린다면, 대다수 국민의 분노를 살 것이 자명합니다. 분명히 대다수 유권자를 화나게 하면 정권 유지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관해서는 꽁꽁 숨겨두고, 입을 다뭅니다.
어떠한 국민적 합의도 거치지 않은 채 정부 내부에서는 ‘후퇴 계획’을 이미 기안해 놓고, 착착 실시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어느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나면, 다시말해 정부가 주도하는 ‘후퇴 계획’ 이외의 선택지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게 된 시점에, 그제서야 ‘일본은 침몰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하고 손에 쥔 패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시나리오일지는 다른 꼭지에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방식이 약간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든가, 일본의 쇠퇴 과정을 좀 과장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갖고 계신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일본의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는 겁니다.
국력 쇠퇴를 보여주는 지표는 여럿 있습니다. 그중 가장 객관성이 높고 오차가 적은 지표가 인구통계입니다.
우리 일본의 총인구수는 2004년에 정점을 찍고 나서 하락에 하락을 이어가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1910년대 러일전쟁 전후 수준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인구추이 도표를 살펴보면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증가한 만큼 2100년까지 감소하므로, 인구추이 그래프는 좌우로 똑 떨어지는 종형 분포를 보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2100년 인구수 예측은 고위추계 6470만 명, 중위추계 4771만 명, 저위추계 3770만 명입니다. 현재가 1억 2천 600만 명이므로, 중위추계로만 보더라도 지금으로부터 80년 동안 7000만 명 이상이 줄어들 예정입니다. 연간 90만명입니다. 매년 현(縣)이 한 구역씩 없어지는 기세입니다.
인구가 감소된 만큼 해외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은 겨우 290만 명입니다. 팬데믹 탓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주자 수는 격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외국인 근로자(원문 ‘외국인 기능 실습생’ - 옮긴이)에 대한 폭력 사건이나 입국관리국에서의 인권 무시 사안에서 폭로된 바와 같이, 일본 사회는 ‘이방인’을 수용하는 능력이 비참할 정도로 낮습니다. ‘다양성과 포섭’을 표면상 내걸고는 있습니다만, 현재 일본인은 인종, 국적, 언어, 종교, 생활 문화를 달리 하는 ‘타자’들과 공생할 수 있을 정도의 시민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애초에 그러한 시민적 성숙이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국민적 합의조차 없습니다. 그런 나라가 인구 감소를 이민으로 벌충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구 감소(그리고 고령화)가 일본 국력 쇠퇴의 최대 원인입니다. 단발성 정책으로는 해결에 어림도 없습니다. 초기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일이 앞으로 많은 선진국에서 일어납니다. 일본을 이어 2027년에는 중국 인구가 피크 아웃하여, 이후 연간 500만 명이라는 인구 감소세로 돌아섭니다. 그 규모와 속도는 일본과 비할 바가 못됩니다. 중국의 중앙연령은 현재 37.4세로 미국과 동일합니다만, 2040년에는 현재 일본 수준인 48세에 달하게 됩니다. 한국도 2019년 5165만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되었습니다. 고령화 비율도 2065년에는 46%에 달하게 되며, 일본을 제외하면 OECD 가입국 가운데 1등 노인국이 됩니다. 세계 어디를 보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이 단계에 진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노인만 가득한 나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름대로 윤택하고 행복한 살림살이를 꾸리기 위해서 어떠한 제도를 설계해야 마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그 원형을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후퇴’ 전략만큼에 있어서는 ‘이렇게 해서 일본은 후퇴 국면에서 연착륙에 성공했고,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은 이렇게 해서 후퇴에 실패했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례’를 제시하는 것밖에는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듯합니다.
기고 의뢰문으로서는 너무나 길어졌기에, 끝을 맺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현상 인식에 입각하여 여러분은 자유로이 ‘후퇴’를 논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현상 인식이 저와는 다른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후퇴같은 건 필요 없다’는 논지도 물론 환영입니다. 기고자 모두가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시점에서, 독자적인 ‘판단 기준’으로, 이 문제를 종횡으로 논해주시는 것이 결국 독자에게 가장 많이 기여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기고를 의뢰드린 면면을 살펴보면 바쁘신 분들이 많기에 ‘시간적으로 무리’인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애초에 편집 취지가 내키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이기에 ‘안 쓰겠습니다’ 하는 경우에는 사양 마시고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2021년 10월
우치다 타츠루
위 글을 통해 이 책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리트릿’이라는 말을 저는 대학 재직 중에 종종 접했습니다. 그것은 ‘피정회(避靜會)’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분명히 영일사전에서 retreat을 펼쳐보면, ‘정양靜養’이나 ‘묵상默想’이라는 번역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조용한 환경 가운데 영적 수양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몰랐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미션 스쿨에서는 전 교직원이 모여서 채플 기도를 가진 후에 분과 모임으로 나뉘어, 꼬박 하룻동안 ‘우리 대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건학 이념을 검증해보는 것이 ‘피정회’였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들은 앞으로 ‘후퇴’에 대해 여러가지 논점을 제출합니다. 그리고, 제가 갖고 있는 소소한 바람이라고 하면, 그 작업 자체를 ‘묵상’을 통해 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공동체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화두를 걸어두시라, 하는 겁니다. 그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둘러싼 사색은, 그렇게 논쟁적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묵상’이라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힘드시겠지만 말입니다.
뒷장부터 수록되어 있는 논고는 모두 기고자들이 힘껏 써준 것이므로, 다양한 지견으로 넘쳐흐르기도 하거니와, 한 번 읽고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대목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독자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묵상’적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읽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 논고를 다 읽고 나면,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말고 커피를 한 잔 마신다든가, 산책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인터벌을 두고서, 문장이 여러분 가슴 가운데 ‘착상着床’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면 기쁘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2022년 1월
우치다 타츠루
(2022-04-13 17:3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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