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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주세요! 우치다 선생님 -의대생들이 묻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14. 18:00
8월 11일에 ‘의대생 세미나’라는 곳에서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강연을 진행하였다. 제목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상과 의료’. 90분 동안 발언한 후 30분 정도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는데, 시간이 부족해 나머지 질문은 메일로 보내줬다. 이 대답들을 채록해둔다.
Q: 현재 학부 2학년생인데, 장차 소립자 물리학 연구자로서 학술적인 세계에 입문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기초적인 학문 연구 과정에서 소요되는 국비를 정부에 요구함에 있어서, 기초 연구활동 지원에 부정적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기초 연구활동 지원에 부정적인 사람들’이란 달리 말하면 ‘장기적 시간 간격을 통해 사고하는 것이 서툰 사람들’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현재의 과학 기술이 엄청난 역사적 풍설을 겪으면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이해하는 한편, 앞으로는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진화와 변천을 이루어나갈 것인지를 백 년 천 년 단위로 생각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기껏 25년 정도라는 시간 안에 ‘그 기술을 개발해 얼마나 수익을 올릴 수 있겠는가’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머리가 나쁜 사람들’입니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미래 과학기술의 향방을 결정하는 요직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쯤에서 질문을 다시금 정리하자면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현명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되겠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정책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 통치 시스템을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것’뿐입니다.
Q: 평상시에서 긴급 태세로 유연하게 키를 돌릴 수 있으려면 평소에 어떠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요. 말하자면 비상시를 비상시라고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그러한 인식에 도움이 될만한 균형 감각을 기르는 법 내지는 사회에 안테나를 잘 뻗치는 법 등이 있다면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A: 평상시에서 긴급 상황으로 관점을 바꾸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평상시란 ‘자신이 보는 것,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해도 큰 실수를 범하게 되지는 않는 상황입니다. 이를테면, 팬데믹에 대해 ‘나는 감염되지 않았고, 내 주위에도 확진자가 없다’는 사실에서 ‘그래서 이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는 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평상시의 발상’입니다.
그에 반해 ‘자신의 지견만을 토대로 판단하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접근해서, 어찌됐든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을 ‘괄호 안에 넣고’, 여러 전문적 지견을 선입견 없이 음미하는 것이 ‘긴급 상황시의 발상’입니다. 팬데믹으로 말하자면 ‘나는 감염되지 않았고, 내 주위에도 확진자가 없지만 그렇다고 <별 일 아닌> 상황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지견의 범용성을 과신하지 않는’ 마인드셋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생각만큼 복잡한 얘기도 아닙니다.
평소부터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을 고집하는 일은 자제하고, 사람이 하는 말을 두루두루 듣는 자세를 갖추며, 남들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력을 펼치는 노력을 하면, 긴급 상황이 닥쳤을 때의 절박함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긴급 상황이 되면 많은 수의 ‘타인들’이 일제히 평소와는 다른 노이즈를 발신하고, 평소 보아왔던 것과는 다른 광경을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긴급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란 ‘평소부터, 남의 말을 제대로 듣는 사람’,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얘기를 들어도 <그럴 리 없다>며 무시하지 않는 사람’을 이릅니다. 이를 잘 생각해 보면 의료종사자에게도, 교육자에게도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Q: 과도한 세계화로 인해 국민 경제가 피폐해짐으로써 ‘국민국가로의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고 에마뉘엘 토드가 말했습니다만, 프랑스의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이나 트럼프 등 ‘반 세계화주의’에 가까운 정치 세력이 배외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등장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국제 협력(혹은 국내 소수 민족과의 융화)과 국민 경제(국민을 굶기지 않는 일)를 양립시킬 수 있을까요.
A: 글로벌리즘이란 달리 말하면 ‘무국적주의’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이므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종의 ‘집단주의’가 등장한 것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동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 지향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내셔널리즘’이 아닌, 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선구적 형태, 즉 전근대적인 ‘트라이벌리즘(tribalism); 부족주의’가 될 것 같다는 점입니다.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내셔널리즘의 부활’이 아닙니다. 보다 협소하고, 보다 배타적이며, 보다 폭력적인 ‘네이션 분단’입니다. 인종, 성별, 종교, 정치적 이데올로기, 성적 지향, 출신, 계층, 재산, 학력 등 여러가지 지표로 ‘네이션’이 분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자칭 내셔널리스트’들이 주로 꾸미는 일이란 ‘누가 일본인이 될 수 없는가’ 하는 선별과 배제입니다. 그들은 물론 국내 거주 외국인도 ‘비국민’으로 간주합니다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인간 역시 ‘반일’로 낙인찍고 ‘2등 시민’으로 분류합니다.
애초에 근대 내셔널리즘이란 것은, 그때까지 뿔뿔이 대립하고 있던 집단을 통합해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엄청난 사업이었습니다. 환상에 의거한 집단 통합이므로 물론 상당한 무리가 뒤따랐습니다. 그럼에도 ‘국민’의 사이즈를 될 수 있는 한 크게 잡는다는 목적은 나쁜 게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이즈를 크게 해놓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트라이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은 벡터가 반대입니다. 트라이벌리즘은 이제까지 무언가 상상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집단을 분해해서 ‘참된 국민/가짜 국민’ 사이에 분단선을 긋고, 집단을 순혈화하며, 집단을 작게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내셔널리즘과 트라이벌리즘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트럼프는 국민을 의도적으로 분단함으로써 정치적 추진력을 얻곤 했습니다만, 이는 트라이벌리스트의 방식입니다. 반면 바이든은 당선 후 ‘트럼프 지지자를 포함한 전 국민을 대표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내셔널리즘의 태도입니다.
르펜이나 트럼프 그리고 세계의 ‘배외주의자들’은 트라이벌리스트이지, 내셔널리스트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국제 협력과 국민 통합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순혈’이나 ‘순수’를 꾀하는 집단보다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가족’ ‘동포’로 맞아줄 수 있는 관용적인 집단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구사할 수 있을 만한 정치적 장치는 우리들 수중에 우선 ‘내셔널리즘’밖에 없습니다. 뜬금없이 ‘70억 인류는 모두 동포입니다’라는 말을 내걸고서, 70억 명을 동일한 정치 시스템 안에 욱여넣고 동일한 법을 따르게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어찌되었든 수중의 내셔널리즘을 개량해서 ‘될 수 있는 한 손실을 최소화하는 한편 이익을 많이 가져다주는 내셔널리즘 형식’을 모두가 생각해내서, 손수 만들어나가는 것 말고는 트라이벌리즘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도구가 달리 있겠나 하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2021-08-12 10:4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원제: 医学生ゼミナールの質疑応答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8/12_1041.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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