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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30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14. 07:00

    ‘그것’은 담배와 비슷하다.

     

    ‘그것’도 담배도, 공기가 더러워지고, 돈이 들고, 화재의 원인이 되고, 본인에게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건강에 해롭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 끊어라 끊어라 충고를 하지만, 이게 잘되지 않는다.

     

    지금 동네에 다섯 명 정도 ‘그것’을 배운 사람이 있다. 이제 모두 ‘그것’은 하지 않는다.

     

    내심 하고는 싶지만, ‘그것’을 살 돈이 없는 사람도 있고, 옛날에 ‘그것’ 때문에 일어난 불에 크게 데어 그 이후로 ‘그것만은 절대 용서 못한다’는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지만,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던 놈이라 이번 기회에 ‘그것을 하는 녀석’을 탄핵하는 캠페인에 한몫 끼어볼까 하는 사람도 있다.

     

    주위에서 꽤 시끄럽게 굴기에, 다섯 명도 기어코 포기하고 이제 내년부터는 ‘그것’을 끊겠다고 마지못해 선언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묘하게도 이제까지 참아온 게 탈이 났는데, 마음껏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인지라, 부디 끊기 전에 최후의 한 대를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하면 가족도 그렇고, 가구도 더러워지는 탓에, 아무도 없는 공터로 나가서 남은 8개의 ‘그것’을 미련 없이 재로 만들어버리고자 했다. 공터에 깊은 구덩이를 파면, 연기도 그다지 많이 나지 않고, 재도 그대로 묻어버리면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치 빠른 ‘그것 혐오’ 운동가가 발견해내서, 대단한 소동이 되버리고 말았다.

     

    ‘공터라 할지라도 사람이 살고 있다. 아무리 깊은 구덩이를 파더라도 연기는 연기, 재는 재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는 엄청난 소란.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대로, ‘그것’의 상습자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게 되는지라, 일부러 피고 싶지도 않은 한 대를 뽑는다. 아니나다를까, 인상을 찌푸리며 두 대째의 불을 댕긴다.

     

    필자는 예전에 담배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건강을 우선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침으로써, 가까스로 균형을 취하는 정신상태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을 상처입히고 싶다’는 도착된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신체를 상하게끔 하게 되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근면해진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몸에 나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쓰러질 때까지 일하며, 쓰러질 때까지 논다.

     

    ‘술은 적당히 마신다’ ‘적당한 운동을 한다’ ‘소식한다’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은 곤란한 요청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적당히’라는 게 인간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상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신다’는 게 ‘적당히 마신다’보다 훨씬 쉽다. ‘배불리 먹는다’는 게 ‘좀 모자란 듯하게 먹는다’보다 더욱 쉽다. 신체에 나쁜 일을 하는 게 신체에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 본성을 갖추고 말았는가에 대해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파괴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지구를 망가뜨리고 싶다. 인류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어두운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상상을 하는 걸 좋아한다. ‘인류가 멸망하는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간다’는 스토리를 너무나 좋아한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라에몽>을 보면 된다. <도라에몽>의 극장판은 전부 ‘지구가 망할 것 같이 되어버린 것을, 아슬아슬한 시점에 도라에몽과 진구가 구해낸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열광하며 보는 것은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무서운’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들은 파국을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열대우림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도, 푸른 지구가 사막화되고 만다는 이야기도, 극지의 얼음이 녹아 전 세계가 물에 잠긴다는 이야기도, 파괴된 오존층으로부터 자외선이 조사되어 전 인류가 피부암에 걸려 죽는다는 이야기도, 우리들은 좋아한다.

     

    환경운동가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상을 특히 좋아한다는 점에서 ‘도라에몽’적이다. 그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그러한 파국을 상상하는 걸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한 상상력이다.

     

    인류는 ‘인류를 멸하는’ 테크놀로지가 이론상 가능해진 순간, 그 테크놀로지를 실용화시켜야만 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생물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구상할 만한 가장 무서운 상상을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 듯이, 보고 싶고, 촉감하고 싶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은 무서운 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다. 무서운 것을 공상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말로 무서운 것이, 시선이 닿는 범위, 손을 뻗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게 편안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 멸망’이라는 악몽의 구체적인 형태이다.

     

    ‘헤헤헤, 이 버튼을 누르면 인류는 멸망한다구’라고 상상하며 누르지 않고 있는 때, 그러한 절체절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존재감’에 희미한 빛이 켜진다.

     

    구제할 길 없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런 구제할 길 없는 생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적어도 그렇게 과거 50년 간, 인류는 ‘헤헤헤’의 유혹에 저항해 왔다. 이 버튼을 누른다면, 어떻게 그것이 폭발해서 어떻게 도시가 녹아내리고, 문명이 파괴되며, 인간이 멸종하는가라는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한의 상상력을 구사하며 두근두근댔다. 그리고 상상하는 쾌감이 버튼을 누르는 동작을 미뤄두게 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인류를 멸망시킬 지도 모르는’ 테크놀로지를 인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근절 운동은 어떤 것이든 성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는 갑자기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우리들에게 지금 살아있다는 실감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 분 매 초 조금이나마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죽음의 확실성’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의 우연성’ 덕분에 현생의 소중함을 느끼는 인간의 ‘업’ 탓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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