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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30 책을 읽읍시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11. 07:00

    이번 주는 독서주간이라는 모양이다. 신문 사설에서 ‘여러분 책을 읽읍시다’라고 격려하고는 있지만, 아침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화와 매일반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결국 ‘책도 이제는 끝’이라는 얘기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물론 미스터리라든가 탤런트 화보집이라든가 패션지라든가 가이드북이라든가 게임 공략본같은 것은 읽겠지만, ‘고전’이라든가 ‘외국문학’같은 것은 전혀 읽지 않는다. 아주, 훌륭할 정도로, 정말로, 감동적일 정도로, 읽지 않는다.

     

    요전에 도쿄대학 선생님과 그와 관련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선생님의 수업에서 ‘이제까지 읽어본 적이 있는 프랑스 문학작품의 책 제목을 써보라’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그중에 하나 ‘카프카’라고 쓴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니 옆에 있던 똑같은 처지의 모 사립대학 프랑스 문학 선생님이 ‘하하하, 농담이 아니예요. 그 정도로 한탄하신다면 제가 고개를 못 들지요’라고 응수했다. 그 선생님의 세미나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테마를 써서 제출하시오 했던 적이 있었던 건데, 그중에 전공 연구 테마로 ‘카뮈트르와 사르’라고 써서 낸 학생이 있었다는 모양이다.

     

    ‘카뮈트르와 사르’. 지어낸 얘기에서는 나오지 않을 폭력적인 리얼리티를 느꼈다.

     

     

    시대가 변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일본 문학 교과서에 나온 ‘中原中也나카하라 주야’라는 이름 읽는 법을 몰라서, 작은 목소리로 ‘나카하라, 나카야’로 읽은 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이후 3년 내내 누구도 그와 상대해주지 않았던 어두운 청춘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들이 조금 지나치게 짓궂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긴장감 탓에, 그때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서적에 좋든 싫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던 것이다.

     

    고역을 참아내며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서책이라는 게 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감수성이나 이해력을 가지고서는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그러한 것을 읽기 위해서는 자기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의 짜임새 용량을 무리하게 확장해야만 하는, 때로는 자신의 미숙한 세계관이 해체되는 아픔을 견뎌야만 하는 독서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이 마르크스나 니체나 도스토옙스키나 바타유를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딱한 경험이다.

     

     

    <악령>이나 <내적 체험>을 읽던 도중에 ‘마코토, 밥 먹어라!’ 하는 소리에 계단을 내려가니, TV를 보며 후루룩 우동을 먹고 있는 모친이 ‘너 엔도 구미코랑 나카야마 에미리 구별할 수 있어?’ 하는 모습을 갑자기 접하게 된 마코토 군(고등학생・17)의 마음에 오가는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 가운데에는 없다.

     

    그가 <악령>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읽을 경지까지 성숙해진다면, 어쩌면 모친의 무구한 질문에 ‘그럼 엄마는 런던부츠 1호와 2호 중 누가 아츠시인지 알겠어?’ 하고 웃으며 흘려넘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역으로써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고등학생에게 그런 포용력은 없다. 그가 증오해야만 하는 ‘무지’의 현현으로서의 ‘우동 후루룩 엄마’를 응시하며, 지금까지 친밀함과 따뜻함을 느꼈던 세상이 급속히 퇴색해가는 것을 느낀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의 <세계의 적소 전체성 붕괴>이며, 카뮈의 <부조리>인 것이다’라고 혼잣말하며, 마코토 군은 집에서 차츰 말수가 적어지고 음침한 소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가 다시금 활기찬 모친을 사랑하는 방식을 새로 배울 때까지는, 더 많은 책을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훌륭한 책은 우리들이 이제까지 본 적 없었던 풍경 속으로 데려다준다. 그 풍경이 너무나 강렬해서 우리들은 이제 더이상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 왔던 세상에 이전과 같이 낯이 익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을 헤집고 들어가봤지만 반드시 ‘아, 이제 더는 앞으로 못 가겠다’ 하는 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다시금 ‘예전 세상’에 돌아왔을 때, 우리들에게 익숙했을 터인 세상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 끝없는 자기해체와 자기재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게 되고, 한 번 미워했던 것을 다시금 받아들인다는 방식으로 우리들은,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매개로 한 ‘세상’ 그리고 ‘타자’와 만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를 찾아나서고자 할 때, <도라에몽>을 보는 것만으로는 어른이 될 수 없다.

     

    여러분, 문학을 읽읍시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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