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3|30 깨인 가족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0. 20. 07:00

    부부 별성을 실천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 호적상으로는 같은 성씨이지만 문패에는 각자의 성을 내걸고, 유선 전화도 각자 소유하며, 배우자에게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 자녀들에게 부친, 모친 각자의 성을 제각기 부여하는 부부가 있다. 남자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성, 여자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성을 부여한다. 성을 같이 쓰는 것이 싫어서 혼인신고서를 내지 않고 ‘사실혼’을 실천하는 부부가 있다. 출생신고서 서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쓰지 않았기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호적이 없다. 취학이나 예방접종에는 문제가 없지만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부모는 말한다.

    이런 것들이 요즘의 ‘유행’인 것 같다. 저널리즘은 주춤주춤 찬성을 표명하며 자신들이 ‘신식’임을 내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부’, 이러한 ‘부모’의 사고방식에는 어딘가 도착적인 면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 자립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다, 자신의 이름으로 사회에 나서고 싶다, 자신만의 영역을 가정 내에서 확보하고 싶다, 가사 부담을 부당하게 짊어지고 싶지 않다, 내지는 배우자에게 걸려온 전화조차 받고 싶지 않아하는 남녀가 어째서 ‘결혼’을 해야만 했는가, 필자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

    혼자 살면 되지 않는가.

    혼자 살면 생활비 지출액이 다소 많아지고, 아플 때나 노후를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고, 대화 상대가 없어 적적한 것도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살아가는 상태는 그러한 마이너스의 ‘가치’를 지불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다.

    종속은 하고 싶지 않지만, 고독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은 ‘배불리 밥을 먹고 싶지만 살은 찌고 싶지 않다’ 는 것과 같은 종류의 불가능한 바람이다.

    ‘자유롭게 사는 것’과 ‘가족과 사는 것’은 양립하지 않는다. 자유로이 살고 싶은 사람은 혼자 살아야만 하고, 가족과 살기를 택한 사람은 조금씩 자유를 단념해야만 한다. 그런 건 상식이다.

    자녀들에게 양친의 성씨를 각각 따로 붙여주는 부부의 행동도 또한 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모들이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씨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과 활동을 나타내는 귀중한 증표’임으로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의 성씨에 대해서는 ‘단지 부호(符號)같은 것이므로 뭐가 되든지 상관 없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을 필자는 잘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기호에 지나지 않는 성씨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자녀들 자신이 앞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삶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부모들은 자신들이 결혼할 때 ‘성씨 따위는 부호같은 것이니, 한 쪽의 성씨를 정해 놓고 앞으로 부부가 살아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해나가자’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우리들은 집합적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면 부부 별성도 좋으리라. 어른이니 책임은 자신이 지면 된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에 입각해, ‘자녀와 부모는 집합체가 아니다’라는 것도 똑바로 주장되어야만 한다.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 아닌 것과 같이, 자녀는 양친 어느 한 쪽의 ‘소유물’ 또한 아니다. 그 아이들에게 어느 쪽이 되었든 부모의 성을 붙여준다는 것은 논리가 통하지 않잖는가.

    자기들 기분에 따라 어떤 때는 ‘성씨는 중한 것’이라고 하면서, 어떤 때는 ‘성씨가 알게 뭐냐’라고 한다. 어떤 때는 ‘남의 성씨를 쓰는 것은 정체성의 상실이다’라고 하면서, 어떤 때는 ‘타인의 성을 물려받는 것이야말로 정체성의 시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필자의 머리가 나쁜 걸지도 모르겠다.

    출생신고서의 서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 아이의 출생신고서를 내지 않으며, 무호적 상태에서 기르는 부모들의 사고 또한 필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지, 태어난 아이를 집단의 멤버로 승인하기 위한 의례가 존재한다. 성수로 세례를 베푸는 곳도 있고, 일족의 장로가 이름을 지어주는 곳도 있다. 태어난 아이를 집단체로 확인하고, 효과적으로 보호하며, 육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러한 집합적인 의례 없이 유야무야할 수는 없다. 그 의례를 의식적으로 거절한다는 것은, 동시에 집단의 인지와 보호를 또한 거절한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일본에서는 호적이 없는 아동도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고, 기본적인 아동보호조치를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호적이 없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자녀를 호적에 올리기를 거부한 부모의 의지를 존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행 호적 제도가 최선이 아니라는 점은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현행 제도의 부조리를 탄핵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호적 없음’이라는 핸디캡을 짊어지우고, 그 고통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타인(자녀는 ‘타인’이다!)을 희생양으로 바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인간을 ‘새로운 가족의 이미지’의 범례로 두는 것에 필자는 반대한다.

    여기서 들먹인 ‘제멋대로인 부부들, 부모들’ 모두에게 공통되고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그들의 ‘선진적 견해’가 뭐가 되었든 가족 가운데 다른 구성원을 희생케 하는 데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점이다.

    같은 집에서 살며 성씨가 다른 형제자매나, 호적을 가지지 못한 자녀, 그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덕분에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수많은 곤란과 조우하고 있다. 가족 가운데 자기결정권을 갖지 않은 ‘가장 약한’ 구성원이 받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가족의 다른 ‘강한’ 구성원이 모종의 ‘체면'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자녀에게 강제하고 있는 부모들은 ‘성씨가 다른 형제자매가 세간의 눈총을 받게 되는 사회 그 자체가 나쁜 거다’ 라든가 ‘호적이 없는 자녀가 불편을 느끼게 되는 제도 그 자체가 문제다’ 라며 반론할 것이다. 그 지적에는 일부 논리적 정합성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가족 구성원에 대한 경의와 애정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

    가족과 관련한 ‘선진적인’ 입장을 참칭하는 경우의 과반수는 ‘가장’의 대외적인 위신을 위해 ‘약한 권속’이 희생된다는 점에서, 전통적 가부장제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고로 필자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털끝만큼의 ‘선진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 이후의 세계  (3) 2021.10.26
    14|30 하늘을 나는 교실  (0) 2021.10.23
    12|30 어덜트 칠드런  (0) 2021.10.17
    11|30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들  (2) 2021.10.14
    10|30 책을 읽읍시다  (2) 2021.10.11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