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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학교 교육을 통산성으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2. 07:00
중학생이 저지른 폭력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총리가 이례적으로 코멘트를 발표하기도 하고, 뭔가 사회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난 듯 우왕좌왕한다. 필자는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이며 가장 약한 고리가 될 것이라고 예전에 쓴 바가 있다. 그때 필자가 ‘아이들은 약한 고리다’라는 말을 한 것은 ‘우리들 사회의 집합적인 연대’가 ‘아이들’을 기점으로 단절되고 붕괴되어 갈 것이라는 음울한 예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계속 소란스레 ‘학교의 책임이다’라느니 ‘가정의 책임이다’라느니 ‘어른 사회의 책임이다’라느니 하는 헛된 책임 전가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에 ‘시험 점수 교육’이라든가 ‘학업 스트레스’라든지 하는 낡아 빠진 말로 뭔가를 설명하려는 식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짓만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중학생이 폭력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것은 ‘시험 점수 교육’이나 ‘학업 스트레스’ 탓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원 강사’가 스트레스 넘치는 중학생에게 칼로 찔렸다는 사건을 필자는 과문한 탓이지만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해, 그것이 대학 입학때까지 이어진다. 학원이라는 것은 수험 공부 ‘만을’ 가르치는 곳이므로, 점수 ‘만이’ 유일한 가치기준이 되는 ‘이상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함은, 학원이야말로 점수 위주 교육의 모순이 정점에 이르러, 학업 스트레스가 폭발해 ‘수학 수업 중에 문제가 풀리지 않아 교사를 교단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와 같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쉬운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나 많은 학원이 있는데도 말이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학원이 시험 공부 ‘만을’ 가르치고, 성적 ‘만을’ 중시하며, 아이들의 ‘인격’을 딱 잘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이들이 틱을 일으켜도, 헤비스모커여도, 웃옷자락에 파자마가 비어져 나와있어도, 침을 흘리고 있어도, 학원에서는 그런 것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원의 아이들이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학교가 억압적인 것은, 그곳이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이라든가 ‘개성’이라든가 하는 것을 과잉 언급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다고 해서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라든가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인간 쓰레기인 건 아닙니다’ 하는 식으로는 학원 강사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원 강사는 ‘성적’과 ‘인격’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란 학생의 성적을 판정하는 것뿐이지, 학생의 인격에 대해 코멘트할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양지하고 있다.
성적과 인간성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유해한 언설을 퍼뜨리는 것은 학교 교사들이다. 그들은 성적 판정만으로는 학생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에, 집요하게 학생의 인격이나 개성에 대해 왈가왈부한다.
예전에 자동차 운전학원에 다녔을 때, 운전기술 교습을 통해 학생의 인격도야를 꾀하려는 곤란한 교관이 있었다.
도로 교습 때 필자가 실수로 보행자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버렸더니, 그는 ‘보행자 보호를 못 하는 건 인간으로서 최악이다. 너에게는 운전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필자를 꾸짖었다. 필자는 어엿한 어른이었으나, 이 말에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차에서 끌어내려 때려줄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는 선의를 가진 사람으로서 교육적 열정이 넘쳤으리라. 하지만 그는 크나큰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기계의 조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르치는 이에 대해 필자가 입장상 채용한 순종적이면서도 주의 깊은 태도를 인격적인 상하관계로 착각해 필자를 ‘인간적으로 훈육하는’ 권리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이 교관과 같은 실수를 일본의 많은 교사들은 매일 범하고 있다. 학생들이 ‘입장상 채용하고 있는 순종적이면서도 주의 깊은 태도’를 교사에 대한 인격적 공손의 징표라고 착각하는 한편, 이미 학교교육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학생의 무기력한 태도를 교사에 대한 인격적 반항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결론을 서두르자. 학교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학교로부터의 일체의 ‘인격 교육적 요소’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기술과 정보를 ‘온 디맨드’로 전하고, 배우는 측에게 적절한 대가와 필요한 룰을 준수하는 것만을 요구하는 비즈니스 라이크 학교. 그곳에서라면 어떠한 폭력 사건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필자는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학교를 그러한 장소로 바꾸는 것 말고는 현재 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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