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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30 이것이 남성해방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14. 07:27
<남성학>에 수록된 19편 중에 속한 무라세 하루키의 ‘하우스 허스밴드 선언’은 전형적인 ‘감점법’에 익숙해진 남자의 영합적 언설을 보여주는 프로토타입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본다.
“진짜로! 그게 어려운 부분이네”
원고지의 한 대목을 엿보며 유미코가 말했다.
“제멋대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내 경우에는.
“쉽지 않아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어쨌든 시작해보는 거야.”
“남편들이 모두 나처럼 하우스 허스밴드가 되면 좋겠는데.”
“그건 아니야.”
“어째서!?”
“당신처럼이라는 점이.”
“왜?”
“커플 백 쌍이 있으면, 백 개의 방식이 있잖겠어? 가장 쉬운 방법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
“진짜 그렇네.”
“우리들보다도 간단히 해치우고 있는지도 몰라. 2년 3년씩.”
“정확히는 3년 7개월이야. 너무 길지 않아?”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건 확실하다구.”
“그래, 연애 시절부터 하는 게 좋지. 남자가 주부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해주지 않겠다든가.”
“섹스는 흥정 수단이 아니야.”
“미안!”
“법률을 제정해야 해. 하우스 허스밴드 법.”
(pp.188-189)
이 대화는 남편이 아내에게 질문하고, 아내가 거기에 해답을 내려주는 ‘교화적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남편은 인용문에서만 3번 주체적인 언명을 행하는데, 그것은 모두 ‘틀렸다’고 아내에게 수정 혹은 부인받는다. 한편, 아내가 말한 4번의 언명은 모두 상대방에게 ‘교화’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무라세는 이런 상황에 대해 ‘남자와 여자가 수평적 입장에 선’ 관계이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한 듯이 쓰고 있지만, 내 눈에는 아내가 남편을 교화하고, 훈도하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라세가 쓴 글이므로, 실제로 무라세 부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교화되어 훈육받는 관계가 대등하고 이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무라세가 독자에게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다니구치 가즈노리의 ‘성 - 여자와 남자의 풍부한 관계’는 자신이 몸소 경험한 ‘성구매’ 편력을 써내려간 참회적인 자기비판이다. 밥 먹듯이 풍속업소에 다닌 뒤 반성하고 ‘아시아 매매춘에 반대하는 남자들의 모임’ 결성에 참가한 다니구치의 경험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배우려고 우에노는 이 텍스트를 수록했는지 필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내용 없는 텍스트의 교훈이 ‘반성할 만한 짓은 애초부터 하지 말자’라면, 다시금 배울 필요도 없는 게, 필자는 그것을 유치원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이해를 표할 정도로 <선진적>인 남자조차 매춘을 용인하는 것과 같은 비뚤어진 섹슈얼리티를 안고 있다’라고 말할라치면, 다시금 배울 필요도 없이, 필자는 주변의 많은 사례를 알고 있다.
다른 저자의 ‘육아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보부(보모의 반대 의미 - 옮긴이)’라는 이단적인 생활방식을 택한 남자가 기성의 ‘남자다움’에 결별하는 결의를 쓴 텍스트이다. 이 또한 눈 앞이 캄캄해질 정도의 상투어 콜라주이다.
“마음씨 고운 남자들!
우리들이 ‘남자’로서 살아갈 때, 자기 자신 자연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여러가지 제약이나 굴레, 역할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것이, 정도의 차는 있어도 뿌리는 한 가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관리 지배받기 쉬운 남자와 여자의 두터운 뿌리. 이런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
우리들이 거절해온 것, 거꾸로 말하면 우리들이 그것으로부터 소외되어온 것, 즉 육아를 자신의 손으로 되찾는 것을 통해, 빼앗겨왔던 ‘자상함’을 되찾는 것을 통해, 우리들을 사로잡아왔던 나쁜 구조-돈벌이에의 구동,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찍어누르는 구조로부터 우리들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 남자들이여!
아이를 갖지 않은 남자도, 가진 남자도, 지배욕에 빠지기 쉬운 ‘남자다움’을 뿌리치고 또 뿌리치며, ‘남자’의 육아를 생각해보자!” (pp. 208-209)
글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남성 육아’는 절실한 문제이다. 하지만, 필자는 육아를 ‘거절해 온’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소외되어 온’ 것도 아니다. ‘자상함’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기억도 없다. 오직 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오리지널리티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투구를 읊는 남자’와 육아처럼 민감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함께 논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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