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복잡화의 교육론>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8. 07:00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 책은 2020년 여름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번에 걸쳐 행해진 교육에 대한 강연을 활자화한 것입니다.

    원래는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제가 강연을 한 뒤에, 일선 선생님들과 대화의 장을 갖는다는 일종의 여행 기획이었습니다만, 잘 아시는 대로 코로나19 감염증 시국 탓에 대면 강연이 어려워져서 투어 계획은 유야무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고베에 위치한 개풍관(제가 꾸리고 있는 합기도 도장 및 인문학 학당)에서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10명에서 15명 정도 되는 청중을 모셔놓고, 이분들 앞에서 제가 2시간 정도 강연하고, 질의응답하는 식이었습니다. 어쨌든 ‘면대면으로 말한다’는 형식은 갖출 수 있었습니다. 청강자의 모집, 이벤트장 준비, 녹음, 문자화 등은 도요칸 출판사의 오사카베 아이카 씨가 맡아주셨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복잡화의 교육론>이라는 제목도 오사카베 씨의 제안입니다. 제가 언젠가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복잡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걸 듣고 나서 특히 ‘복잡화’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다고 합니다.

    이 제목의 의미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며 서문을 이어나갈까 합니다.


    분명히 교육 담론에서 ‘아이들이 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어가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식이 는다든가, 감정이 풍부해진다든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것을 ‘성숙’의 지표로 삼는 사람이 많은데요, ‘이전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었는가’를 성숙의 징표로써 축하해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전보다 복잡한 생물이 된’ 경우, 아이들은 이제까지 짓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들어보지 못했던 어휘를 활용해 말하기 시작하며, 이제까지 해본 적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만, 이러한 아이들의 변화를 목도하고서 두 손 모아 기뻐하는... 부모님도 교사도 거의 없는 듯합니다. 명백히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당혹해 할지언정, 기뻐하는 리액션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의 복잡화를 솔직하게 기뻐하는 게 어른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딴사람이 된 아이들을 마주한 어른보다, 딴사람이 되어버린 아이들 자신이 보다 당혹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말 큰일난 겁니다. ‘어제까지의 자신’이었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상태로 변화한 것은,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유아기 생물이 이때까지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다음 단계로 변태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화했다고 해서 아이들은 ‘어제보다 행복해졌다’는 것도 아니고, ‘어제보다 자유로워졌다’는 것도 아니며, ‘어제보다 강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런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즉각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복잡화한 아이들의 결과란 그저 ‘어제보다 복잡해졌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화 프로세스를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것 말고는 아이들이 성숙할 수 있는 방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도 부모님도 모두 포함해, 주위의 어른들이 결연히 아이들의 복잡화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채택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바득바득 ‘복잡화’라는, 그다지 교육현장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을 제가 들고 일어섰느냐면, 복잡화라는 것은 수치적으로 계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아주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요).

    복잡화는 계측 불가입니다.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길이, 무게, 부피 모두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도량형’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복잡화를 가늠할 ‘도량형’을 저희들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복잡화할 때 일어나는 일은 양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표정의 변화’ ‘감촉의 변화’ ‘분위기의 변화’ 같은 것입니다. 표정이 깊어지고, 목소리의 톤이 바뀌며, 몸짓의 분절이 바뀝니다. 물론, 변화가 생긴 이상 정밀한 계측기기가 있다면 계측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에게는 그런 ‘딱 맞는 잣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복잡화를 계측하자면, ‘잣대’를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간단한 일은 아니지요.

    ‘복잡화하는 아이들’을 향해 그 성숙을 지원한다는 것은, 주위 어른들에게 집중력과 발명의 재능을 요구하는, 참으로 까다로운 프로세스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이들이 성숙했다는 지표로써 ‘복잡화’라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가지 사회 제도에 대해 말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시민적 성숙을 요구하는 제도는 ‘좋은 제도’입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독재정이라고 치면 모든 일을 ‘현명한 독재자’에게 맡기고서, 시민들은 ‘띵까띵까(鼓腹擊壤; 고복격양)’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민주제에서 그래서는 안됩니다. ‘공공의 복지’를 배려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성숙한 시민’을 일정 수 포함하지 않는 민주제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민주제는 구성원에게 ‘어른이 되어 주게’라고 간청하는 제도입니다. 그 수행적인 힘 덕택에 민주제는 다른 어떤 제도보다도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육제도도 똑같습니다. 저는 사회제도를 모두 같은 기준에서 평가합니다. 그 제도를 제대로 기능케 하기 위해서, 제도 운용자들의 (전부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일정 수가 ‘성실한 어른’이 될 것을 필요로 하는 제도는, 운용자들 전부가 ‘유아’여도 운용할 수 있는 제도보다 나은 제도입니다. 저는 이 기준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운용자 자신에게 성숙을 요구하는 제도가, 아이들을 성숙시키는 제도로서는 가장 ‘쓸만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교육에 관한 한 ‘일정 수의 착실한 어른’의 머릿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입니다. 퍽 이해가 잘 안 가는 얘기라는 점은 양지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신다면 분명 제가 말하는 것을 여러분도 알아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후기’에서 만납시다.


    2021년 9월
    우치다 타츠루


    (2021-09-30 15:4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内田樹)
    1950
    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9/30_1548.html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