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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화의 교육론>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23. 07:00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복잡화의 교육론>은 교육에 대한 강연록입니다. 2020년 여름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번에 걸쳐 행해졌던 강연을 서적화했습니다.
일본 각지로 찾아가, 현지의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제가 강연을 하면서 선생님들과 대화한다는 기획이었습니다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강연이 어려워져 전국 투어 계획은 방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3번 전부 고베에 위치한 개풍관(제가 주재하고 있는 도장 및 학원)에서 행해졌습니다.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청중이 와주셔서 그분들 앞에서 제가 2시간 정도 얘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질의응답을 하는 식입니다. 적은 수였습니다만 아무튼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형식은 갖출 수 있었습니다. 청강자의 모집, 장소 세팅, 녹음, 문자화 등은 도요칸 출판사의 오사카베 아이카 씨가 분담해주셨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복잡화의 교육론>이라는 타이틀도 오사카베 씨의 제안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른 곳에서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복잡화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때 들었던 ‘복잡화’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다고 합니다. ‘서문’으로서 그 제목의 의미에 대해 잠시 써보고자 합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이때 지식을 늘린다든가, 감정을 풍부하게 한다든가, 커뮤니케이션을 잘하게 되는 것을 ‘성숙’의 지표로 삼습니다. 그런 것들도 물론 좋습니다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어제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었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지어보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들어보지 못한 어휘를 사용해 말하기 시작하며, 이제까지 해본 적 없는 몸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교사나 부모님이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좀 쇼크를 먹게 됩니다. 그래서 ‘당혹감’은 있어도, ‘기쁨’이라는 리액션을 그다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상황에서 어른은 기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당혹스러워합니다만, 그 이상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당사자 자신입니다. 그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거니까요.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이제 복잡화하기로 하자’고 자기가 결정해서 노력한 만큼의 성과물로서 변화한 게 아닙니다.
양적인 변화라면 자기결정과 자기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체중을 늘린다든가, 목소리를 크게 한다든가, 날렵하게 움직인다든가 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가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게 된다’는 프로세스는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로 되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단세포 생물이 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어갈 때, 사전에 ‘밑그림’을 그린다든가 공정관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세포 생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똑같습니다. 아이들이 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어간다는 프로세스라는 게 무엇인가는, 그 복잡한 생물이라는 게 되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복잡해져 있는 거예요.
그것은 여러가지 ‘행(行)’의 구조와 제법 닮아 있습니다. 종교적인 것이든, 무도적인 것이든, 혹은 전통 예술의 수업이든, ‘행’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만 알고있을 뿐, 언제 어디에 이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행’의 경우에는 ‘안내자先達’가 있어서, 그저 그의 등 뒤를 보며 따라가는 겁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전체 여정에서 어느 부분까지 도착했는지, 이걸 다 주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을, 안내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말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말로 해도, 그 말은 수업자의 수중에는 없는 어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도 의미를 모릅니다.
무도 수업도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자신의 신체에 그런 부위가 있었는가를 알 수 없었던 부위를 조작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움직임이 가능해진 뒤에, 이제까지 자신이 수련해왔던 것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어요.
‘행’의 의미는 사후적으로밖에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이 <행>이라는 것의 목적은 말이야...’ 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복잡화하는 프로세스도 ‘행’과 조금 비슷합니다. 아이들도 또한 찾지 못한 자신의 ‘안내자(멘토)’를 무의식 가운데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의 경우일 수도 있고, 읽었던 이야기나 본 영화에 나온 허구의 인물일 경우도 있고, 혹은 현실이나 상상의 단편을 서로 덧대어 만든 어렴풋한 ‘이미지像’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날마다 바뀔 수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어떤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인도를 받아 정신이 들고 보니 어제보다 복잡화되어 있었어요. 더는 ‘어제까지의 자기’인 채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표정도, 목소리도, 몸짓도, 말하는 것도, 흥미를 품는 것도 전부 바뀝니다. 어느 한 곳이 바뀌면 전부가 바뀝니다. 기호 체계라는 것도 그렇지요. ‘씹는 맛이 있다’ 라든가 ‘목넘김이 좋다’라는 말을 하나 학습하면, 이제까지 ‘맛있다’라는 한 마디만으로 표현해 왔던 ‘맛있음’의 뉘앙스가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복잡화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는 제어할 수 없는 변화인 것입니다. 복잡화했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은 ‘어제보다 행복해졌다’는 것도 아니고, ‘어제보다 강해졌다’는 것도 아니며, ‘어제보다 공부가 잘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즉석의, 알기 쉬운 효과가 있는 변화가 아닌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도 그러한 복잡화의 연속적인 프로세스를 어찌어찌 해보는 동안 성숙의 단계를 올라갑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성숙에 이를 수 있는 방도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 이상, 우리들 어른은 아이들이 복잡화할 수 있게 온 힘을 다해 지원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복잡화한다는 것은 제군들에게 털끝만큼도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증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부러 ‘복잡화’라는, 그다지 교육현장에서 쓰이지 않는 말을 끄집어냈던 것입니다.
교사도 부모님도 자녀도 성숙을 평가할 적에 ‘보다 복잡화했는가’라는 것을 살피는 습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잡화는 숫자로 계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적인 변화인 경우에는 그것을 잴 ‘잣대’가 있습니다. 키가 컸는가, 체중이 늘었는가, 표준점수가 올랐는가를 수치로 측정합니다. 하지만 복잡화를 가늠할만한 ‘잣대’는 없습니다. 복잡화할 때 일어나는 것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표정에 깊이가 묻어나온다, 목소리의 음조가 바뀌었다든가, 몸짓의 분절이 세분화되었는가… 등등. 물론 변화가 있는 이상, 정밀한 계측기기가 있다면 계측이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기성의 잣대’를 통해 수치적으로 산출해 낼 수는 없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겠습니다.
전에 제 도장에서도 초등학생들을 모아서 아이키도의 소년부를 시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 돌보기를 좋아하는 여성 문인들이 담당해줬습니다. 아이키도에도 단이나 급이 있습니다. 보통 5급부터 시작해서 1급이 되면 그때부터 초단, 2단 … 하는 식으로 올라갑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소년부 담당자가, 아이들을 위해 10급부터 6급까지의 단계를 신설하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어왔습니다. 정식 허가증은 나오지 않지만, 아이들의 수련을 고무하는 데에는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해 ‘괜찮다’고 허가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담당자가 급 한 개에 ABC 3단계로 세분화해도 되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즉, 10급의 C부터 6급의 A까지 도합 15단계로 나누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가?’ 하고 물으니, 부모님이 그렇게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수업 진도를 될 수 있는 한 빈번하게, 동시에 수치적으로 표시해주기를 바란다는 부모님들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허 참.
저는 살짝 놀랐습니다. 그야 자기 자녀가 무도 수련을 다닌다면 그 변화는 역력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을 잔뜩 먹게 된다든지, 잠을 잘 자게 된다든지, 목 둘레에 근육이 붙는다든지, 정좌(正座)를 잘할 수 있게 된다든지…, 무수한 징후가 검출될 터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변화를 알기 쉽게 수치로 표시해달라고 부모님은 말합니다.
저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지도자에게 수업의 진도를 수치로 표시해달라고 하지 않으면 자녀의 변화를 ‘알 수 없다’는 부모님의 존재 여부에 의문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장면에서 자녀의 변화를 ‘수치적으로 표시한다’는 습관에 익숙해진 탓에 자녀의 몸에 일어나는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미세한 변화의 관찰이 불가능해진 부모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함은, 상당히 심각한 사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비교적 주의를 기울여 부모님이나 교사 분들의 언동을 관찰해 왔습니다만, ‘수치적으로 고량考量할 수 없는 변화를 어떻게 분명히 모니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서려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량적인 변화를 정밀화하는 데에는 다들 열심이었지만, 정성적인 변화를 음미할 수 있는 정밀한 ‘계측 능력’을 계발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부모님이나 교사는 거의 만나볼 일이 없었습니다. <복잡화의 교육론>은, 이렇게 제가 품은 문제의식에 기반해 쓰여진 것입니다.
세 번의 강연을 이어나가며 착착 결론을 향해 접근해간다… 는 작업이 아니고, 동일한 한 가지의 논건을 몇 개의 시점에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라고 음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책의 어느 쪽부터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팔락팔락 넘기면서 어쩐지 흥미가 동한 주제가 있으시다면, 거기부터 읽어나가도 괜찮습니다.
그럼 ‘후기’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2021-09-18 15:5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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