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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5. 25. 22:32
2017년 4월에 대만 담강대학(淡江大学)의 ‘무라카미 하루키 연구 센터’의 초청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계보와 구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전문은 뒷날 <거리의 예술론>에 수록되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의 요청으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 관한 인터뷰에 응했을 때, 이 영화의 주제도 ‘상처받아야만 했을 때 충분히 상처입지 않은 인간이 끌어안기를 거부한 부(負)의 감정은 악령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신문지상의 한계가 있어 설명이 부족하리라고 생각해, 블로그에 담강대학 강의록의 관련부분을 다시금 올려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거의 배타적으로 ‘굴을 파고 드는’ 비유를 든다는 것은 방금 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비유도 이용합니다. 그것은 ‘이층 계단’ 혹은 ‘우물 바닥’에 내려간다는 비유입니다. 지하실 아래에 또 지하실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 존재라는 것은, 이층 집과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층은 모두 모여 식사하고, 티브이를 보며, 이야기를 하는 곳입니다. 이층은 각자의 방이나 침실이 있어서, 거기서는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음악을 듣습니다. 그리고 지하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는 특별한 장소로 여러 물건이 놓여져 있습니다. (…) 그 지하실 아래에는 또다른 지하실이 있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굉장히 특수한 문이 있어서 알아채기 힘들기에 보통은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들어가지 않고 내버려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박자에 맞춰 흡 하고 들어가버리면, 거기에는 암흑의 공간이 있습니다. (…) 그 안으로 들어가서, 흑암 한가운데를 돌아다니며 집안에서는 보통 볼 수 없는 것을 그 사람은 체험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바깥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지요. 그곳에 계속 머물면 현실에 복귀할 수 없습니다.” (<꿈을 꾸기 위해서…>, 98쪽)
작가란 지하 2층에 내려가, 거기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특수한 기능을 갖춘 기능인이라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딱히 소설가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영혼 가운데’에 들어가 거기서 보고 들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일을 주된 일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샤먼들이 그렇습니다. 우에다노 아레稗田阿礼처럼 구비문학을 전승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호메로스처럼 서사시를 암송하는 음유 시인들도 그러하며, ‘민족 정신(Volksgeist)’에 높은 가치를 두는 작가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은 이와 접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심적으로 편안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해변의 카프카>와 관련된 악이라는 것은 역시 지하 2층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유전자로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지하 2층의 부분, 이는 이어져 내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든 적든 아이들이란 부모로부터 그러한 것을 이어 받는 존재입니다. 저주든 축복이든, 그것은 이미 피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식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거기에는 고대의 어둠 같은게 있어서, 거기서 사람이 느끼는 공포라든가, 분노라든가, 슬픔이라는 것은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근원적인 기억으로서 말입니다. 카프카 군이 이어받은 것도 그런 겁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어도, 그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책, 115쪽)
지하 2층에 내려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고대의 어둠’ 가운데에 걸어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 어둠으로부터 돌아와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학술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도 하거니와, 학술 주제적으로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증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사람이 느끼는 공포라든가, 분노라든가, 슬픔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전승되어오는데, 실제로 우리의 감정 생활을 형성하고, 우리의 코스몰로지의 주축이 되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를 조형해내기 때문에, ‘고대의 어둠’은 그 자체로 곧장 ‘현대의 어둠’에 얽히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걸어들어가본 자는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어둠으로 침입하게 된 당신은 당장은 무서움을 느끼겠지만, 또 다른 때에는 굉장히 마음이 편해지겠지요. 거기서는 기묘한 것을 잔뜩 목격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형이상학적인 기호나 이미지가 속속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것은 거의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무의식 세계의 형태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은 현실 세계에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때에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고 계단을 오르는 겁니다. (…) 제게 있어서 그 공간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써, 그것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눈에 비칩니다. 이러한 요소가 소설 쓰기를 도와줍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쓴다는 것은, 거의 잠에서 깨자마자 꾸는 꿈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를 언제 개입시키는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법외적(法外的) 경험인 겁니다. 저는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납니다.” (같은 책, 156~157쪽)
이 부분을 읽을 때 많은 독자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후반부에서 ‘나’가 아마다 마사히코雨田具彦라는 노인 요양 시설의 침상에 파여진 구멍에서 파고들게 되는 ‘메타포 통로’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겠지요. 혹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카프카 소년이 걸어들어가는 ‘숲의 중핵’에서의 경험을 말입니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일련의 설명 불가한 것은, 작가가 문학적 효과를 노리고 기교적으로 꾸며놓은 장식적인 연막 치기가 아니라, 아마도 작가 자신이 ‘잠에서 깬 뒤 꾼 꿈’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을 쓴 작가 자신조차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에 작가는 씁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둠 속에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서사, ‘저세상으로 내려감’이라는 설화 형식도 또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본의 근대 문학 이후의 시대에 한하여, 그 계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고대의 어둠’이라고 일컬어진 것을 다른 곳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근대의 어둠’이라고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부정하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 어둠을 말한다는 점에서 우에다 아키나리의 직계로 이어진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게쓰 이야기> 등과 같이,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 꼭 맞닿는 것처럼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는 것에 대해 사람은 그렇게까지 위화감을 갖지 않습니다. 이는 말하자면 일본인의 멘털리티 안에 원래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그것을 소위 근대 소설이,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미명 하에, 근대적 자아의 독립을 지향하여 무리하게 내친 것입니다. 개별적인 개념으로서, ‘정신적 종합 풍경’이라고도 불릴 만한 것으로부터 찬탈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책, 93~94쪽)
근대문학에서도 물론 ‘비현실’은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로부터 유리된, 일종의 문학적 의장인데, 작중의 등장인물이 꾸는 꿈이라든가 환상 혹은 극중극같이 누군가가 쓴 판타지 같은 ‘액자’가 둘러져 있어서, 현실과 비현실이 경계를 넘어, 같은 차원에서 혼합되는 사태에는 엄중한 방법적 억제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유로이 이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이야말로 일본 문학의 정수라는 대담한 가설을 논합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의 ‘비현실적’인 등장인물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제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커넬 샌더스의 저주같은 것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에 응해, 장소와 상관 없이 당신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탠저블tangible한 것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손을 뻗으면 거기에 닿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를 내세워, 그에 관해 씀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책, 127~8쪽)
“제 경우에는, (…) 그러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걸친 존재 양식과 같은 구석에 가장 끌렸던 것입니다. 일본의 근대라든지 메이지 유신 이전의 세계이지요. (…) 일본같으면 자연스럽게 훌쩍,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상황에 따라 오갈 수 있습니다만, 그리스 신화 등의 경우에는, 정말로 자신의 사고방식이라든가 존재 양식의 구성을 확 하고 변환시키지 못하는 한 저쪽 세상에 갈 수 없습니다.” (같은 책, 94쪽)
동양과 서양은 현실과 비현실을 분간하는 ‘벽의 두께’가 서로 다릅니다. 이리하여 하루키 자신의 문학적 입장에 대한 자각이 드러납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병행하는 두 세계가 있어서, 그 사이에 어떤 가교가, 한 쪽 세계에서 다른 쪽 세계로의 이동을 너무 어렵게 하지는 않게 하고 있다,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이 세계는 이 세계고, 저 세계는 저 세계, 라는 식의 방식입니다. 분리가 엄격합니다. 뛰어 넘으려고 해도 벽이 너무나 높고, 너무나 철저합니다. 하지만 아시아 문학은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가 그려져 있는 것은, 그러한 상황입니다.” (같은 책, 157~158쪽)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기서 당돌하게도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 고전 문학의 미적 개념을 끌어들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직접적으로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지적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이러한 상황’, 즉 두 세계 사이에서 꽤 자유로이 오고 가는 상황의 이야기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예전에 가와이 하야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겐지모노가타리 속에 들어있는 초자연성이란, 현실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는 거겠네요.
가와이 어떠한 초자연성 말씀이십니까?
하루키 말하자면 원혼이라든가 말이죠…
가와이 그런 건 의심할 것 없이 현실 그 자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이야기의 장치로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히 현실의 일부라는 건가요?
가와이 그럼요, 이미 전부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치로서 쓰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이 하야오를 만나다> 이와나미 서점, 1996년, 123~124쪽, 강조는 우치다)
이 대담이 있었던 시점(1995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경계를 뛰어넘어 비현실이 침입해 들어온다는 것은, 일종의 ‘장치’, 일종의 문학적 기교가 아닌가(그래도 그럴 리가 없다) 하는 갈등에 빠져있었던 점이 대화에서 엿보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것은 정말 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는 가와이 하야오의 단정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것은 <겐지모노가타리> 속의 원혼 서사가,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작품에서 모습을 바꾸며 반복해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로쿠조노 미야슨도코로의 생령이 아오이노우에에게 저주를 걸어 살해하는 대목은 <겐지모노가타리> 중에서도 가장 컬러풀한 원혼 서사입니다만, 이 로쿠조노 미야슨도코로라는 고귀한 여성이 ‘질투’같은 천박한 감정을 자신이 품기를 거절하였으므로 일어난 참극입니다. 여기에 서사적으로 좀 더 가까운 것은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되어 있는 <기노>입니다.
기노는 ‘회사에서 가장 친했던 동료와 자신의 아내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혼자 집을 나오고, 회사도 그만둡니다. 그리고 백모로부터 아오야마의 작은 찻집을 넘겨받아서, 오디오 장치에 파묻힌 재즈바를 엽니다.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잔 옛 동료에 대한 분노나 후회의 기분은 어째서인지 솟구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잠깐 지속되었지만, 드디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그렇게 몹쓸 것을 봤다는 식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기노’, <여자 없는 남자들>, 문예춘추, 2014년, 221쪽)
기노는 “분노나 후회”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픔이라든가 분노, 실망이라든가 체념, 그러한 감각조차 지금은 어느 하나 명료하게 느낄 수 없” (같은 책, 221쪽) 는 상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기노 주위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손님 모두에게 음험한 트러블이 생기고, 몸에 담배자국이 있는 여자와 얽히게 되며, 개점 때 ‘좋은 흐름’을 가져다 준 것으로 생각되는 고양이가 모습을 감추고, 삿된 기운을 지닌 뱀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가게의 ‘수호자’ 역할을 맡아 왔던 카미타라는 손님으로부터 가게를 닫으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기노는 그 충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카미타 씨 말씀은, 제가 무언가 옳지 못한 일을 한 게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겁니까? 이 가게에 관해, 혹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입니다.” (같은 책, 248쪽)
기노는 카미타의 충고에 따라 여행을 나서지만, ‘카미타에게 완강하게 금지당한’ 사신(私信) 쓰기라는 금기를 범한 탓에 호텔방에서 한밤중에 집요한 노크 소리를 불러들이고 맙니다. 그때 기노는 자신이 무언가를 끌어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약간이라도 상처받았잖아?> 하고 아내는 내게 물었다. <나도 역시 인간이니까 상처받을만도 하지>라고 기노는 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반쯤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했을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은 것이다, 하고 기노는 받아들였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만 했을 때, 나는 중요한 감각을 억눌러버리고 말았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는 거짓된 마음을 계속 품게 되었다.” (같은 책, 256~257쪽, 강조는 무라카미)
이야기는 기노가 “그렇다, 나는 상처입었다, 그것도 아주 깊게”(같은 책, 261쪽)라고 인정함으로써 구원의 예감 가운데 끝납니다.
상처입어야 할 때 충분히 상처입고, 통절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원혼을 해방시키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로쿠조노 미야슨도코로가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질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해할 정도로 현실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기노가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질투’는 그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겐지모노가타리>의 세계와 잇닿아 있는 문학적 풍토 속에 있다는 점에 충분히 자각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과거 일본인 작가 중에 분명히 밝힌 ‘잇닿음’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우에다 아키나리입니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썼습니다. 정말 별개의 문맥입니다만, 에토 슌은 우에다 아키나리의 문학적 본질이 ‘어둠’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키나리도 또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썼던 작가입니다. 아키나리는 그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농밀한 실재감을 띠고서, 인간의 생과 사에 관련된 것을 일찍이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여우는 사람을 홀리는 요물입니다. 그러한 것이 아키나리의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는 분명한 리얼리티를 갖고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지식인들은 괴력난신에 대한 이야기를 황당무계로 일축했습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여우에게 홀림’이란 그저 정신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키나리는 감히 ‘여우’를 옹호하는 입장을 관철했습니다. 그 아키나리가 처한 입지에 대해 에토 슌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유학자의 눈에 비치는 것은, 질환이라는 개념이지 <여우> 같은 비현실적인 현존이 가져다주는 압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아카데미를 한발짝 벗어나고 보면, <풍진 세상>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개념이 아니라, <여우>에 홀린 인간의 기괴한, 그러나 질서의 구속 가운데 있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일 때는 결코 볼 수 없을 정도의 진한 실재감으로 충만한 자태이다. 혹은 또한,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비현실 세계로부터의 여러 신호이다.” (에토 슌,<근대 이전>, 분게이슌쥬, 1985년, 238쪽)
아키나리 자신은 선명하게 ‘여우’의 실재를 느꼈습니다. 학자나 상식인이 아무리 부정하여도, 시정(市井) 사람들이 실제로 그 절박함을 느끼고, ‘비실재의 실재가 가져다주는 압력’을 받아들인다든가, 나중에는 그것의 현현이 되면서 실제로 매일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 동물과도 같은 농밀한 실재감을 부여하는 것을, 아키나리는 외계의 현실에서 한 가지도 인정할 수 없었다.” (같은 책, 240쪽)
‘여우’는 아키나리가 그의 지하 이층에서 만났던 ‘기묘한 것’의 별칭입니다. 그 지하의 ‘어둠’ 가운데 인간이 느낀 공포라든가, 분노라든가, 슬픔’, 그 ‘근원적인 기억’을 작품에 부여할 때 <우게쓰 이야기>라는 작품이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마 동양인 작가밖에는 능숙히 쓸 수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에는 태고적부터 이 땅에서 나고 죽은 무수한 사람들의 기억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022-04-13 17: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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