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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화의 교육론> 관련 인터뷰 제 2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6. 26. 14:38
— 이번에 새로 나온 우치다 님의 <후퇴론>에는, 인구 감소 현상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담론이 있습니다. 인구 감소가 진행되면서 일본어 화자가 함께 줄어드는 가운데, 일본어 교육(이하 국어 교육國語敎育 - 옮긴이)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겠습니까.
인간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국어로밖에는 창출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단언하는 게 조금 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적(知的) 이노베이션의 풍요로움과 모국어의 풍요로움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이노베이션은 아직 윤곽이 흐릿해져 있는 ‘성운상星雲狀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됩니다만, 그 아이디어의 의외성은, 그 사람이 얼마나 풍요로운 ‘모국어 아카이브’를 이용할 수 있는가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어 교육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기초로 삼아야 할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풍요로운 어휘를 가질 것, 선명한 레토릭을 구사할 수 있을 것, 특히 ‘새로운 개념’에 대응하는 신조어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그것이 지적 이노베이션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만, 이는 모국어로밖에는 행할 수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언어 능력이 높은 사람이 있다면 후천적으로 습득한 외국어라 할지라도 복잡한 뉘앙스를 가진 말을 구사한다든지, 복잡한 논리 절차를 가진 구문을 말할 수 있다든지 하는 일이 혹 있겠습니다만, 평균적인 언어능력의 소유자는 그러한 작업을 모국어로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일본 열도에는 수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언어를 발해왔고, 문자를 써왔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모국어 아카이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알고 있는 어휘라든지,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구문이라든지 수사, 음운은 그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국어 아카이브’로 들어가는 입구는 우리가 모국어를 습득해오는 과정을 통해, 모든 일본어 화자가 표준 장착하고 있습니다. 국어 교육이란 것은, 전체 학생의 내면에 표준 장착되어 있는 이 ‘모국어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모국어 아카이브’에는, 예로부터 일본 열도 거주민들에 의해 행해진 모든 언행, 모든 문자열의 나열이 집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천문학적 크기의 도서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표준 장착되어 있는 것은 그 도서관 자체가 아니라, 그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혹은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국어 교육이라는 것은, 이 ‘천문학적 스케일의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어떻게 열 것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모국어 아카이브’의 심부에 침잠해갈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이케자와 나쓰키 씨가 독립적으로 펴낸 문학 전집 작업에 <도연초徒然草> 현대어 번역으로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도연초>라 함은, 입시 학원 다닐 때 대학 가는 공부 하느라고 읽었던 게 마지막이기도 하거니와, 고전어 사전 역시 그 당시에 쓰던 다 낡아 헤진 것이 수중에 한 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과연 현대어 번역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했습니다만, 이케자와 씨가 저를 일부러 호명한 것은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일진대,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매일 한 꼭지 내지 두 꼭지 정도 조금씩 옮기가다 보니, 2년에 걸쳐 완역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읽다 보니 점점 낯이 익기 시작했습니다. 글쓴이인 요시다 겐코와 점점 호흡이 맞아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격을 가진 이인지 차츰 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단어와 마주했을 때도 고전어 사전을 펼치기 전에 ‘대충 이런 뜻 아닐런지’ 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마친 후 ‘<도연초>를 옮기며’라는 주제로 두번 강연을 하였습니다. 교토의 니시혼간지에서 강연을 하고 난 뒤,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손을 든 분이 계셨는데 자기소개하기를, ‘저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입니다만, 박사 논문을 <도연초> 연구로 썼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와, 대체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설렜습니다만,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가카리무스비*의 해석이 적절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 자신 놀랐습니다. 실은 가카리무스비라는 것에는 5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어서, 문맥에 따라 바꿔 번역해야 의미가 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법 규칙이 있는지조차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웃음). 그래도, 어떻게 번역이 되었나 봅니다.
(* 係り結び: 주로 문어에 있어서, 문장 가운데에 가카리조사係助詞 또는 의문사가 쓰였을 때, 그에 호응하여 문장 끝의 활용어가 일정한 활용형으로 나타나는 현상. 헤이안 시대에 특히 발달하여 널리 사용되었으나, 중세 이래 서서히 소멸되었다. - 옮긴이)
이런 게 가능한 이유는, 역시 모국어여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시다 겐코는 800년 전 사람입니다. 하지만, 800년 전까지의 ‘모국어 아카이브’를 저는 그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솟아나오는 표현이므로, 뿌리는 같은 겁니다. 그래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모국어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종종, 새로운 일본어가 생겨나는 일이 있습니다. ‘신조어(neologism)’라고 하는데요, 신조어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어떤 사람에 의해 갑자기 떠오른 그 새로운 말이나 표현이 이전까지는 전혀 쓰이지 않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묘한 뉘앙스를 일본어 화자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조어의 전파 속도는 굉장히 빠릅니다. 아마 몇 주 안에 일본 열도 방방곡곡까지 일거에 확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신조어의 발명은 모국어 화자밖에는 못합니다. 제가 외국어로 새로운 말을 떠올려내서 그것을 말한다고 쳐도, 아마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를 겁니다. ‘그런 표현은 쓰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그대로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모국어 화자라면 그때까지 아무도 사용했던 적이 없던 신조어여도,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뉘앙스가 전해집니다.
인상적인 신조어는 반(半)의문형입니다. ‘복잡화의 교육론?’ 같이, 어미를 약간 올리는 독특한 표현방식입니다. 이게 특정 시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잘 모르긴 한데’ 라든가 ‘나는 아직 평가를 내리지 않아서, 일단 판단 보류해두겠는데’ 같이 상당히 복잡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표현법입니다.
이걸 처음 들은 게 90년대 초 대학 교수회의 때였습니다. 선생님 한 사람이 어떤 교육 프로그램에 관해 논하고 있었는데, 반의문형을 사용한 겁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미묘하게 어미를 올리는 표현방식으로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 사람이 대학 내에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얘기 들은 적도 없고, 내용이 뭔지도 모르며, 평가도 내리지 않을거고, 결론을 말하자면 반대인데’ 라는 뉘앙스를 훌륭하게 전달하는지라,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티브이를 보는데, 출연자들이 속속 반의문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퍼지는 속도가 엄청난데…’하고 감탄했습니다.
‘마갸쿠(真逆; 정반대. 종래에는 ‘마사카’로 읽어왔음 - 옮긴이)’라든가 ‘호보호보ほぼほぼ’ 등, 모두 처음 들었을 적에 바로 의미나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호보’는 ‘호보’보다 살짝 조금 확률적으로 낮음을 의미하죠. 그러한 의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전국에 쥐도 새도 모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모국어의 생성력, 전파력이라는 것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표현,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을 적에, 그 언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으며, 바로 써먹을 수 있게 됩니다.
수학자 오카 기요시(岡 潔)는 ‘수학은 정서情緒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한 ‘정서’라는 것은 아마 수학적인 아이디어로써 분명한 형태를 드러내기 직전의, 윤곽이 흐릿한 성운(星雲) 상태의 사념을 이끄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무정형amorphous의 사념이 꼴을 갖추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투입이 필요하다, 라는 겁니다. 성운 상태의 아이디어가 학술적 개념으로 응축되기 위해서는, ‘자아를 잊고’ 몰입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풍부한 감정 생활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런 내용을 오카 기요시는 말하지 않았나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자연 과학, 사회 과학, 혹은 문학의 영역에서,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말할라치면, 그것은 지극히 정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서적인 것, 신체 감각적인 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하여 모국어가 필요합니다. 신조어가 용솟음치는 것과 같이, 모국어 아카이브로부터 솟아오르는 표현이 아니고서는, 이 정서를 잘 낚아챌 수 없습니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아시아 국가들 중 현저히 많은 나라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일본어는 국제 공용어가 아닙니다. 일본어 화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1억 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반면, 옛 서구 식민지였던 연고로 모국어를 빼앗기고, 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정해놓은 나라에서는, 자연과학 분야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은 이전에 미국 식민지였고, 인도는 영국 식민지였으므로, 둘 다 영어가 공용어입니다. 지식인은 누구든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인 즉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가, 관료, 학자 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표준적 연구를 팔로우업한다든지, 국제 공용어로 학회 발표를 한다든지, 논문을 작성하는 데에 있어서 일본보다도 한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 나라 모두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노벨상 수상자가 적습니다. 필리핀은 전무하고, 인도는 5명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외국 국적 소유자가 4명입니다. 국제 공용어가 아닌 언어로 연구하는 일본은 자연 과학계에서만 27명(외국 국적 3명 포함)을 배출했습니다. 이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타갈로그 어나 힌두 어는 뉘앙스가 흘러넘치는 생활 언어입니다만, 정치나 경제, 과학을 이들 언어로 논하기는 조금 애매합니다. 그래서 영어를 씁니다. 모두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므로, 모국어를 가꾼다든가, 모국어의 외연을 확장시킨다든가 하는 일에 대한 인센티브가 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나라들 내부의 지적 이노베이션을 저해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필리핀 출신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practical하지만, 모국어로는 영어와 같은 내용을 말할 수 없는 것은 tragic이다’. 정말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타갈로그 어로는 정치나 경제, 학술에 대해 충분히 표현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한 어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한 레토릭이나 복잡한 구문이 정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어의 식민지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주국 입장에서는, 현지 주민이 갖고 있는 창발성의 ‘싹을 제거하는’ 것이 식민통치에 있어서 필요했기 때문에, 모국어를 빈약하게 만들고, 종주국의 언어를 학습케 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한반도나 대만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모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종주국의 언어만을 쓰게 하면서, 그들의 ’모국어 아카이브’로의 접근을 방해했습니다. 하지만, ‘모국어 아카이브’에 깊이 침잠하는 작업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발생 차원에서는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모국어로 박사 논문을 쓰는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일본어로 쓴 논문일지라도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관행이 갈라파고스화의 원인이라고 하여, 논문은 영어로 쓰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모국어 범위 내에 세계 표준적 학술 어휘가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예외적 사실인지를 잊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모국어로 국제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일본의 몇 안되는 지적 어드밴티지인 것입니다.
국어 교육은, 모국어 아카이브에 접근하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과목입니다. 그 기술에 습숙(習熟)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 안에 불쑥 떠오른, 부정형이면서도 성운 상태의 아이디어의 단편에, 부합하는 표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적인 이노베이션을 구동합니다.
모국어 아카이브에 깊고 넓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켜 가는 것, 그것이 한 언어 집단의 지적 생명에 있어 가히 필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지금 국어교육을 논하는 사람들은 거의 자각을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고전 문학 따위 안 가르쳐도 되니 영어 회화를 가르치라’는 식의, 언어의 식민지화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발언을 하는 인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2022-06-06 10:5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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