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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약속된 장소에서) "가와이 하야오 씨와의 대담"인용 2021. 11. 8. 07:00
하야오 (…) 그런 자리에 앉아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보면 판단력이 굉장히 예리해집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잘못도 하죠. 잘못도 저지르지만, 그래도 직감적으로 단번에 알 수 있는 부분도 상당히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그렇게 쉽게 당하는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한눈에 이런저런 일을 훤히 꿰뚫어보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정말 그래요.
하루키 그런 카리스마적인 직감력은 히틀러도 갖고 있었죠. 군사전문가가 꿰뚫어볼 수 없는 것을 수없이 간파해서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거나.
하야오 바로 그겁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니었죠. 운동선수도 그래요. 계속 승승장구할 때가 있죠. 그럴 때는 ‘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고 합니다. 도저히 역전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 난 이긴다’ 고 확신하면 마음이 매우 안정되어 정말로 이기죠. 그런데 그것이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끝없이 명석해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 직업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그거죠.
하루키 그건 심리치료사로서 그렇다는 뜻인가요? 누군가를 만나면 단번에 훤히 꿰뚫어볼 수 있다는?
하야오 그렇죠. 꿰뚫어본 것처럼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게 딱딱 들어맞을 때가 있어요. 이렇게 되겠지 했는데, 어, 정말 이렇게 됐네, 하는 식이죠. 그러나 그러기 시작하면 절대 안 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틀릴 때가 오니까요. 인간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러다보면, 아사하라 쇼코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어떻게 해주자’ 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끝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에, 스스로 점점 모르게 되는 수행을 해온 것 같습니다. 좀더 젊을 때는 많이 아는 줄 알았어요. 정말로. 인간이 ‘명석해지는’ 시기는 분명히 있지만, 거기 도취된 사람은 모두 못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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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우치다의 사상으로서의 페미니즘 비판->,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석중 옮김, 266~268쪽)
"왜 지적으로 탁월한 페미니스트들은 그 사상 운동의 퇴조를 저지할 수 없었는가?
결론부터 미리 말해두자.
그것은 인간의 지성은 그 지적 탁월성의 절정에서 균형을 잃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의 부조는 '절호조絶好調'라고 하는 양태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그 '절호조'의 정점에서 '나는 어떻게 이만큼 똑똑한가?'라고 하는 (대답해서는 안 되는) 질문에 그만 답을 내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도 지크문트 프로이트도 막스 베버도, 역사상의 천재들은 놀랄 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다양한 문제들에 관하여 신선하게 설명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어째서 온갖 문제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똑똑한가'에 관해서만은 설명을 유보했다.
(...) 어째서 다른 인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는 술술 이해가 되는가, 그 똑똑함이 근거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불능'을 통해서, 천재는 그 통찰이 천부적인 것이고, 인위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전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속에서 '나는 어떻게 이 정도로 똑똑한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니체는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똑똑한지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읽어보면 바로 안다).
(이하 <안티프래질>, 나심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이제 악당 경제학자 장하준의, 단순한 것이 더 낫다는 식의 강력한 주장을 살펴보자. 1960년 대만의 문해율은 필리핀보다 훨씬 더 낮았고 1인당 국민 소득은 절반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의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10배다. 당시 한국의 문해율은 아르헨티나(문해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보다 훨씬 더 낮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5분의 1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국민소득은 아르헨티나의 3배다. 더구나 같은 기간 동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은 문해율이 크게 높아졌지만, 생활수준은 오히려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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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오 그렇죠. 현대인들은 아무래도 신체성에서 벗어나버렸고, 그러다보니 자꾸 머리만 커져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신체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면서 요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각성된 의식과 평범한 일상생활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는 겁니다. (…) 명상을 하다 보면, 언제 끝날까, 맛있는 걸 먹고 싶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죠(웃음). (…) 재미있는 건 너무 빨리 깨달은 사람의 경우,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에 비해 고생스럽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왜 이렇게 깨닫기 힘들까. 왜 나만 안 될까’ 라고 고민하면서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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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은 과연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이따금 들곤 합니다. 특히 옴진리교 사람들을 인터뷰하다보면 그것을 실감합니다. (…) 모두가 많든 적든 ‘지시 대기’ 상태인 겁니다. 어딘가에서 지시가 내려오길 기다립니다. 지시가 없다는 건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고,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상태인 셈이죠.
하야오 그거야말로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군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자유가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게 교육의 근본입니다. 부디 그런 교육을 해주길 바라는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잘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선생님들을 좋아해서 자주 대화를 나누는데, 능력 있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요.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의외로 제법 잘해나갑니다. 딴 짓도 조금씩은 합니다만, 그런 것도 그냥 놔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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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오 (일본에 처음 - 인용자) 기독교 선교사가 왔을 때, 그들은 ‘이렇게 다루기 쉬운 나라는 없다’ 고 여겼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독교 신자가 생길 거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이쪽에는 이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물들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긍정적이고 안심할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느냐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어렵죠.
하루키 그런 자기모순 같은 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옴진리교 사건이 벌어지는 건 저지할 수 없지만, 일단 벌어지고 나면 그것을 정화하려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자연치유력이라고 할까요. 따라서 ‘지하철 사린사건을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은 사회의 패배가 아니냐’ 는 표현도 가능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해가는 터프함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대체 뭐가 옳은 건지 점점 알 수 없어집니다.
하야오 그래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정말 그 말이 맞아요.
하루키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될 계획인데, 이 책에 씌어 있는 내용 중에는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야오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미국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의미에서 꼭 읽혀보고 싶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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