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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30 커피우유 찬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17. 07:15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카레소바가 그것들 중 하나다.
이렇게 비속한 음식에 대한 기호는 어쨌든간에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론화하기가 곤란하다. ‘카레 소바’의 경우에는 역시 ‘카레’라는 외래식품과 ‘소바’라는 일식의 전율적인 만남, 이라는 부분에서 시작해, 로트레아몽 등을 적절히 인용하며 이것을 ‘쉬르리얼리스틱한 음식’이라는 식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한 장난같은 익스큐즈를 생각해내지 않는 한, 예를들어 데이트 같은 때 실실 ‘카레소바’를 먹는 주제에 자신이 지적이고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여성에게 남기기란 어렵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용납되지 않는 음식’에 깊은 애정을 품는 동시에, 젊은 여성에게 지적이며 서정적인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고약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언제부턴가 자신의 ‘용납받지 못할 사랑’을 시답잖은 이유로 정당화시키는 기술에 있어서 나는 숙련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아래는 내가 구사하는 그러한 궤변 중의 하나이다. 이번에 내가 정당화하려는 ‘용납되지 않는 식품’이란 커피우유이다.
나는 커피 우유가 좋다.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커피우유는 도무지 성숙한 남성의 음료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챈들러, 로버트 B. 파커, 개빈 라이얼... 그들이 그리는 하드보일드한 남자들은, 맥주나 아이리시 위스키, 기믈렛을 쉴 새 없이 섭취한다고는 하지만, 결코 커피 우유만큼은 마시지 않는다. 자신이 그린 등장인물이 실로 여러가지 음료를 마신다고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보더라도, 내가 과문한 탓인지 커피우유의 등장 여부만큼은 알지 못한다.
예로부터 영화와 TV에서 커피 우유를 마시는 장면이 인상 깊게 채용된 사례란, 나의 단견으로 보건대, 없다.
허구의 세계에서 아무리 빈번하게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때때로는) 우유를 마심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합체시킨 훌륭한 발명품으로서의 커피우유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합성 감미료와 책색료가 첨가되어 위험한 식품으로 알려진 콜라나 탄산음료가 광고를 통해, 혹은 비판 기사를 통해 계속 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데, 커피우유에 대해서만큼은 좋든 나쁘든 누구 하나 언급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그 원인을 이 식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어두운 숙명’에 있다고 본다.
‘커피우유’, ‘카레소바’, ‘야키소바 빵’, ‘된장 돈까스’, ‘고로케 소바’, ‘다코야키 라멘’ 같이 일련의 ‘용납되지 못할 음식’이 존재한다. (섭취가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연히 그것을 기호식품으로서 말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쉬이 알려져 있듯이, 이 ‘금지된 음식’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은 ‘하이브리드(이종교배)’적 성격이다. ‘혈통도 성장환경도 다른’ 복수의 식품 요소가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동거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두운 숙명’의 구조도 논리적으로 밝혀지게 된다. 그렇다, 하이브리드 식품의 치명적인 특성은 하이브리드 동물과 동일하게, 번식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레는 종과 속이 다른 자손을 생산해내는 능력이 있다. 돈까스 카레, 카레 빵, 카레 돈부리, 드라이 카레, 카레맛 포테이토 칩 등등. 소바도 또한 무수한 변종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카레 소바’에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지는 음식을 재생산할 힘이 없는 것이다. ‘카레소바 빵’이라든가 ‘카레소바 맛 풍선껌’같은 것을 우리들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커피우유에도 역시 그러한 ‘불모성’이 각인되어 있다. 커피에는 무수한 변형이 있다. 고유의 색채가 있고, 고유의 향이 있으며, 고유의 맛이 있고, 심지어 ‘커피 색의 세뇨리따’같은 것까지, 무수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우유도 마찬가지로 ‘젖빛의 은하수’로부터 ‘밀키 캔디’까지 무수한 시적 이미지의 원천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커피와 우유의 하이브리드인 커피우유에는, ‘대중목욕탕에 들어갔다 나와서 마시는 음료로 가장 선호되는’ 세속적 영예 이외에는, 어떠한 변주도 파생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브리드 식품의 ‘어두운 숙명’인 것이다. ‘카레 소바’나 ‘커피우유’는, 라이거와 같이 생식능력을 잃은 존재인데, 자전거나 와이퍼와 똑같이 진화의 극한에 이미 도달해 있다. 이것들은 전통을 전할 자손이 없으며, 미래가 없다.
커피 우유는 세속성 속에 깊은 공허를 담지하고 있는 비극적인 식품인 것이다.
이렇게 글을 맺음에 있어 나는 사려 깊은 시선을 눈 앞에 놓인 차갑고도 우두커니 놓여져 있는 글라스에 조용히 향한다. ‘이래서 나는 커피우유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없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시면 커피우유를 조용히 음미하는 남자가 갑자기 지적이고 감수성 풍부하게 보이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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