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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 기린의 목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14. 07:58
고이즈미 교코는 머리가 작다.
키는 크지 않지만, 머리가 작은 덕분에 전체 비율이 좋다.
‘고이즈미 교코’형 체형은 현대 젊은 여성들에게 가장 선호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체 특징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최근 일이다.
나의 고등학교 서클 동급생 중에 하시모토 군이라는 (훗날 판사가 된) 수재가 있다. 그의 고민은 ‘머리가 작다’는 것이었다. 같은 학년에는 아라이 군, 시오타니 군이라고 또한 전설적인 수재들이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과 같은 거대한 머리의 소유자였다.
우리 하시모토 군은, 그 두 사람이 거대한 머리의 무게를 받치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교정을 가르지르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좋겠다, 이이들은 머리가 커서. 나는 아무리 공부해도 결국, 뇌의 절대적 크기로는 패배할 테니 따라갈 수 없어...’ 하고 그는 장탄식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별난 고민도 있는 거구나 하고 묘하게 탄복한 것이 지금껏 기억에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하시모토 군은 상당히 신체 비율이 좋았다. 하지만 30년 전에는 ‘머리가 작다’는 것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심미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반세기가 지나 신체비율에 대한 미적 기준이 변화했다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미적인 기준 같은 것은 점점 변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름다운 이’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인 기준의 변화와 함께 실제로 ‘머리가 작은’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의 체형은 미적 기준의 변화에 대응하며 극적으로 변화해 온 것이다.
매년 아동 및 학생의 체형 추이가 발표되는데 그때마다 일본의 자녀들은 신장이 늘고, 다리가 길어지며, 대체로 서구적 체형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양학자나 교육학자가 이 체형 변화는 식생활이나 서양식 라이프스타일, 운동 부족 등이 이유라고 설명해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체형의 변화가 설명될 수 있을까?
햄버거를 먹고 소파에 앉아 닌텐도 게임만 하는 아이들의 다리가 퇴화한다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운동 부족으로 배가 나오고 TV 화면을 너무 가까이에서 봐 눈이 튀어나온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하는데 어째서 ‘머리가 작아지게’ 되는 것인가? 머리와 신체의 비율이 왜 변하는 것인가?
누구도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쯤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폭론적暴論的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이 변화에 외면적, 물리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면적, 심리적인 조건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작은 게 멋지다’는 사회적 감수성이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되면, 당연하게도 부모들도 어린 자녀들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머리를 될 수 있는 한 작게 보이려는’ 노력을 한다. 이 노력에 의해 머리 사이즈가 바짝바짝 줄어든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머리 위의 나뭇잎을 먹기 위해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는 것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가르쳐주는 바다. 기린 개체가 노력해서 짧은 목을 필사적으로 늘리면 그 자식은 부모가 늘린 것만큼 태어날 때부터 목이 길어지는 것이다.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 진화를 설명하는 네오다위니즘 이래, 진화론은 라마르크설을 일소에 부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라마르크가 옳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작금의 교과서에는 쓰여져 있다. 어느 생물학자가 실험적으로 라마르크설을 재현해 본 것이다. 그는 쥐의 꼬리를 잘랐을 때 그 자식이 꼬리 없는 쥐가 되는지를 140대에 걸쳐 실험했다. (용케 이런 바보같은 실험을 할 생각을 한 거다.) 그리고 아무리 부모의 꼬리를 잘라도 자식의 꼬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꼬리를 자름에 따라 자식의 꼬리가 사라진 채 태어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문외한이라도 안다. 왜냐하면 ‘꼬리가 없다’는 조건은 쥐의 생존에 있어서 어떠한 메리트도 없기 때문이다. 생존에 있어서 메리트가 없는 획득형질이 꼭 유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기린의 긴 목과 마찬가지로, 소녀의 작은 머리는 개체 각각의 생존에 있어서 유리하다.
고이즈미 교코형 소녀는 맛있는 것을 먹는다든가, 모피코트를 손에 넣는다든가, 쾌적한 주거환경을 보증받는 확률이 ‘모아이’형 소녀보다 높다고 추측된다. 심미적으로 하이레벨한 개체는 당연히, 배우자를 찾아낼 기회도 넉넉하니 ‘머리가 작은’ 유전자는 높은 확률로 그 복제를 얻게 된다.
미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의 변화는 분명 더없이 높은 진화압으로서 작동하고 있을 터이다. 무심코 큰 머리로 태어나면 자손을 남길 수 없으므로 당사자는 필사적이다. DNA의 배열 정도는 ‘근성’으로 재조합한다고 해도 불가사의한 일은 아니다.
부자의 자녀는 어째서 부자가 되느냐 하는 것도, 지성이나 덕성이 어째서 유전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전부 라마르크 설로 설명할 수 있다. 돈을 버는 능력은 개체의 생존에 유익하지만, 지성이나 인덕은 대체로 그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방향으로밖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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