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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30 어덜트 칠드런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17. 07:00

    ‘어덜트 칠드런’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최근 눈에 띈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는 ‘애 어른’이므로, 필자는 망설임 없이 그것은 최근 늘어난 ‘유아적인 어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머리 아저씨가 열심히 ‘소년 점프’를 탐독한다든가, 노래방에서 자신이 어렸을 적에 봤던 TV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절창한다든가 하는 모습을 개탄하는 말이 아닌가 했는데, 조금 다른 것 같다.

     

    애초에 처음 쓰여진 바로는 (물론 미국에서) ‘알코올 의존증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고유한 정신적 외상을 간직하는 사태를 이른다. 즉 ‘어른이 된 <알코올 의존증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 (Adult children of alcoholics)’의 첫 두 글자를 축약한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알코올 의존증만이 아니고 여러가지 종류의 의존증이나 기능 부전 가정의 자녀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특유의 신경증적인 경향을 나타낸다 한다. ‘주위의 기대에 맞춰 행동한다’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집착과 애정을 혼동한다’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있지 않다’ ‘자기를 처벌하려는 기벽이 있다’ ‘너무 열심히 한다’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한다’ ‘타인의 승인을 항상 요청한다’ ‘무가치한 것에 과도한 충성을 바친다’ 등등.

     

    -, 그런가. 하지만, 잠깐 기다려주기 바란다.

     

    당연한 얘기지만, 몇 개 정도 의존증이 아닌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어느 부분에서 기능 부전을 초래하지 않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함은, 우리들은 모두가 ‘어덜트 칠드런’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심신과 주위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가져다줄 정도로 과도하게 고착하고 있는 것을 갖고 있다. 술이나 담배나 약물. 독서나 음악이나 운동이나 미식이나 수집품이나 돈벌이. 이러한 것들은 전부 병적인 기벽이다.

     

    어떤 부분에서 기능 부전을 초래하고 있지 않는 가정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기능 부전’의 조건으로 미국 학자가 열거하고 있는 것은, ‘가정에 뭔가 규칙이 있다. 역할분담이 있다. 가족에게 공유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 외부인의 출입에 저항감이 있다.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다. 가족에게 충성할 것이 요구된다. 가족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부인되고 무시된다’ 등이다.

     

    우리들의 가족은 예외 없이, 이 중 어느 한 가지 조건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완전히 기능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뭔가 규칙도 없고, 부모 자식 간의 역할분담도 없고, 전부 오픈되어 있고, 외부인이 우르르 몰려들고, 그런데도 완전히 개인의 비밀이 보장되고, 가족이라는 거짓된 통일성에는 누구 하나 충성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가족 간의 반목이나 대립은 노골적인’ 가족일 것이다.

     

    필자는 그런 곳에서 자라고 싶지는 않다.

     

    별난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유사 정신 의학이 만들어내는 낯선 ‘증후군’은,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바는 단순하다. 모든 가정은 어딘가 부족함이 있고, 모든 부모님은 뭔가에 의존해 있으며, 많든 적든 그 탓에 거기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정신적 비뚤어짐을 초래하게 된다.

     

    아이들의 정신적 비뚤어짐에는 질적인 차가 없다.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가정환경에 의해 결정된 자신의 ‘나쁜 상태’를 사회적인 허용 범위 내에서 자제하는 것, 그것이 성인으로서 우리들이 행해야 할 임무이다.

     

    친구도 애인도 없고, 남들 눈치만 살피며, 무가치한 것에 충성을 맹세하고, 자기 처벌강박이 있는 인간 따위는 우리들 주위에 한 트럭 분량이 있다. 필자는 그들을 ‘어덜트 칠드런’같은 진기한 인종이 아니라, 단순히 ‘도움이 안 되는 사회인’이라고 간주한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자는 그들을 차별하고, ‘사회인이다’는 점에서 필자는 그들과 연대한다. 이 ‘차별하면서 연대하고, 혐오하면서 수용하는’ 이율배반적 몸짓에 사회의 ‘건전’이 집약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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