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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애국심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26. 07:00
현(縣) 교육 위원회의 직무명령으로 졸업식, 입학식에서의 ‘기미가요’ 제창과 ‘히노마루’ 게양의 완전 실시를 요구받은 히로시마 현 고등학교 교장이 이에 반대하는 교직원 조합과의 알력에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필자는 이 교장이 당한 죽음의 방식에서 ‘나라’라는 것에 대해 보이는 현대 일본인의 전형적인 반응을 본다. 이 교장이 문제를 마무리 지은 방식에 대해 나무라거나 조롱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마 이 교장은 이제까지 국가나 국기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결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채 살아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힘차게 ‘히노마루’ 앞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곳에서는 얌전히 일어서서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올림픽 시상대 앞에 ‘히노마루’가 올라갈 때는 싱글벙글 웃으며, 교직원 조합이 ‘국가, 국기의 완전 실시는 군국주의 부활의 전조다’라며 씩씩대면 그런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납득하고 마는, 그러한 ‘망설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망설임’이야말로 일본인 태반이 취하고 있던 혼네本音가 아니었을까.
‘실질적으로는 국가 국기에 대한 인식이 정착되어 있으므로, 일부러 법제화해 봤자 소용 없지 않나...’ 라는 역대 내각의 애매한 태도는 일본 국민의 ‘국가’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정직하게 비추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국민은 자기 나라에 애착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고, 자신은 실제로 일본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형식을 갖춰 애국심을 보여달라>는 행정 당국의 강제 명령은 정말 싫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자살한 교장도 아마 그것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졌던 사람일 것이다.
필자가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만약 그가 현 교육위원회와 같은 의견이었다면 교직원 조합과의 전면 대결을 불사하고 완전 실시를 강행했을 터이고, 만약 그가 교직원조합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일은 지극히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는 입장을 확실히 표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현 교육위원회의 명령에도 다소간 조리가 있고, 교직원조합의 주장에도 다소간 조리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을 택하고 취하는 것은 아마 그 자신의 국가관과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걸고 그 자신의 국가관, 그가 실감하고 있는 바에 기반한 국가관을 지킨 것이다, 라고 필자는 생각하려 한다.
가토 노리히로는 이러한 현대 일본인 한 명 한 명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국가관이라는 애매한, 혹은 분열되어 있는 감정-애착과 혐오, 긍지와 수치, 충성과 배신-을 ‘뒤틀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패전 후론>에서 가토는 일본인이 패전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서는 어딘가 ‘뒤틀린’ 감각을 갖는 게 당연한 것이어서, 애착을 느끼든 혐오를 느끼든 국가와 딱 맞아 떨어지는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무리가 있다고 논하고 있다.
국가를 자상하게 대하려는 개헌파와 국가를 엄히 보는 호헌파를 함께 비판하며 가토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언설은 한 가지 점에서 본질적인 공통성을 갖고 있다. 개헌에 의한 자주헌법 제정론, 호헌에 의한 평화원칙 견지론은, 모두 그들이 목표로 하는 이상이 그대로 현실화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점, 상이하면서도 (...) 어딘가 정신적 쌍둥이를 연상케 하는 결백한 신념에의 복종이 공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역시 <뒤틀림>의 감각이다.”
이 말은 그대로 히로시마 현 교육 위원회와 현 교직원 조합의 언설에도 들어맞는다고 필자는 본다.
현 교육위원회는 중고등학생의 국가에 대한 애정이나 충성이 한 장의 ‘직무명령’으로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보같다.) 현 교직원 조합은 상징을 통해 국민적인 통합을 일구어내는 것, 그것 자체를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바보같다.)
현 교육 위원회와 현 교직원 조합은 가토의 말을 빌리면 ‘정신적 쌍둥이’이다.
현 교육 위원회는 ‘국기 국가가 존중받는 단일문화 단일민족의 국민국가’라는 헛된 꿈을 품고 있고, 현 교직원 조합은 ‘위에서부터의 국가적 통합을 물리치고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집단과의 공존 위에 건설된 이상국가’ 라는 헛된 꿈을 키우고 있다. 허나, 이 두 가지의 꿈은 서로 같은 단순한 정신으로부터 탄생된 환상의 두 가지 변주곡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말끔하게 일의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언설은 이미 ‘쌍둥이’이며, 이미 실패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뒤틀린’것이 당연한 것이다. 국가나 국기에 대해서는 ‘애착과 반감’을 ‘긍지와 수치’를 동시에 느끼고 마는 것이 근대 국가 국민의 자연스러운 실감인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을 경험했던 미국인, 스탈린주의를 경험했던 러시아인, 비시 정권을 경험했던 프랑스인, 나치즘을 경험했던 독일인, 문화대혁명을 경험했던 중국인 등… 어느 국민이든지 모두 같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우행과 야만의 다양함. 그와 함께 국가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인간적 위업의 다양함. 그 양쪽을 동시에 바라보고자 할 때, 우리들의 기분은 ‘뒤틀리게’ 되고 마는 게 당연한 것이다. 어느 쪽을 편들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요전번에 아이키도 전국 학생 대회를 견학하러 갔다. 개회식이 진행됨에 따라 ‘국가 제창’ 시간이 있었다. 사회자가 ‘지금부터 국가를 제창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체육관 안에 있던 수백 명이 순순히 일어서서 국기를 향했다. 하지만 ‘기미가요’를 소리 내어 부르는 사람은 내빈을 포함해 몇 명밖에 없었다. 징- 하고 조용해지고 만 체육관 안에서 자그마한 소리의 테이프 반주음만이 울려 퍼졌다.
필자는 이 풍경에 현대 일본인의 실감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그 장소에는, 보기 싫으니 ‘모두 큰 소리로 불러라’ 하고 노성을 지르는 사람도, 어차피 부르지도 않으니 ‘국가 제창 같은 건 그만 둬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모호한’ 민망함을 조용히 공유하고 있었다.
국가의 상징을 앞에 두었을 때의 ‘어색함’, 이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우리들과 국가와의 관계의 거짓 없는 실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실감에 언어를 부여하고, 시민권을 부여하며, 그것을 국가에의 태도의 기본으로서 훈련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부과된 사상적인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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