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30 교조적 페미니즘의 싸움 - 남성학의 정립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11. 07:59
우에노는 권두논문인 <’꼰대オヤジ’가 되고 싶지 않은 그대를 위해 멘즈 리브를 권함>에서 ‘남성학’이란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회학자는 ‘인간학’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참칭해 왔다. 그 관점에서 여성은 특수한 잔존물로밖에는 간주되지 않는다. ‘여성학’ 이전의 여성론이란, 자신이 주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남성의 손에 의해 ‘타자’로 쓰여진 객체로서의 여성론이었다. 여성학이란, 그 남성 중심적인 관점으로부터 여성을 주체로서 탈환하기 위한 시도였다. 남성학이란, 그 여성학의 관점을 통과한 후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의 자화상을 통틀어 관찰한, 남성 자신의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P.2)
여성학이 여성 중심적 관점이라는 거창한 역사와 세계의 다시 읽기의 시도였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 앞에 서술된 남성학의 정의이다.
여성학의 정의를 그대로 채용하면, 남성학이란 “남성 중심적 관점”에 입각해서 “남성이 갖고 있는 주체성을 탈환하려는 시도”여야만 한다. 하지만 우에노는 그러한 정의를 채용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학이란, 남성이 ‘여성적 관점에 입각해’ 남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여성은 ‘자신의 눈’으로 남성을 바라보는 것이 용납되지만, 남성은 ‘타인의 눈’을 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상당히 불공평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필자가 보기에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있어왔던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여성에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이항대립을 해결해 왔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 전체 계층으로부터 자기해방을 하지 않는 한 자기해방을 할 수 없고, 그런 연고로 사회 전체 계층을 해방하는 일이 없이는 자기해방을 할 수 있는 한 개의 계층,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전적 상실이며, 그런 연고로 인간의 전적 회복이 없이는 자신을 재획득할 수 없는 계층”으로 정의했다.
페미니즘은 이 테제를 환골탈태시켜, 남성으로부터 자기해방하는 일 없이는 자기해방을 할 수 없는, 그런고로 남성을 해방하는 일 없이는 자기해방을 할 수 없는 사회적 계층으로서 여성을 정의한다.
여성 해방은 즉각 남성해방과 연동된다. 여성에 의한 주체성의 탈환은 여성의 권력화도 남성의 노예화도 아닌, 쌍방의 동시적 해방이다. 남성은 권력적인 주체성을 잃음으로 해서, 비권력적인 주체성을 새로이 획득한다. 이것이 여성 해방 즉 남성 해방론의 기본적인 로직이다. 이 로직에 기반해 남성학은 구상되었다. 즉 그것은 ‘남성이 비권력적인 관점을 획득하기’위한 가이드맵인 것이다.
우에노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서 두 가지 제약을 남성 주체에게 부과한다. 한 가지는 ‘여성의 눈에 비치는’ 것을 볼 것. 다른 한 가지는 ‘자화상을 볼 것’이다. 남성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남성 중심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폭력 행사이기 때문이다.)
OK. 너희들이 그러한 룰을 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러한 제약 아래에 기술된 텍스트는 여성에게 있어서도 남성에게 있어서도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첫째로, 만약 남성학이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상’의 기술이라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싫증날 정도로 일상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싫증날 정도로 일상적인 풍경에서 그녀들은 어떠한 새로운 지견을 퍼올리려는 셈일까?
글머리에서 우에노는 ‘남성학 연구를 여자가 펴내는 것에 저항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 원래대로라면 남성학 연구는 남성 편자에 의해 펴내지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성이 남성학으로의 접근을 꺼리는 것은, 남성의 영역에 대한 배려심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아마 남성학이 그녀들에게 있어서 따분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남성학에 의해 ‘커밍 아웃’ 당하는 남자의 자기 성찰 가운데 여성 입장에서 시시하지 않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남성의 자기 성찰에서 보여지는 기만성’ 혹은 ‘불충분성’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남성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는가’라는 ‘평가’의 즐거움만이 아마도 그녀들을 남성학에 끌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감점법’에 의한 평가의 시선을 구조적으로 갖추고 있는 이상, 남성학이 남성의 권력성과 추악함을 ‘자기검열’ ‘자기비판’하는 고백의 언설로 충만해질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권위적 교의에 찰싹 달라붙는 신앙 고백만큼 시시한 것은 없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6-4|30 "고추 떨어지는 일"은 지적이고도 즐거운 작업 (2) 2021.09.17 6-3|30 이것이 남성해방인가? (0) 2021.09.14 옛날 잘못은 기필코 훗날 드러나는가? (0) 2021.09.08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서문 (0) 2021.09.07 6-1|30 남성이라는 난감한 생물 (0)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