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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이후의 세계: 공유와 공생이야말로 ‘커먼의 재생’으로 이루자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9. 29. 07:00

    계층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소득 격차를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는 지니 계수는 격차가 전혀 없는 상태를 0,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를 1로 두는데, 일본의 지니 계수는 1981년에 0.35, 2021년은 0.56으로 계속 오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 국민 중산층’으로 불리던 나라의 옛 추억속 풍경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일본에서의 격차 확대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용 형태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종신고용・연공서열이라는 고용 형태가 일본의 모든 기업에서 지배적이었다.

    이제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소수파가 되었을 테지만, 그게 상당히 태평성대였다. 당시에 ‘샐러리맨은 편한 직업이 되었는걸’ 하는 임팩트 있는 가사로 시작하는 곡도 있었다. 물론 과장된 면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실제 감각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60년대 초 샐러리맨의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샐러리맨들은, 작은 요릿집의 다다미방에서 대낮인 점심에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오후 근무를 하러 나갔다. 물론 전원 정시 퇴근이다. 필자의 부친도 그러했다. 매일 같은 전차를 타고 출근해 같은 전차로 귀가했다. 비가 오면 역 앞에 우산을 가지고 부친을 마중 나온 아이들이 줄을 섰다. 지금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허나, 사람들이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루틴을 영위하던 시대에 일본 경제는, 믿지 못할 정도로 날카로운 우상향을 그리며 성장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 일본인이 매우 효율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어떻게 효율이 좋았냐면, ‘평가’나 ‘고과’나 ‘심사’에 헛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이란 간단히 말해서 ‘인사고과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일을 시켜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을 유심히 보았다가 그 능력에 맞는 태스크를 맡기면 그만이다. 따로 심사한다든지, 평가할 필요가 없다. 어려운 태스크를 솜씨 좋게 소화해내면, 상사가 ‘고맙다’ 며 부하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오늘은 내가 한 잔 사지’ 정도로 끝난다. 이 시대의 일본 사회에는 소위 ‘불쉿 잡’이 극히 적었던 것이다.


    <불쉿 잡>의 저자인 인류학자 故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정의에 의하면, 쓸데없는 직업이란 ‘피고용자 본인조차 그 존재를 정당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때에 따라서 유해하기도 한 고용 형태’이다. 영국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당신의 일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공헌을 하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 대해 37%가 ‘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한다. 아마 현재 일본에서 똑같은 설문을 하면 그 비율이 50%를 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 직업을 ‘이센셜 워커’라고 부른다. 대중 교통 기관이나 전기, 가스, 수도, 통신 등의 관리운영, 의료나 학교 교육, 의식주에 소요되는 생필품의 생산, 유통은 ‘이센셜 워크’다. 이것이 잘 작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일을 하는 ‘불쉿 잡 워커’들은 ‘이센셜 워커’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관리한다든지, 인사고과를 한다든지, ‘합리화’한다든지, 조직이 톱다운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센셜 워커’보다 아득히 높은 급여를 받고 있다.

    부조리한 이야기지만,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 의하면 인류가 농업을 시작하면서 줄곧 그래왔다는 모양이다. 실제로 노동을 해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고, 자기 자신은 어떠한 가치도 창출해내지 않고 기식(寄食)할 뿐인 왕후장상이나 군인, 성직자들이 풍족하게 산다.


    현재 일본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어떠한 가치도 창출해내지 않고, 하층민의 노동에 기생하며 으스대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만이 천문학적인 개인 자산을 축적하고, 압도적 다수가 가난해져서 결국 집단 전체가 가난해진다.

    격차라는 것은 단순히 재산이 ‘편중’되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격차는 반드시,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내지 않는 일에 고액의 급여가 지불되고, 이센셜 워커가 최저임금에 고통받는 양태를 띤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만약 상위 계층이 ‘명백히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실천하는 한편 근면하게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들은 결코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고액의 급여를 받고 풍족하게 산다 해도, 우리들은 그것을 ‘부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격차를 줄이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단순히 지니 계수적인 ‘격차의 확대’가 아니다. 베블런의 ‘유한 계급’, 그레이버의 ‘불쉿 잡 워커’가 원래는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할 자원을 상당 부분 부당하게 점유하고, 낭비한다는 인상을 많은 국민이 품게 되는 사태인 것이다. 분배가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부조리 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정할 수단이 마땅히 없다는 무력감이,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통계적 사실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현상 뒤에 숨은 심리적 사실이다. 이 불합리를 해소할 수단이 있을까.

    격차가 존재할 때, 공권력이 강권적으로 개입해 부유층으로부터 걷어들인 부를 일단 국고에 넣어두고 재분배를 행하는 일은 어렵다.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강권적 재분배’는 실패했다. 권력을 손에 넣은 뒤에도 ‘국고’와 ‘자기 지갑’의 구별이 가능한 자는 애석하지만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유한계급’이 ‘불쉿 잡’으로 고연봉을 타낸다고 해도, 그들의 호주머니에 다이렉트하게 손을 대 다른 누군가의 호주머니에 억지로 쑤셔박는 일은 안 하는 게 낫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더 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다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부유층으로부터 거두어들인 것을 ‘공공재’로, 퍼블릭 도메인에 공탁하는 게 낫다고 본다. 화폐로 쌓아두는 게 아니라, ‘모두가 바로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학교, 병원, 도서관, 미술관, 체육관, 혹은 숲이나 벌판, 호수나 해안같이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자, 여러분이 자유롭게 사용하십시오’라고 말한 뒤 선보이는 것이다. 필자가 ‘커먼의 재생’이라는 것을 주장할 때 떠올리는 것은 그런 이미지다.

    될 수 있는 한 ‘사유재’ 영역을 제한하고, ‘공공재’ 영역을 넓혀간다. 아름다운 숲속을 걸을 때, ‘사유지임으로 출입을 금함’이라는 간판과 마주치면 필자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다. 토지는 원래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것을 나라나 지자체가 구입한다고 해도, 이제 ‘공유지임으로 출입을 금함’이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공유지를 자유롭게 이용하십시오’가 올바른 사용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커먼(common)이란 중세 영국에 있었던 촌락 공동체의 공유지를 의미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축하고, 새와 짐승을 수렵하며, 물고기를 잡고, 열매나 버섯을 채취한다. 커먼이 넓고 풍요로워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생활도 또한 윤택해져갔다. 커먼이 소멸한 것은, ‘이런 식으로 하니까 돈이 안 되는 거다’라며 사유지로 매매하고, 양을 갖다 풀며,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눈치 빠른 녀석’이 등장한 탓이다. 그것이 ‘커먼에서 일어난 비극’의 실상이다. 그렇게 해서 ‘인클로저(울타리 두르기)’가 행해지고, 커먼은 소멸했으며, 농민들은 몰락하여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 산업혁명을 일궈내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자본주의는 번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커먼이 소멸했다면, ‘커먼의 재생’은 그 과정을 역으로 돌리면 된다. 그것은 사유재를 ‘모두 같이 씁시다’하며 공공재로써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건 죽었다 깨나도 싫다’며, 사유재산에 집착하는 인간은 물론 있을 것이다. 있는 게 당연하다. 그 사람들에게서 강권적으로 사재를 빼앗을 수는 없다. 전에 해봤다가 실패했다. ‘싫다’는 사람은 내버려 두면 된다. ‘사재를 제공해도 좋다’는 사람들의 머릿수를 한 명이라도 늘려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합기도 도장은 현재 사유재산이지만, 언젠가 기증해서 문인들이 ‘커먼’으로 이용하게끔 할 생각이다. 그렇게 사소한 개인의 실천이 쌓이고 쌓이는 것은 우원한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21-09-25 11:3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9/25_11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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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 노트
    1. 전문이 9월 14일자 일본 농업협동조합신문 ‘【특집: 목숨의 격차를 용납치 말라, 협동 사회를 구축해나가자】 제언: 공유와 공생이야말로 ‘커먼의 재생’으로’에 실렸습니다. https://www.jacom.or.jp/nousei/tokusyu/2021/09/210914-53903.php

    2.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은 민음사에서 2021년 8월에 한국어로 번역출간했습니다.

    3. 언급된 지니계수(0.56)는 일본 후생노동성의 2017년 ‘소득 재분배 조사 보고서’에서의 당초소득(사회보장 등의 재분배를 제외함) 기준입니다.
    https://www.mhlw.go.jp/toukei/list/dl/96-1/h29hou.pdf

    4. 한편 한국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 소득분배지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0.404였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자산규모 변동 현황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입니다.)
    https://kosis.kr/statisticsList/statisticsListIndex.do?publicationYN=Y&statId=2006030

    아울러, 일본 후생성 2002년 당초소득 지니계수는 0.49였습니다.
    https://www.mhlw.go.jp/houdou/2004/06/h062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