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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비우스 막시무스 (김범석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인용 2021. 11. 20. 06:59

     ‘파비우스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로부터 비롯된 이 용어는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큰 피해를 입더라도 결국은 이기는 전략을 말한다. 즉 승리를 위해 지구전, 소모전을 지향하는 셈이다. 지중해 패권을 둔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대적해야 했던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싸움을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해나갔다. 그러나 로마는 정정당당한 대결을 높이 평가했으며 전쟁에서의 후퇴를 치욕으로 여겼고, 한니발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파비우스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전략으로 그는 로마를 지켜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은 그의 전략이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무모하게 무턱대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전략을 바꾸는 게 낫다. 이길 수 없다면 지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는 말이다. 끝까지 버틴다는 정신으로 버티다 보면 때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 이때 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 몇 가지 갖춰야 할 것이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로마 장군들의 개별적인 역량에 대해 냉철히 평가하고 있었다. 로마 장군들의 개별적인 역량만으로는 절대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파비우스는 일찌감치 알았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전투에 임하면서 상대에 비해 부족한 전력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자기부정에 가깝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인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파비우스가 파악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니발 군대에 식량 보급이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점도, 한니발은 매우 뛰어나지만 그 이외의 카르타고 장군들은 별 볼일 없다는 점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로마에 뛰어난 장군은 없지만 로마에서 싸우는 만큼 자신들은 식량과 군수 물자 보급에 문제없다는 장점도 깨달았다.
     파비우스가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니다. 그는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 군대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면서 상황을 살펴나갔다. 상대의 다음 행로를 예측하며 때로는 한니발 군대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가 기다리기도 했고, 한니발이 없는 상황을 틈타 소소한 전투도 벌였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전략은 지난한 싸움 끝에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로마에 안겨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도 때로는 그 같은 전략을 택한다. 암세포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 종종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틴다. 종양의 크기가 어떻든 간에 장기의 기본적인 기능이 유지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환자가 좀 더 오래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아프지 않도록 만든다. 정면승부를 피하고 버텨보는 식이다. (...)
     이 같은 전략의 목적은 암이 자라는 것의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환자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에 이 작전도 언젠가는 무의미해질 테지만 적어도 독한 항암치료로 힘든 상황은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는 데다가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다.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으로 환자가 다른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버티기 전략을 가르쳐주는 스승은 별로 없다. 이런 전략은 아주 오랜 시간 아주 많은 환자를 보고 수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소위 명의니 대가니 하는 사람들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지만 후배들에게 잘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자칫 의사로서 비굴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전략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종양의 크기를 떠나 최대한 증상을 완화하며 시간을 버는, 완화 의료라고 불리는 이 전략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신 표적항암제가 두 달의 시간을 벌어들일 때는 열광하지만 완화의료로 동일한 두 달의 시간을 버는 것에는 놀랍도록 냉담하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 김범석 지음 / 서울 : 흐름출판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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