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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하늘을 나는 교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23. 07:01
중앙교육심의회가 영재 대상의 ‘월반飛び級’을 허용하고 대학 입학 연령을 17세로 두려고 한다는 제언이 저번 달에 비교적 화제가 되었다.
‘비교적’으로밖에 화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차피 수월성이란 본인이나 자기 자식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제언이기는 하다. 어째서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가를 규명하면서 이 문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제 15회 중앙교육심의회 발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에 맞추는 교육’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월반’은 그 백미 중 하나이다.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채 상급 학교로 진학해버리는 게 ‘조기입학’ (이는 일부 대학원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석사과정을 밟는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학년을 뛰어넘는 것이 ‘월반’.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를 점차 상급 학교로 진학시키면 독창적인 학자가 배출된다는 것이 ‘월반’ 구상의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개성적인 아이는 보통의 교육환경에서는 ‘억눌리게 되지만’, 약간 더 상급 학교나 학급에 가면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상식적으로 따져보아 틀렸다.
절반은 거의 맞다. 확실히 일본의 학교 교육은 아이의 개성을 뭉개버리는 방향으로 기능하는 데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오늘날 교육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모토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원리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상위 학급’에 ‘월반’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일까?
‘월반’해서 들어온, 연하인 주제에 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아이가, 연상의 ‘평범한’ 학우들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환대를 받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개성적’인 영재아는, 그 존재 자체로 하여금 평범한 학우들에게 굴욕감을 선사하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받고, 괴롭힘당한다.
천재가 범인으로부터 받는 저열한 괴롭힘에 얼마나 타격을 입는가는 고금의 문학작품에 그 사례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쓰여져 있는데, 그건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토니오 크뢰거>를 읽어주십시오), 결과적으로 이 영재아는 자신을 괴롭힌 범인들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에 파묻혀 그 분야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등의 경우는 있다.
확실히 아이 한 명을 그렇게 몰아붙여서 ‘매드 사이언티스트’ 비슷한 학자로 길러내는 것은 국책적으로 플러스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심의회의 이번 목적도 의외로 그런 데에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사자는 괴롭다.
‘그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들만 모아둔 영재 학급을 만들면 되지 않나요’라고 지금 생각한 당신. 아마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어렸을 때 ‘신동’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필자는 ‘왕년의 영재’였기 때문에 이쪽 사정에 훤해서 하는 말이지만, ‘영재’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너무나 ‘타자 지향성이 강한’ 생물이다. ‘타자 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은 요컨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몰라서, 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 아닌가’라는 소거법에 의해 자기동일성을 지탱하고 있는 유형의 독특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드러우면서도 능력이 있고’ ‘성품이 대쪽 같이 강직하며’ ‘밝고 쾌활한 리더 타입’ 같은 ‘영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하면 기어오르고, ‘졌다’고 생각하면 위축되는 그야말로 곤란한 아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재 학급’이란 모두가 서로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에만 급급해, 매주 ‘금주의 똘똘이’ 랭킹에 일희일비하는 슬프고도 슬픈 세계인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필자는 반대한다.
엉겁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예외적인 지적 능력을 얻게 된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당히 본성을 숨기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범인’ 흉내를 내며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학술 진보가 조금 뒤처진다고 해도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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