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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30 "고추 떨어지는 일"은 지적이고도 즐거운 작업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17. 07:38

    필자가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쓴 글을 따분해하는 이유는, 그 스테레오타입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스테레오타입의 원형은 이를테면 우에노의 가사노동관에서 확인된다. 필자는 자녀를 혼자 키우고, 가사에 참여하는 남자인 탓에, 그러한 남자를 논할 때의 우에노가 하는 말에 유달리 강한 위화감을 느끼고 만다.

     

    예를들어 우에노는 이렇게 썼다.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남자들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게 ‘가사 육아를 하는 남자들’이다.” (p.11)

     

    어째서 ‘가사 육아를 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의 맹우가 될 수 있다고 우에노는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에 의하면, 그러한 남자들은 남성이라는 ‘일등 시민’ 계층에 속해있으면서도, 여성이 처해 있는 바와 같이 ‘이등 시민’, ‘특수한 존재’로 몰락할 리스크를 무릅쓰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에게 강요당해서, 혹은 자녀를 키워야만 하는 상황의 강한 압력에 의해, 또는 자기 자신의 의사로, 대가 없는 가사 노동을 짊어짐으로써 ‘이등 시민’으로 드랍아웃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는 남자들이 있다.” (p.12)

     

    필자는 상황에 쫓겨서 자녀양육과 무보수 가사노동의 의무를 짊어졌으나, 의연하게도 페미니즘의 논조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이등 시민’인지 어떤지는 그 판단을 내리기가 극히 어렵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필자의 재능과 노력 부족 탓이지, 단지 가사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부모가정의 아버지도 ‘특수한 존재’로서 사회로부터 냉대받는 탓에 페미니즘의 유력한 맹우 후보이다.

     

    어느 여성연구자는 “‘싱글대디 모임에서 나온 얘기를 듣고 나서, 그녀 자신의 젠더를 다행으로 여겼다’고 썼다. 만약 이 상황에서 남성연구자였다면, 싱글대디 모임의 부친들은 내심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학력도 사회적 지위도 높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동성의 인터뷰어를 상대로, 사회적 약자로 간주되는 싱글대디들은 경계할지언정 마음을 열지는 않으리라.” (p.24)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고, 싱글맘이든 싱글대디든 그들이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삶의 방식이다. 그것을 싸잡아 ‘사회적 약자’로 정해버리는 통속적이고도 피상적인 현실인식은 설령 그것이 연민의 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필자는 용납할 수 없다.

     

     

    분명히 가사육아가 그만큼 부담이 큰 일이라는 것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사육아를 하는 남자를 “<남자다움>의 규범으로 보면 <형편없는 남자>이다”(p.13)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실례가 되는 말이거니와 착각이기도 하다.

     

     

    ‘그는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p.13) 하고 우에노는 으름장을 놓지만, 가사육아를 경력 단절의 변명거리로 삼는 짓은 ‘남자의 체면상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담담하게 가사노동을 부담하고 있는 남자들이 이미 많이 있다.

     

     

    우에노의 분석과 필자의 현실 이해의 이러한 ‘엇갈림’은 우연한 성질의 것이 아니고, 아마 페미니즘의 ‘전략’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가사노동에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으므로, 그것을 부담하는 자는 치명적인 사회적 핸디캡을 떠안는다는 사고방식은 페미니즘의 근간을 이루는 주장 중 하나다.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의 마이너스적인 면을 될 수 있는 한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허나, 이러한 가사노동 부담의 ‘과대평가’는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가정이 존재하는 한, 가사노동은 소멸하지 않는다(물론 사르트르처럼 평생 호텔에서 산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가사가 있는 한, 부담의 배분, 고역의 배분은 불가피하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누가 얼마나 가사 즉 핸디캡을 받아들일까 하는 의논은 유쾌한 의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가정에서 가사 분담을 위한 협상은 빈번히 가정 내에서의 마찰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차츰 가사분담 교섭에 필요한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가사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물리적 피로 이상으로, 사람을 상하게 한다.

     

    가사는 지적이고도 즐거운 작업이며, 생산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주체를 요구한다. 그것을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이 나서서 부담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필자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지만, 페미니스트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아마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리라.

     

    더군다나 가사노동의 마이너스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가사를 회피하려는 남자들에게 한층 가사부담을 경원시하게끔 하는 게 아닐까?

     

    남자에게 ‘이등 시민으로의 드랍아웃’이라는 리스크 없이는 가사노동을 부담할 수 없다고 협박하면서 동시에 가사노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남자들을 가사노동에 참여시키고 싶다면, 뭔가 플러스적인 인센티브를 작동시켜야만 한다. 남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게 하고, 단기적인 불이익이라고 생각되는 선택에 발을 들여놓게 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유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리고 결국 우에노도 정치적 판단으로 그 방법을 채용하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도망칠 길 없는 전장”을 꿋꿋이 버티는 남자들의 모습을 우에노는 상찬한다. “육아라는 도망갈 곳 없는 일상에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그들의 태도는, 오히려 깔끔하게 <남자답다>. 그러한 헤맴이나 방황 가운데 남자다움을 재점검해가는 그들에게는, 숨이 멎을 정도의 성실함이 있다.” (p.12)

     

    페미니스트가 남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해버리면 큰일 아닌가? 우에노는 여기서 남자들을 가사노동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싸움’이라는 메타포로 기분을 고양시키고는, ‘남자다움’이라는 원시적 부적을 이용하고 있다. 몰리다 못해 ‘남자가 돼가지고’ 라는 일갈로 상대를 제압하는 건 오다지마 다카시 류의 돈 빌리기 기술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

     

    남성학은 본래 ‘남자다움’이라는 공허한 말이 부적으로 기능해버리고 마는 구조 그 자체를 회의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구조의 해명을 통해 부적 그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우에노는 ‘남자들의 신화’의 해명보다도 여성이 가질 사실상의 이익(가사 노동의 공평한 분배)을 우선하고 있다. 우에노의 의미는 ‘남자들이란 것은 어떤 생물인가’의 학술적 해석보다도 ‘남자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정치적 의도에 경도되어 있다. 남자들은 어떻게 위협하면 위축되고, 어떻게 치켜세우면 기어오르는가를 숙지하고 있는 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에노의 논의는, 그러고보면 비정할 정도로 ‘정치적’이다.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쓴 글이 시시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우에노는 알면서도 호들갑을 떤다. ‘남자다움’이라는 부적으로 남자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다움’에 ‘숨이 멎’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는 우에노의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에노의 불성실함은 의도적인 것이어서, 밑바탕의 정치판단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페미니스트였다면 우에노처럼 했다.)

     

    다른 곳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현재의 성별 갈등을 정치투쟁의 용어로 이해하고 있다. 성관계는 헤게모니 투쟁으로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한 쪽이 포인트를 획득하면, 다른 쪽은 포인트를 잃는 제로섬 게임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우에노도 아마 같은 상황이해로부터 출발해 남자 분석을 획책하고 있다. 전업 남성주부, 동성애자 등의 소수파 남성을 거점으로 하는 ‘프락치’를 남자들 가운데 쐐기로 박아넣는 것이 ‘남성학’의 군사적 의도이다. 필자는 이것이 전술적 판단 면에서는 적절하고도 유효하다고 본다.

     

    남성학은 그러한 페미니즘의 정치적, 군사적 요청에 응해 출현한 것이라서, 여성해방이라는 대의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뛰어난 프로파간다’가 ‘뛰어난 학술연구’와 때로는 비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유익할 수 있다는 점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필자의 ‘실망’은 편저자의 의도에 관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 책이 몇 개나마 훌륭한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권두에 실린 하시모토 오사무의 문장을 필자는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하지만 그 출처인 하시모토 오사무의 <연꽃과 칼>은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일본의 게이 컬처에 대한 무자비한 분석이고, 거기서의 하시모토는 게이의 자기정당화에 대해 (그가 게이 가운데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성적 환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임을 간파한) 우에노만큼의 관용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말이야’, <우리들은 게이로서의 생활을 보내고 싶다>라는 말 같은 건 원래 뽐내면서 하는 게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해야 하는 게 아니겠어? 자꾸 <나는 게이입니다! 이렇게나 이상합니다! 이렇게 핍박받으며 살고 있습니닷!!> 하는 식으로 역설하는 건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아? 왜냐하면 ‘말이야’, 그렇게 어설프게 말하는 건 <나는 여자야! 나는 여자야! 그래서 여자라는 건 ‘말이야’! 나는 ‘말이야’> 하는 못생긴 여자의 가짜 우먼 리브를 답습하는 것뿐이니까.”

     

    우에노는 하시모토 오사무를 인용하면서 위와 같은 그의 문장의 일부분을 삭제했다.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지만, 이런 걸 ‘검열’이라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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